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말이 없는 사람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바람이 불어오는 먼 곳에 있는 사람
하나, 둘, 셋, 넷,
숫자와 숫자 사이로 사라지더니
눈이 마주치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사람
흰 눈이 내리고 우리는 신이 나서
없는 사람을 만들고
없는 사람 모르게 웃었습니다
없는 사람이 가끔 멀리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볼 때 그는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 같았습니다
그날 옥상에 서 있던
없는 사람이 만드는 날씨,
없는 사람이 홀로 부르던 노래,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한동안 검고 흰 허공을 보다가
빈 팝콘 박스를 들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나는
아이들 어깨 너머로 천천히
얼굴과 심장이 흘러내리며 비로소 웃던
없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없는 사람이 끝까지 보고 있던 것이
사람이라는 생각도
이 어둡고 쓸쓸한
영화관 복도를 지나면
곧 마주칠 햇살에 금방 녹아 버릴 테고
그렇게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눈부시게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저녁이 온다
네가 저녁에 대해 물었을 때
먼 산 뒤에 숨어 있던 저녁이 온다
저녁은 가만히 돌아앉아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
물컵에 천천히 한숨을 따를 때
비스듬히 저녁이 온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있는 저녁에게
손을 흔드니, 저 순한 어둠은
못 본 척하지 않고 나에게로 와
한 편의 시가 된다
저녁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둑어둑
깊어지는 저녁의 눈빛
모닥불로 훨훨 거침없이 피는 저녁
자귀나무 이파리로 가만히 흔들리는 저녁
때로는 담장 아래 앉은 그림자로
훌쩍거리는 저녁
빙글빙글 돌아가는 저녁의 식탁에 앉아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사람들
눈 위로 떨어지는 한줄기 빛,
혹은 오래 묵은 빚처럼 완성될
어느 쓸쓸하고 가난한 저녁을 위해
우리는 매일매일
저녁의 숨소리를 배우며 사는 것
오늘의 저녁은
일만구천칠백열두 번째 저녁,
저녁을 밟고 저녁을 넘어
물밀듯이 밀려오는 저녁
소리 없이 다가오는 사자처럼
검은 눈빛을 펄럭이며 저녁이 온다
저녁을 부르면 최초의 약속처럼
아름답고 서러운 저녁이 온다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사람, 2024.3)
이명윤 / 경남 통영 출생. 2006년 전태일문학상 당선. 2007년 계간 《시안》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