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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 2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3.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 (1)
마 9: 2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여기에 ‘구원’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즉 병의 치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셨고,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치를 보인다(행 16: 31).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1]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막 5: 30-33 –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2] 딸아
중풍 병자를 보고 '작은 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3] 안심하라(*, 다르세이)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
* 행 23: 11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 병자에게도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그 여인이 완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다.
5] 여자가 그 즉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가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는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
* 막 5: 27-29 –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부언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 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6] 예수님의 응답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따라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게 된다. 공공기관에 가서 우리의 신분을 보증할 수 있는 서류를 요청하기도 하며, 병원에 가서 우리의 아픈 몸을 진찰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나 자식, 또는 형제에게도 많은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요청에 대한 이웃의 응답은 절박한 상활에 만족할 만큼 충분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그리고 비록 친절하거나 만족할 경우가 있어도 결코 그러한 응답이 언제나 계속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요청에 대하여 언제나 부드러우며 만족할만한 응답을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다름 아닌 예수이시다.
(1) 돌이켜 보셨다.
①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발걸음을 멈추셨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의 능력을 힘입기를 원하여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던 때는 예수님께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시거나 쉬고 계시던 때가 아니었다. 그때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기 위해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인을 위해 발길을 멈추셨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도우심이요 사랑이다. 그는 결코 우리의 도움을 물리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고 바쁘다 할지라도 그는 개인의 영혼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며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으신다.
② 믿음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보기를 원하셨다.
발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자가 누구인지 보셨다. 물론 예수님은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아셨으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나치지 않고 급한 발걸음을 멈춰 돌아보신 것은 문제 해결을 요청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그의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살피고 계신다.
(2) 위로하여 주셨다.
① 율법의 공포로부터 평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모세의 율법은 유출병 환자가 부정한 자로서 다른 사람이 그를 만질 수조차 없었다. (레 15: 25-27) 그러므로 이 여인은 이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큰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사랑의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부드럽고 평온한 음성으로 그녀를 위로하셨다.
② 그녀의 진실(眞實)한 믿음을 기뻐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진지한 눈빛과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믿음을 보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큰 기쁨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드럽고 상기된 음성으로 '딸아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진지한 자세와 순수한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다.
③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암시하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사회적 종교적인 율례는 모두 모세의 율법에서 왔다. 그러나 이 율법은 인간을 고소할 뿐 인간의 마음을 편케 하거나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능력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
* 마 5: 17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본문에서 율법의 정죄로 인해 두려워하는 여인을 위로하고 평안함을 허락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자신을 강력히 암시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3) 구원을 허락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도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갖는 것 외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② 진실한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함으로써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르게 됨을 역설했다. 본문에서도 이 여인의 믿음은 순수한 행동을 통하여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입으로만 떠드는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나 참된 믿음은 말보다는 실천으로 나타나며, 큰 것보다는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 9: 23.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 -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
1]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를 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 대하 35: 25 -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 계 18: 22 -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이다.
'미쉬나'(Mishna)에는 미천한 자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
* 렘 48: 36 -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나니 이는 그가 모은 재물이 없어졌음이라.
2]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떠드는'(*, 도뤼부메논)이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들도 피리 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을 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 행 17: 5 –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3] 죽음과 장례(葬禮)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存在)다. 이와 같은 인간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노력이 있었고 의학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죄와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사람은 없었다.
인간의 생명과 죽음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1) 죄(罪)와 벌(罰)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노여워하신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반드시 징벌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도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다.
자식의 죄를 보고도 징계하지 않는 부모는 참 부모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사랑의 관계와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는 법칙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법칙이 무너지면 이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당장에 파멸이 온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과 같이, 죄를 심으면 형벌을 거두게 되어 있다.
이 법칙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죄를 많이 범하면 자신에게든지 3, 4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의 해독이 내려가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받게 된다(제2계명).
죄에 대한 형벌은 다양하다. 첫째는 양심의 가책이고, 둘째는 부모나 스승이나 이웃이나 공동체와 국가권력에 의해서 벌을 받는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기도 하나 인간의 형벌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죄에 대한 최고의 형벌은 사망이다.
* 롬 6: 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 죽음에 대해서
죽음은 모든 생명체의 소멸성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동식물과 같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이것은 하나님 창조의 질서 가운데 있는 것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자연의 법칙으로만 돌릴 수 없는 까닭이 있다.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동식물은 죽음을 모르기에 고통도, 죽음의 의미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임종하는 순간까지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① 인간의 죽음은 창조 질서에 포함된 것이다.
인간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정해져 있는 죽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과욕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창조의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땅 위에서 과욕을 부리다가 [개죽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되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어떤 이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고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해 순국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애를 무의미하게 버리지 않고 뜻있게 살고 뜻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自殺)만은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 죄악이다. 자신의 생명이든 타인의 생명이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②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고 관계를 끊어 놓았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죄의 삯이요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리스도는 끊어진 신인(神人)관계를 회복하신 중보자이시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면하게 된다.
* 요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