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지혜를 주는 참 좋은 글과 아름답고 후회 없는 삶으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한경직 목사님,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세 분의 삶을 돌이켜보면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이셨다.
그 분들을 한데 묶는 공통 단어는 청빈(淸貧)이다. 한국 대형 교회의 원조인 영락교회를 일으킨 한경직 목사님이 남긴 유품은 달랑 세 가지였다. 휠체어, 지팡이, 그리고 겨울 털모자다. 그리고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기우고 또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세상에 두고 떠났다.
김수한 추기경님이 세상을 다녀간 물질적인 흔적은 신부복과 묵주뿐이었다. 그리고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은,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용달차를 모는 사진이다.
알고 보면 세분은 모두 가난한 부자들이었다. 아니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준 엄청 재산가였다고나 할까.
한경직 목사님이 작고한 이후 개신교는 또 한 차례의 중흥기를 맞아, 신도 수가 크게 늘었다.
성철 스님 열반한 뒤에 스님의 삶이 알려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이 달라졌다.
김수한 추기경님이 천주교를 이끌던 시절, 신도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세 분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던 분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그대로 살아보고자 했던 분이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세상을 떠난 다음 세 분의 향기는 신도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들 사이로 깊고 멀리 번져나갔다.
한경직 목사님은 설교 중에 몇 번이고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능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전설적인 목회자로 존경받는 것은 그의 삶이 설교의 빈 구석을 채우고도 남기 때문이다.
한신도가 한경직 목사님이 추운 겨울 기도를 하다, 감기에 걸릴 걸 염려해서, 오리털 잠바를 선물했다. 얼마 후였다. 영락교회에서 백병원 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에서, 바로 그 잠바를 입은 시각장애인이 구걸하고 있었다. 목사님 아들도 같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후계자라는 말은 흘러나온 적이 없다.
성철 스님은 늘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받는 걸 화살을 맞는 것 만큼 아프고 두렵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쌀 씻다 쌀이 한 톨이라도 수채 구멍으로 흘러간 흔적이 보이면, 다시 주워 밥솥에 넣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불교계의 큰 어른인 종정(宗正)직을 오래 맡았지만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며 항상 종정 자리를 벗어날 틈을 찾기도 했다.
김수한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덕목에 '노점상'이란 글이 있다. “노점상에게 물건 살 때 값을 깎지 마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부르는 값을 주면 희망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추기경님은 명동의 노점상 앞에 가끔 걸음을 멈추고 묵주를 샀다.
''짐이 무거워 불편하다면 욕심이 과한 것이다. 덥석 물건부터 집지 말고 시장 안을 둘러봐라. 한 번 사버리고 나면 바로 헌 것이 되니 물릴 수 없다. 내가 가지려 하는 것부터 남에게 주어라. 준비가 부족한 사람은 어려운 세월을 보낸다.
남루한 노인이 운영하는 작고 초라한 가게를 찾아서, 물건을 고르고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내밀어라.''
세 분은 일편단심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실천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한 적이 없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파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회 일치운동을 하셨고, 성철 스님은 여러 종교의 경전에도 두루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멀리서 배울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스승이 있다.
고개를 들면 스승의 얼굴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그분들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세상을 비추던 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바르게 삶을 사는 방법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무욕, 청빈, 솔선수범, 관용의 정답이 거기에 담겨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가끔씩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고,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북한산 백운대는
높이 836m로 북쪽의 인수봉(仁壽峰), 남쪽의 만경대(萬景臺)와 함께 북한산 고봉 중의 하나이며, 화강암(花崗岩)의 험한 암벽을 노출하고 있다,
인수봉(仁壽峰, 810.5m)·노적봉(露積峰, 716m) 등과 함께 북한산의 고봉을 이룬다. 이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단에 해당되는 곳으로, 중생대 쥐라기(Jura紀) 말에 있었던 조산운동 때 열선(裂線)을 따라 화강암이 대상(帶狀) 으로 분출한 대보화강(大寶花崗岩)지역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화강암의 풍화에 의하여 형성된 화강암돔(granite dome) 지형의 대표적인 것으로, 험한 암벽을 노출하고 있다. 화강암돔에는 인수봉과 같이 암탑상(巖塔狀)의 것도 있고, 백운대와 같이 거대한 암반으로 노출되기도 한다.
서울 근교에 있어 도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등산을 돕기 위한 로프와 계단이 놓여 있으며 기암괴석, 맑은 계류, 푸른 수림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운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고, 백운사지(白雲寺址)를 비롯, 최근에 신축된 절과 암자들도 많다.
백운대에 오르는 길목은 여럿이 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지나는 약 8㎞ 코스와 창의문(彰義門)과 세검정에서 오르는 약 12㎞ 코스, 정릉에서 오르는 약 10㎞ 코스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계곡과 능선을 따라 여러 방면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산마루는 수백명 가량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암반(岩盤)으로 되어 있으며 기암절벽(奇岩絶壁)의 조망이 일품이며 일명 삼각산으로도 알려진 산이다.
나로선 이미 수십번 올랐던 백운대지만 오늘의 백운대는 나에게 있어 나의건강을 테스트하는 순간이기도 해 약간은 긴장도 되고 약간은 경건하고도 조심스런 무대이기도 한 곳이라 다른 때보다 많은 설램속 입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너무좋아 꼭 봄날같은 기분이었다.
월요일인데도 사람이 많았고
특히 외국사람들이 많아 우리나라 산이 아닌 외국의 어느 산 같았다.
짐작컨데 절반 이상인것 같다.
이렇게 멋지고 살기좋은나라 우리 대한민국인데 정치하는 사람들만 사람구실 좀 한다면 진짜 세계에서도 1등국가 가 될텐데....,
북한산 국립공원(북한산성입구)
공원입구.
인증샷.
용암사 삼거리
대서문.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시 북부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으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五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이다. 또한 서울 근교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여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불렸다. 북한산은 고려 때부터 삼각산이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북한산 연봉 가운데 가장 높은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87m) 세 봉우리가 멀리서 바라보면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에 조선조 숙종 때 축성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다.
북한산성은 본시 삼국시대 때 백제가 도성인 하남 위례성(慰禮城)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처음 축성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는 이 성에 핵심 군사력을 배치해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을 펼칠 땐 북벌군의 중심 요새로 삼았다. 이때 백제가 쌓은 성은 토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겼을 때 성을 증축했고,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이 있었으며, 우왕 때 성을 개축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외침을 자주 겪으면서 도성 외곽의 성을 고쳐 쌓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래서 숙종 때 북한산에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산성을 완성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숙종 31년(1711년)에 축조한 것이다. <北漢誌(북한지)>에 의하면, 당시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행궁, 군창과 함께 여러 개의 우물과 저수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산성 안에는 중흥사(重興寺)를 비롯 12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모두 산성을 수비하는 승군(僧軍)을 배치했다.
숙종은 선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 한때 나라의 존립조차 위태로웠기에 늘 불안했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그대로 둔 채 한양에서 가까운 북한산에 새로 산성을 쌓기로 결심한다. (북한지)에서는 당시 숙종의 결심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북한산은 바로 온조왕의 옛 도읍지로서 실로 천연의 요새지인데 도성과 지척지간의 거리에 있다. 이러한 천연의 요새가 있는데도 만일 지금 축성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서 축성을 한단 말인가?...... 만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합해서 결정하려 하면 성사되기가 어려울 것이니 결단코 당장 축성하는 것이 옳다’
북한산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은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大西門)이 있는 곳이다. 대서문은 이름 그대로 산성의 서쪽에 세운 문이다. 그런데 대남문을 비롯해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용암문, 위문 등의 문루가 모두 높이 600m 이상의 가파른 산등성이에 있는 반면 대서문은 북한천계곡 입구 산자락의 낮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적을 방어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 대서문이다. 따라서 적의 공격 시 대서문이 함락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계곡의 가장 좁은 곳에 또 한 겹의 성곽과 차단문을 설치했으니 곧 중성과 중성문(中城門)이다.
숙종은 북한산성이 완공되자 친히 시찰하게 된다. 그리고 산성을 둘러본 뒤 연시 6수를 남겼으니 곧 어제시(御製詩)다. 숙종이 대서문을 둘러본 뒤 쓴 어제시 두 번째 시구는 다음과 같다. ‘西門初入一回頭(서문초입일회두) 氣壯心雄寫我憂(기장심웅사아우) 國都咫尺金湯固(국도지척금탕고) 何棄吾民守漢州(하기오민수한주)’ 이를 우리 말로 풀이하면 ‘서문으로 들어가 고개 돌려 뒤돌아보니, 왕성하고 웅장한 기운과 포부 내 맘속의 시름 절로 지워지네, 국도의 지척에 금성탕지(金城場池)처럼 견고한 성이 있으니, 내 어찌 백성을 버리고 수도를 지키지 않으리오’
숙종의 어제시에서 보듯 북한산성은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성곽을 축조해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내에 주민들이 마을을 이뤄 살고 있는 남한산성과는 달리 산세가 험준해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산성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게 단점이다. 현재 북한산성의 길이는 약 8km로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성체와 여장 등 허물어진 곳이 많았으나 20여 년간에 걸쳐 모두 복원했다. 또한 대서문, 중성문, 대남문, 대성문의 문루를 비롯해 장대 등도 대부분 복원했다. 북한산성은 1968년 12월 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길을 잡아 약 20여 분 산길을 걸어 오르면 오른쪽 산기슭에 대서문이 우뚝 서 있고, 대서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20여 분을 걸어 오르면 계곡 옆 비탈길에 중성문이 나타난다. 중성문 옆에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성곽 밑에 수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북한천계곡은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고개를 들면 우뚝우뚝 솟아 있는 북한산의 연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리고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우짖는 소리가 가득하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성곽과 성문, 누각, 사찰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석장승.
무량사.
백운암문 있는곳(안부)
원효봉.
무량사.
무량사 인증샷.
북한동 역사박물관 앞.
보리사.
계곡의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며 만든 작품.
대동사 앞.
여자나이 80에 북한산 백운대 오른다는것 쉬운일 아니죠.
계속 오르막이라 주변을 살펴보면서 쉬엄쉬엄 운행한다.
공단에서 등산로 정비를 하는 중이다.
구파발과 지축쪽.
여기저기 당겨 보면서 오르다보니..,
백운봉암문이다.
본격적인 백운대 등정.
인수봉.
인수봉을 배경으로 찰깍.
만경대.
오리바위와 만경대.
서울시내 전경.
정상사진 찍으려는 대기자들.
우린 조금 쉬었다 올라갔다.
80된 할머니 백운대 등정 성공.
우리부부도 한컷했습니다.
도봉산 오봉.
도봉산.
인수봉.
양주 앵무봉.
수락산.
불암산.
이럴땐 정상이 조용하네!
무슨새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우리도 요기 좀 합니다.
하산 중.
하산이 더 위험합니다.
늦은 시간인데도 계속 올라옵니다.
어쩌다 이렇게 다리가 길어졌지요?
보리사.
오늘은 물이 많네요.
계곡 철계단.
서암사.
원효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