한국사 이야기 72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화암사 가는 길
완주군에 딸린 고산(高山)은 산수가 아름답고 땅이 기름지며 넓어서 대추와 생강 그리고 감이 많이 난다.
‘고산강아지 감 꼬챙이 물고 나서듯 한다’라는 속담의 뜻은 고기가 귀한 산중 강아지는 뼈다귀와 비슷한 곶감 꼬챙이만 보아도 뜯어먹으려고 하듯이, 없는 사람은 늘 먹고 싶던 것과 비슷한 것만 보아도 좋아한다는 말이다. ‘고산 놈 숫돌로 제 아비 치듯 한다’는 말은 고산 사람이 숫돌을 캘 때 돌이 굴러서 아래에 있던 아버지를 죽이듯이, 과실로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은 과실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듯 산이 깊고 물이 맑은 고산을 두고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 길이나 벽처럼 서 있고, 길이 좁아서 말을 내려야 다닐 수 있다.
완주군 경천면에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절 화암사가 있다. 그 아름다운 정경이 15세기에 만들어진 「화암사중창기(華巖寺重創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절은 고산현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 비록 나무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둔 복된 땅이다.
화암사 대웅전화암사 극락전은 남쪽을 향하여 1미터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고,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빼내기 위하여 하앙을 얹은 후 이중의 서까래를 가공한 것이다.
그렇게 오르기 힘들었던 바위벼랑 아래로 지금은 철계단을 놓아 오르기는 쉬워졌지만 그 아슬아슬한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 화암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화암사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한 나무가 있어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웠는데, 푸른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이라고 부른다.
신라 문무왕 때 초창된 것으로 추측되는 1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 화암사는 확실한 창건자나 창건 연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이곳의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큰 바위 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 이름 지었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와 의상이 화암사에서 수행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신라 진덕여왕 때 일교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문무왕 때나 그 이전에 창건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원효와 의상 두 승려가 이곳에 머무를 때 법당인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에 대해서는 의상대사가 도솔산에서 직접 만나봤다는 수월관음의 모습을 사람 크기만 하게 그려서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화암사 동쪽에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대의 전설이 전하고 의상대사가 정진한 의상대는 불명산 정상에서 남쪽 아래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원효와 의상 이후 고려시대의 사찰 기록은 거의 없고, 세종 7년(1425)에 전라관찰사 성달생의 뜻에 따라 당시의 주지 해총이 4년에 걸쳐 중창하였는데, 이때 화암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한 몇 개의 건물만 남기고 모조리 불타버렸으며, 훗날 지어진 명부전과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을 지닌 철영재와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ㅁ’ 자를 이룬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국보 제316호)은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下昻式)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축물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처이기도 하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고 중앙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 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화암사 가는 길 © 유철상완주 화암사 가는 길.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극락전은 남쪽을 향하여 1미터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고,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빼내기 위하여 하앙을 얹은 후 이중의 서까래를 가공한 것인데, 하앙이란 지붕과 기둥 사이에 끼워 지붕의 무게를 떠밭치게 한 목재를 이르는 것으로 하앙부제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으며 특히 처마 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을 줄이고 건물의 높이를 올려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하앙식 건물은 비바람을 막아주면서도 그 유연한 아름다움이 빼어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현존 양식을 찾지 못하다가 1978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같은 하앙식 건축물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 있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처리되어 있다. 내부에는 가운데에 양목이 얹어져 천장의 높이가 전, 후면에서 크게 움츠러들었다. 극락전의 내부 닫집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비상하는 용을 그린 비천상이 걸려 있다. 극락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동종이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때 다시 주조하였는데, 종각을 세우고 종소리로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는 뜻으로 종 이름을 자명종이라 했다고 한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절에 대하여 고려 때의 백문절(고종 때 과거에 합격한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국학대사성에 이르렀다. 글솜씨가 뛰어나 붓만 대면 순식간에 문장을 이루어서 당대에 추앙을 받았다)은 「화암사」라는 글을 남겼다.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100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말 버리고 걸어가는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 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에 1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 기울었도다.
한편 고산면 삼기리에 있는 삼기정(三奇亭)을 두고 조선 초기의 문신인 하연은 다음과 같은 기문을 남겼다.
고산현의 동쪽 5리쯤에 조그마한 산등성이가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있다. 그 아래에는 긴 시냇물이 있어 맑고 맑은 물이 빙빙 돌며 흐르는데,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있어 무성하게 우거져 푸르며, 그 서쪽은 평평하게 고르다. 임인년 봄 내가 순찰차 이곳에 올라서 관람하니, 안개와 초목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눈앞에 보이는데, 그중에도 물, 돌, 소나무는 특히 기묘하게 좋은 경치였다. 이에 3기(奇)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 대개 사람의 정(情)은 물(物)에 감동이 되어서 변하는데, 눈으로 본 바는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냇물의 맑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연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고, 돌이 높게 겹친 것을 보면 확연히 뽑지 못하는 뜻이 더욱 굳어지며, 소나무가 늦도록 푸른 것을 보면 굳은 절개가 더욱 높아지는데, 이 산등성이의 세 가지 물건이 어찌 관람하는 데에 기이하고 무더운 여름철의 휴식하는 쾌락뿐이겠는가.
내가 보는 바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 올라서 감흥이 되어 마음을 붙이고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마음을 잡고 성정을 기리는 기틀이 될 것이고, 따라서 목욕하고 바람을 쏘이면서 읊조리고 돌아가는 즐거움이 될 것이니 내가 이름 지은 뜻을 대개 짐작할 것이다.
하연이 보았던 당시에는 냇물이 바로 절벽 아래를 흘러갔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그 물길이 들판 가운데로 돌아 논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라서 상전벽해를 거듭 실감할 수 있다.
화암사에서 흐르는 물은 동상면 사봉리에서 흘러내린 만경강 본류와 만나 삼례를 지나서 김제시의 망해사 근처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한편 완주군 삼례읍 만경강가의 높다란 벼랑 끝에 서 있는 비비정은 옛길 삼남대로의 길목에 세워져 있어서 수많은 길손들이 쉬어 갔던 곳이다. 1573년(선조 6)에 최영길이 세웠으며, 1752년(영조 28)에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하여 관정(官亭)이 되었다. 지금의 비비정은 사라지고 없던 것을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삼례읍은 오늘날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완주군에 속한다. 옛날 백제시대에 거찰의 터로 고금을 통해 삼례 합장하는 곳이라 하여 삼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엽까지 역마의 주둔지로 중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삼례도찰방(參禮道察方)이 있었다.
1793년(정조 17)에 편찬된 『호남읍지』에도 삼례역은 호남을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실려 있는데 호남 지방에서 최대 규모라고 하였다. 문관으로 종6품인 찰방 1명과 예하에 역리 596명, 남자 노비 191명, 여자 노비 51명, 일수(日守) 31명, 말 15필을 두었으며, 부속된 역원만도 12개가 되었다고 한다.
삼례는 조선시대의 아홉 대로 중 전북의 전주와 남원, 경남의 함양과 진주를 거쳐 통영으로 가는 6대로인 통영대로가 삼남대로와 나뉘는 곳이었다. 따라서 전남의 순천, 여수, 고흥, 광양 방면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 함양, 진주, 고성, 산청, 통영 방면도 모두 이곳 삼례를 거쳐서 갔다. 이와 같이 삼례역은 호남 제일의 역으로서 전라도 역도인 삼례도(三禮道)의 중심 역이었던 것이다.
삼례를 지나던 매월당 김시습은 「삼례역에서 묵으며 (宿三禮驛)」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반평생 긴 세월을 길로써 집을 삼으니
일만 물 일천 산이 눈 속에 아득하네.
객관의 깊은 밤에 좋은 달을 바라보고
작은 뜰에 바람 스치자 떨어진 꽃을 주워 모으네.
벽골지(碧骨池)에 구름 걷히자 물결은 거울 같고,
김제 벌에 비 내리니 보리 비로소 싹트네.
바닷가의 가을은 늙지 않는다.
이곳 삼례에 조선 초기에는 종9품인 역승(驛丞)이 있었으나 성종 이후 앵곡도와 병합하였고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삼례, 반석, 양재, 앵곡역은 중로(中路)에 속하는 역이고 그 밖의 역들은 소로(小路) 또는 소역에 속하였다. 『여지도서』 「삼례도역지서(參禮道驛誌序)」에 실린 삼례역은 여산의 양재역, 함열의 임곡역, 임피의 소안역, 김제의 내재역, 부안의 부흥역, 고부의 영원역, 전주의 반석역과 앵곡역, 태인의 거산역, 임실의 오원역과 갈담역, 고산의 옥포역 등 모두 13개의 역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조선 후기라서 그런지 역노(驛奴)와 역비(驛婢), 보인(保人) 등이 모두 달아나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례로 현재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 앵곡마을에 있었던 앵곡역의 경우를 보자.
전주 서쪽 30리에 있으며, 삼례역에서 40리다. 역노가 세 명인데 달아나고 없으며, 역비 한 명도 달아나고 없다. 역마 11마리, 위전답 29섬 18마지기, 복호 46결이다. 보인 46명, 솔인 23명이다. 일수 15명은 유망하였다. 수미 1석, 수태 1석이다.
삼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던 앵곡역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임실군 관촌에 있던 오원역의 경우를 보면 보인 18명, 솔인 18명도 달아나고 없고, 임실군 강진면에 있던 갈담역은 대부분 달아나고 없는 것으로 실려 있다. 그런 것을 보면 그 당시 나라의 기강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학자인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보면, 직산에서 천안을 거쳐 삼례를 지나 전주에 이르는 길은 대로와 중로, 소로 중에 중로에 속한 5등 도로라고 한 내용이 있다. 대, 중, 소로의 구분은 노폭의 넓고 좁음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말이나 역호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삼례역에는 역마가 20필, 역호가 75호였다.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춘 절터
우리나라 전통사찰은 배산임수나 수맥, 산세를 고려해 터를 잡았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꽃봉오리처럼 산이 감싸고 있는 경우가 많아 수행에 정진하기 좋은 조건이다. 또한 땅의 기운이 약하면 탑을 세워 기운을 보충하는 일종의 비보풍수를 적용한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