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8년 8월 5일 주일오후설교
제 51주일(2)
본문 : 수7:16-26; 요일1:1-10
제목 :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31편 1,2,3
성경봉독 후 찬송 - 시92편 6,7
설교 후 찬송 - 시52편 2,3,5,6
폐회찬송 - 시108편 1,2,4
제 51주일
126문 :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
구원파 교리의 핵심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회개를 가르치는 기존의 기독교들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이런 이유로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두고 “죄인”이라고 하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같은 이유로 구원 받은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율법적 행위, 예를 들면 주일을 성수한다든가 십일조를 한다든가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일련의 가르침들은 모두 성경의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이단 교주들은 보통 성경의 어떤 한 가지 부분에 대해 깨달음을 얻으면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배치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밀어붙이면서 다른 성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구원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셨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지셨다”라는 사실 하나를 깨달으니까, 성경의 다른 부분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매일의 회개”는 전혀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일서는 구약성경이 아닙니다. 주님 오신 후의 가르침이니까 구약성경처럼 그림자라거나 주님 안에서 성취되었으니까 효력이 없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8-9)
요한일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말하면서도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 하였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불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증거합니다. 신자도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신자에게도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구원파가 오류를 범한 부분은 “한 번 하는 영원한 회개”, 즉 사람이 불신자로 살다가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영접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바로 그 회개를, 신자의 삶에 매일 매일 반복해야만 하는 회개와 혼동한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를 그들의 과거의 삶과 연결지어서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젊어서부터 수도사로 살았고, 매우 도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 죄는 “충분히 제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어서 방탕한 삶을 충분히 누려 보았고, 또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빠져 나올 수 없는 것도 경험해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회심, “톨레 레게”라는 “집어들어 읽어라”는 말씀을 들었던 그 사건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도하고 있었던 내용은 “주여 어느때까지입니까!”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죄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여기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며, 이 영향력은 그리스도를 믿고서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가 된 후에라도 이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펠라기우스처럼 죄를 “충분히 제어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짓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하게 죄악과의 투쟁을 경험해 본 루터 선생님은 대교리 문답에서 다섯 번째 간구를 해설하면서 제일 처음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죄인이므로 매 순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 대교리 문답의 이 부분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빈궁한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 또 믿으며, 그분의 뜻을 붙잡고 행하며, 하나님의 선물과 은총 아래 살고 있을지라도, 죄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매번 비틀거리고 흔들리며 삽니다. 이는 세상 안에서 사람과 부대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참지 못해 화를 내고 앙갚음하며 삽니다.
게다가 사탄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뒤에서 계속 꼬드깁니다. 이제까지 들었던 모든 간구는 다 부질없는 짓이고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이런 전쟁터 속에서 똑바로 서 있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때 필요한 것이 ‘사랑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 사함에 관한 간구인 다섯 번째 간구를 살피면서, “이 간구의 필요성”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특히 교리문답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 문구에 주의하십시오.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 이 문구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의 죄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교묘하고 끈질기며, 우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둘째,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계속해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교묘하고 끈질기며, 우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죄의 끈질김”, “죄의 교묘함”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좋은 예로 여호수아에 나오는 아간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건의 개요
여호수아 7장에서 우리가 오늘 읽지 않은 앞부분을 보시면 대략적인 사건의 개요와 함께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사건의 정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작은 성인 아이성을 치러 갔다가 패하게 되자,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다가 자기들 중에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물건을 취하는 행동은 “단순 절도” 이상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무너뜨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경계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 성의 물건을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지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지정하셨다는 것의 의미는, 이 성의 물건을 훔친다는 것은 이제 “절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문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6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바칠(진멸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유명한 “헤렘” 말씀입니다. “진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려고 구별하신 것이기 때문에 여기 토를 달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진멸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내 맘대로 반대할 수가 없듯이, 진멸의 권리는 여호와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자기 맘대로 행한다면 방금 읽은 말씀에 나와 있듯이 “자기가 바침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진 사건을 보고 “그거 물건 조금 훔쳤다고 전쟁에서 지게 하다니 하나님은 참 쪼잔한 분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물건을 훔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와 권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들에 대해 반항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아간은 멸망 받아 마땅한 짓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아간의 태도
그런데 이렇게 일이 진행되어 가고 있을 때의 상황을 한 번 보십시오.
7장의 첫 부분에 아이성에서의 패퇴가 나오기 때문에, 7장 5절 이하부터는 이제 이스라엘이 “왜 졌을까!” 하면서 여호와께 탄식하고 아뢰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무도 그들이 왜 아이성에서 패배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금 여리고성에서 큰 승리를 줘 놓고 왜 작은 아이성에서 크게 패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아이성 실패의 이유를 딱 한 사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아간입니다. 아간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패했는지, 왜 이길 수 없었는지.......바로 자신의 행동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아간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딱 금하시면서 행하면 망한다고 한 바로 그 행동을 자신이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에이 설마”는 있을 수 있었겠지요. 아마 훔칠 때 “설마 이 정도 훔친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했으니까 훔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전쟁에서의 패배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아간에게 있어서는 이 사실은 명백합니다.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낭패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유를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십니다. 쭉 내용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바친 물건을 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십니다. 자, 잠깐 “설마” 하는 마음으로 훔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기의 그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나타났을 때에도 아간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짝이 더 나아갔습니다. 이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원인이 되는 행동인 온 회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아간 마음속에서만 설마가 확신이 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알려주심으로 인해, 모든 회중이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아간은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6절로 들어갑니다.
제비뽑기가 시작됩니다. 16절은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지파별 대표를 나오게 해서 어느 지파에서 이 범죄를 행한 사람이 있는지를 찾는 제비뽑기를 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지파 선정에서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아간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자신이 속한 지파가 그 범죄의 당사자로 뽑힙니다.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아간은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17절은 이제 유다 지파들 중에서 “족속”들 중에 제비뽑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부족들이 모인 국가였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부족이 “지파”였다고 한다면, 그 지파들 안에 “큰 개체로서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17절에 봅면 “세라 족속”이 뽑혔다고 합니다. 이 때의 족속은 오늘날 우리의 일가친척이 모인 가족들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큰 규모의 가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로 치자면 “유다 지파”가 “김씨”라고 한다면, “세라 족속”은 “김해 김씨”냐, “경주 김씨”냐 라는 식의 큰 덩어리로서의 가족입니다. 이 때에 세라 족속이 뽑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아간은 세라 족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간은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17절의 후반부를 보면, 이제 그 “족속” 그 아래의 가족 단위로서 “가족”이 나옵니다. 이 때의 가족은 히브리어로 “집”입니다. 즉 우리말로 “집안” 정도 되겠습니다. 큰 가족 공동체 안에서 “한 집안”입니다. 이제 이 정도면 제법, 우리로 치자면 큰집, 작은집, 다 모아놓은 규모의 일가친척 집단 정도 될 것입니다. 이 때 뽑힌 것은 “삽디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아간은 삽디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간은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18절을 보시면, 이제 이 삽디의 가족 정도로 규모가 줄어들면, 그 안에서 가족을 뽑는 일은 매우 소규모입니다. 아버지 형제가 7-8명이 된다 해도, 가장들이 나와서 제비를 뽑으면 7-8명 중에 한 가족은 뽑히는 것입니다. 18절은 “삽디의 가족 중 남자들이 제비를 뽑았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뽑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모든 지파를 모아서, 점점 더 작은 규모로 제비를 뽑아 가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가 뽑히고, 세라 족속이 뽑히고, 삽디 가족이 뽑히고, 결국 갈미의 아들 아간이 뽑힙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여러분, 머릿속으로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심장을 졸이는 상황이며,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장면입니까?
그런데 아간은 끝까지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제비를 딱 뽑아서 걸리고 나서야 실토를 합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죄에 대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죄의 본성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죄의 무시무시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 한 번 질문해 봅시다. 아간은 왜 끝까지 나오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이 들으신 대로, 이 과정은 짧지 않습니다. 아간은 하려고만 했다면 수십 번은 나가서 자신의 죄를 실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안 걸릴 수도 있을 거야”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아간이 자신의 죄를 실토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 뿐입니다. 만약 아간이 절대적으로 자신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었다면, 죄를 경감시키기 위해서라도 먼저 고백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혹여 안 걸릴 수도 있는데, 괜히 자기 입으로 자기 발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바보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간은 단지 소심한 사람이었나요? 아간은 문제를 결정할 때 머뭇머뭇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죄를 고백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간은 우리가 긍휼히 여겨 줄 수 있을 만한 그런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오, 저는 아간이 대단히 배짱이 두둑한, 굉장한 담대함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만약 아간이 정말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포위망이 좁혀 오면 올수록 그 전에 실토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끝까지 우기다 보면, 행여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으로 실토하면 확률은 100프로이고, 끝까지 말 안하고 있으면 걸리지 않을 확률이 1프로라도 있으니까 후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소심하거나 머뭇거리는 성격이어서가 아닙니다. 아간의 마음에는 마지막까지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고백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아간의 이런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까?
네! 하나님이 아니 계실 것,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추궁하지 않을 것, 하나님이 눈이 어두워 자신의 죄를 못 볼 수도 있을 것, 심하게는 하나님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는 “도둑질”입니까? 아니오, 처음부터 도둑질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침탈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리고 제비뽑기가 시작되었을 때의 그의 태도, 그의 범죄의 내용은 “우물쭈물”이나 “망설임”입니까? 아닙니다. 담대하고도 강력한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어떻습니까? 우리는 죄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설교의 서두에서 “신자도 죄를 짓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자도 죄를 짓는다”라는 사실에는 많은 사실들이 얽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죄를 짓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고, 여러 가지입니다. 아간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시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추궁하실 때, “나는 피해가겠거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하나님은 죄를 어떻게 추궁하십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구약시대처럼 불을 내리셔서 사람에게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죄를 징벌하는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죄악의 추궁의 가장 강력한 형태가 “설교”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설교를 통해서 “나의 죄를” 지적받습니다. 성령님께서 내 영혼과 심장을 강타합니다. 그럴 때 어떤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피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에이 설마”, “저게 내 얘긴 아니겠지”, “혹여 내 얘기라 한들, 하나님이 내 죄를 아시지만 그걸 가지고 이렇게 징계를 하시겠어”
여러분! 이게 아간이 가졌던 자세입니다. 죄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제가 첫 번째 대지가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죄는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고백하고 쓰러질 만도 한데,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허상을 심어주면서 하나님에 대해 버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므로 죄가 분명히 까발려 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그 죄 가운데 안주하라고 합니다.
우리 속에는 정말 갖은 방법으로의 “하나님 회피”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늘 해오던 거니까”, “하나님이 이 정도는 봐 주실 거야”, “나만 그랬나?” 그러면서 자기를 여러 가지 성경 지식으로 포장을 합니다. “이 때 이런 죄를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죄를 자꾸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라구!”,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간과하고 있어” 어떤 때는 죄를 학문적으로 전락시킵니다. “죄라는 것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여러분은 이런 죄를 삶에서 만납니다! 경성하십시오!” 그러면서 자기는 뒷구멍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서 경성케 하시는 성령님을 만나면 잽싸게 뒤로 빠지면서 변명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성경은 악을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말씀했습니까? 죄는 그 모양과 형태, 방법에 있어서 너무나 다양하고 교묘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는 너무나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죄의 지배 아래로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여기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계속해서 인정하는 것이다”입니다.
함께 교리문답 60문답을 읽겠습니다.
(읽기)
교리문답 60문답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묘한 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두 대비되는 모습을 상반되게 보여줌으로써 서술되고 있습니다.
앞에는 “내가”가 있습니다. “내가”에 해당하는 내용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 다음 문단에는 “하나님께서는”이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
아멘!
60문답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내가”는 죄악의 교묘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로는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가 들어가야,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
다시 아간 본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 24절입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를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히브리어로 ‘아카르’입니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아카르)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 골짜기”, 본문을 읽으면서 말씀드렸지만 “아골”이라는 이 골짜기의 이름은 여호수아가 말한 “괴롭게 하였느냐”의 “아카르”에서 따온 것입니다. 즉 “괴로움의 골짜기, 불행의 골짜기”입니다. 죄는 이스라엘 전체를 괴롭게 했고, 이 골짜기는 그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호세아 2장 14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가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아멘!
호세아 말씀은 간음을 저지른 여인 고멜, 아니 신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리문답 60문답에서처럼 “내가”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나고, 악으로 향합니다. 아간은 아골 골짜기에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음녀 이스라엘에게 “내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겠노라”고 맹세하십니다. 고멜이 무언가를 잘 해서입니까? 우리가 용서를 받을 만한 무언가가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한 부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되게 하리라.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60문답),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60문답) 여겨 주시겠다! “하나님게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죄를 들여다보면 죄가 보여서는 안 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마지막에 제가 무엇을 말씀드렸습니까? “내 죄”, “내 죄”하니까 나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죄에서 나를 보면 절망과 암흑 뿐입니다. 죄를 바라볼 때, 즉시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그 때에만, “여전히 내 속에 있는 부패”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씻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