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학의 탐구 3-1 도학의 위치
3장 도학(道學)의 체계
먼저 유교사상 전통 속에서 조선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도학(道學)’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면서 유교사상의 고전적 원형이 정립되었으며, 이를 ‘선진유학(先秦儒學)’ 내지 ‘근본유학(根本儒學)’이라 일컫는다. 그 후 진(秦)나라 때 잠시 동안 혹독한 탄압을 받은 이후 한(漢)나라에 들어와 유교는 국가통치의 원리로서 국교(國敎)로 받아들여져 광범하게 확산되었고, 경전의 정비와 해석이 활발하여 이 시대의 유학을 ‘訓詁學’(훈고학)이라 한다.
한나라 후반기 이후 수(隋) · 당(唐) 시대에까지 노장(老莊)사상의 ‘현학(玄學)’과 도교(道敎)가 일어나고 불교의 여러 종파가 널리 전파하면서 유학은 침체하고 유교 지식인들이 문학에 젖어드는 기풍이 일어났는데, 이를 ‘사장학(詞章學)’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수 · 당 시대에서 유교는 일상적 도덕규범이나 국가경영의 제도로 기능하면서 형식화하는 데 머물고, 인간존재의 근원적 문제의식이나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불교와 도교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송(宋)나라 때에 오면 유교 지식인들이 불교와 도교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자극을 받으면서 유교이념에 대한 근본적 재인식을 통해 유교이념을 정통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송대 유학자들은 유교의 정통론에 따라 도교(노장사상)와 불교를 비판하면서 공자-맹자의 도통(道統)을 송대의 주렴계(周濂溪)와 정명도(程明道) · 정이천(程伊川)이 계승한다는 도통론(道統論)을 정립하였으며, 이러한 ‘도통’의식을 기초한 경학(經學) 체계와 그 철학적 기초로서 성리학(性理學)을 확립하였으며, 그 집대성을 하였던 인물이 주자(회암 晦菴 주희 朱熹)요, 이들의 학풍을 ‘도학’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1) 또한 주자의 동시대에 육상산(陸象山, 상산 象山 육구연 陸九淵)이 ‘심학(心學)’을 제기하여 주자의 도학과 논쟁을 벌이며 대립하였고,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 양명 陽明 왕수인 王守仁)은 ‘심학’의 학풍을 크게 일으켜 ‘도학’과 양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학풍 사이에는 철학적인 기초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고, 사회관이나 인간의 수양론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차이들이 나타난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두 학파 사이에는 엄청난 논쟁들이 일어났다. 여기서 두 학풍의 철학적 기본개념을 보면, ‘도학’이 성품을 이치로 파악하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주장하는 데 비하여 ‘심학’은 마음을 이치로 파악하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내세우는 차이를 보여 주고 있지만 양쪽이 모두 심성에 근본하고 ‘이(理)’를 판단의 근본준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송대에서 명대에 걸쳐 활발하게 일어났던 ‘도학’과 ‘심학’을 묶어서 ‘이학(理學)’으로 일컫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도학의 근원은 고려 말엽인 1290년(고려 충렬왕 때) 무렵 안향(安珦)이 元나라에 가서 그 당시 원나라의 국가체제 이념이요 관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던 주자학의 학풍을 관찰하고, 주자의 저술을 베껴 오는 데서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때 안향이 주자의 학풍을 받아서 돌아왔을 때에도 주자의 학풍이 가지고 있는 기본문제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인간의 자기 계발의 방법이라는 사실과 주자의 학풍, 곧 도학에서는 도통의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의 학풍이 수입된 이후로 ‘도학’은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확립되어 조선시대 전반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유학의 다양한 학풍이 수용되었으므로 조선시대 유학의 양상을 분류하면 먼저 크게 ‘이학’과 ‘실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이학’은 쉽게 말하면 보다 형이상학적 이론을 기초로 하는 관념적 학풍이요, 실학은 현실문제의 해결에 적극적 관심을 지닌 실용적 학풍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학’을 다시 크게 두 학풍으로 분류하면 곧 ‘도학’(주자학)과 ‘심학’(양명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학’은 ‘심학’과 더불어 ‘이학’의 범위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도학’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여러 다른 명칭으로 불려 왔다. 이 ‘도학’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매우 심하게 뒤섞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먼저 그 명칭들이 어떻게 쓰여 왔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도학’은 ‘송학(宋學)’이나 ‘송명학(宋明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비록 청대까지 지속되었지만 송대에 발생하여 명대까지 주로 발전했던 학풍이다. 그래서 ‘송학’이나 ‘송명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도학이 발생하고 발전했던 시대, 곧 중국의 왕조를 기준으로 부여한 명칭이다.
또한 ‘도학’을 주도했던 특정한 인물을 대표시켜서 일컫는 명칭이 있다. 곧 ‘도학’은 북송시대의 정씨(程氏) 형제[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와 남송시대의 주자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학풍이라는 사실에서 ‘정주학’이라고도 하고, 특히 그 가운데서 주자가 ‘도학’의 체계를 집대성했다는 의미에서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또 하나는 ‘성리학’이라는 명칭이다. ‘도학’에는 매우 정교한 철학적 이론의 기초가 튼튼하게 확립되고 체계화되어 있는데, 바로 이러한 도학의 철학적인 체계를 학풍의 대표적 특성으로 파악하여 ‘도학’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리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들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특히 한국 유학으로서의 ‘도학’을 말할 때는 한국 유학 자체가 중국 유학에 예속된 하나의 변방적인 학풍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자신의 독자적 학풍을 형성하고 학문적으로 심화시켜 왔다는 학문의 주체적 입장에서 본다면, ‘송학’이나 ‘송명학’과 같은 중국의 왕조 명칭에 따르는 학풍의 명칭은 적합하지 않다.
또한 물론 ‘도학’의 형성에서 정자와 주자가 압도적으로 큰 역할과 비중을 갖고 교조적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자 · 주자의 · 학풍이 조선시대의 유학 속에서 발전되어 왔을 때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정자 ·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준수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새로운 문제가 논의되었고, 새로운 이론과 쟁점이 제기되었으며, 또한 더욱 정교하게 분석되기도 하고 심화되기도 하며, 때로는 비판적으로 검토되기도 하였다. 이런 면에서 정자 · 주자라는 인물의 명칭을 들어서 ‘도학’ 학풍의 명칭을 삼는 것은 조선조 유학의 독자성을 살려 내기 위한 일반적 명칭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다.
나아가 ‘성리학’의 명칭은 도학의 범위 속에서 철학적 관심으로 정리되고 체계화된 학문영역이라는 점에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철학적 체계는 ‘도학’이 포함하는 폭넓은 관심영역을 대표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도학’ 속에는 철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 · 의례적인 문제 · 경전 해석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따라서 ‘성리학’이 도학 속에 큰 비중을 갖고 있는 중요한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도학’이 포괄하는 넓은 범위 전체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밖에도 ‘도학’을 일컫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서는 범위를 너무 넓게 쓰는 혼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때로는 ‘도학’을 가리켜 ‘이학’이라고도 쓰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물론 ‘도학’은 ‘이학’의 범위 속에 소속된 것이지만 ‘이학’ 속에는 ‘심학’도 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도학’의 명칭을 흔히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는 말로도 쓰는데, ‘신유학’은 ‘이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송대 이후에 새롭게 발생한 유학인 ‘도학’과 ‘심학’을 합쳐서 일컫는 명칭이다.
또 하나의 주의해야 할 혼동스러운 명칭의 사용 경우가 있다. ‘도학’에 심성의 수양문제에 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를 ‘심학’이라 일컫는다. 여기서 ‘도학’에서 추구하는 심성수양론의 ‘심학’과 육상산 · 왕양명의 심즉리설에 기초한 심본체론(心本體論)의 ‘심학’은 같은 명칭이지만 가리키는 내용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문맥에서 주의하여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실학’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학풍이다. ‘도학’이라는 명칭은 송나라 때의 정자 · 주자의 학풍이 정립되면서 생기게 되었다. 주자가 『중용』을 주석하고 내용을 분석하여 『중용장구』를 지었는데, 그 『중용장구』의 서문에서 『중용』이 지어진 배경을 설명하면서,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이 그 전승을 잃을까 염려해서 지었다.”(자사자우도학지실기전이작야,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도학’이라는 명칭이 쓰여졌던 가장 유명한 선례이다.
각주
1 중국의 정사(正史)로서 25사 가운데 하나인 『송사(宋史)』의 열전(列傳)에서는 송나라 때 유학자들의 간략한 전기를 소개하면서, 「도학전(道學傳)」(권427-430)과 「유림전(儒林傳)」(권431-438)이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도학’이 독특한 학풍의 명칭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도학전」 속에는 우리가 흔히 ‘송조 6현(宋朝 6賢)’이라 일컫는 주돈이(周敦頤) · 정호(程顥) · 정이(程頤) · 장재(張載) · 소옹(邵雍) · 주희(朱熹)과 정자(程子) · 주자(朱子)의 문인들을 포함하여 24명을 수록하고 있다. 곧 4권으로 된 「도학전」의 첫째 권에는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의 5명을 수록하고, 둘째 권에는 정호 · 정이의 제자들을 열거하고, 셋째 권에는 주희와 장구(張龜)을 수록하고, 넷째 권에는 주희의 제자들을 열거하였다.
[출처] 한국유학의 탐구 3-1 도학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