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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노전투와 다케다 기마군단 VS 오다가의 3단철포술의 실체는?
일본 전국시대물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도 한번쯤은 들어 보셧을 법한 바로 그것
나가시노전투에서의 다케다군 기마군단과 오다군의 3단철포대의 격돌..
화약무기 앞에서 기병의 몰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회자 되고는 하는데요
이 이야기들은 "대망"같은 전국시대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심심찮게 나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 각색 된 거라는 것은 아시는지?
즉 "거짓"이라는 말씀..
일본사에도 나오고 대하드라마에도 나오던데...라고 하실 수도 있죠..
그들도 다 낚인겁니다.
먼저 다케다 기마군단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다케다 가의 영지이던 가이 지방 자체가 말이 많은 지방도 아닐뿐더러
「우리들이 말위에서 싸우는데 비해 일본인은 싸워야될때는 말에서 내린다. 일본의 말은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있다.」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覚書"
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일본말의 품질은 별로였습니다..
물론 수입한 말은 괜찮았지만 비싸다 보니 소수에 불과했구요.
정작 전국시대 기마대를 운용한 곳은 다테 가의 기마총병 뿐이었습니다.
그건 다테 가의 영지던 도호쿠 지방이 말의 산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전국시대 말에야 등장하고 돌파력을 가진 기병은 아니었지만요..
앞에서 말했듯 말은 비쌌습니다..그래서 대규모 기마군단을 조직 한다는건 절대 무리였고
가마쿠라 시대엔 그나마 수십~수백기정도의 기병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걸로 맥이 끊겼습니다
"말을 타는 건 대장을 포함한 6~7명(1000명중), 나머지는 말에서 내려서 공격한다.
전투시 말을 줄지어 돌진한다는 건 무도를 모르는 자들의 소치이다."
고사카 간세이(다케다가의 가신) "甲陽軍鑑"
갑양군감은 위서다! 그러므로 위의 기록도 구라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렇지도 않은게 선조실록에도 바로 위와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선조 93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0월 20일(정축) 4번째기사
...중략...
칼을 쓰는 것은 그들의 장기이지만 말을 타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린 후에야 싸움을 한다
...중략...
특히 실록의 기록은 왜군에 포로로 잡혀 왜국까지 잡혀갔다 온사람의 증언이니 믿을만 하다 하겠습니다
위에서 보듯 보병대 기병 비율은 아마 당시 세계의 추세에 비하면 안습일 정도 였습니다
(1000명에 6~7명이 사실이라면..조선의 경우 1:3 에서 1:6정도의 기보비율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주력은 보병 그것도 장창병이었고 모루고 망치고 대부분 장창병이 차지했습니다
물론 대기병 장창진이 아닌 대열을 맞춰 장창으로 찌르는게 아니라 내리치는 공격을 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 공격법은 기병이 아닌 중보병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이러한 일본의 실정에서 대규모 기마군단 운운은 말그대로 뭘 모르는 소리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오다군의 철포대와 3단철포술을 살펴보자면
그 기록의 시초는 일기체로 써진 大田牛一의「信長公記」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사가 아니라 꽤나 야사틱한 물건이란 것이 문제입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삼아 소설이 쓰여졌는데 그게 바로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역사소설「信長記」입니다..
게다가 소설의 특성상 꽤나 뻥튀기도 이루어졌는데.
애초에 信長公記에 나와있던 오다군 철포대의 수는 1000이었지만 信長記로 가면서 3000으로 뻥튀기됩니다..
그뿐아니라 당시 강담류(전쟁소설)에나 전해오던 3단철포가 가미되면서
지금의 오다군이 대량운용한 철포대에 의한 3단철포술의 전설이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메이지시대 전사편찬소가 바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전사를 집필했다는 아스트랄한 이야기인겁니다..
그래서 이게 정설인듯 굳어져버렸습니다.
왜냐면 정식 전사에 나오니 사람들이 무조건 믿어버린 것이지요
실제로 "갑양군기"등을 보면 나가시노 전투를 공성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승인은 허황된 3단철포술따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기병을 상대하는거라면 차라리 일제교차사격이 더 효율적이라 봅니다)
오다 도쿠가와군의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승인은 굳이 따지자면
전투를 대비해 야전축성을 통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상대에게 소모전을 강요하여 병력의 우세를 살렸으며
다케다가신단의 내분, 주장이던 다케다 가쓰요리의 리더쉽 부족 등이 바로 전투의 승패를 가른 이유이었습니다.
실제 다케다군도 철포 800정을 보유하여 오다가의 철포대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결코 오다군의 압도적인 철포대의 위력에 주력기병이 털려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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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일본은 기병대가 없었던 것이지 기병은 존재하였다. 단, 이것은 기병을 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 말을 타는 병사라고 볼 때 성립가능한 이야기이다.
즉, 일본의 기병은 말을 타기는 했지만, 말을 타고 싸우지는 못했다는 것.
실제 기병의 비율 또한 연구되어 있는데 약 7~9%정도를 차지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병이 아시가루를 지휘하는 장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대로 활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백명 중 열명이 기병이라는 얘기는 갑양군기라는 군기물 즉 소설책에나 나오는 헛소리고,
다케다 가문의 코사카 마사노부가 저술한 정식 사료인 갑양군감에는 부대 편제에서는 보통 1000명 중 7명이 말을 타고 있다고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경우에도 일본에는 말이 작고 볼품없어서 전쟁시에도 말에서 내려서 싸운다고 하고 있고.
선조 실록에도 왜군들이 말에서 내려서 싸운다고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병은 제한적으로 운영이 된 게 아니라 운용자체가 될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에서 최초로 기병을 편제한 아키야마 요시후루 같은 경우에도, 서양에서 온 장교가 기병을 운용해야한다고 하자 "기병? 기승사를 말하는것인가요?" 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메이지 유신까지도 기병 자체의 개념이 없었단 얘기. 기마무사의 허구성은 심한 과장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며 오히려 군기물을 맹신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측이 문제다.
2ch노부나가의 3단 총 사격, 다케다 기마대의 실체 "일본의 사무라이가 탔던 말은 사실은 조랑말 정도의 크기였다."
역사학자 “일본의 사무라이가 탔던 말은 사실은 조랑말 정도의 크기였다.”
수백미터 밖에는 전력으로 달릴수 없었다.
노부나가의 3단 총 사격도 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