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지원해 입대했다.
만기 전역하고 복학해 보니 후배들이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 있었다.
'학과'의 후배들도 그랬고, '동아리'나 '운동클럽'의 경우에도 그랬다.
캠퍼스 자체가 '학과'나 '동아리'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3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수많은 후배들을 보면서 나는 극명하게 느꼈다.
우리 '학과'는 본디 여학생들이 아예 없거나 매년 한 명 아니면 두 명 정도가 들어오곤 했었다.
그야말로 가물에 콩나듯 했다.
그러나 '동아리'는 현저하게 달랐다.
6할 정도가 여학생이었다.
아무래도 '봉사'를 위한 조직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복학 후에 이따금씩 동아리 룸에 들렀었다.
가보면 생판 모르는 후배들이 꾸벅꾸벅 인사를 해댔다.
마침 동아리 룸이 '검도부' 훈련장과 같은 층에 있었기에 훈련 후에 간혹 방문하는 정도였다.
'검도부' 전용 도장에서 강도 높게 훈련을 하고 나면 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목재 바닥이 젖을 정도였다.
'호구'와 '도복'을 벗은 뒤에는 반드시 샤워를 해야만 했다.
땀으로 목욕할 정도였으니까.
샤워 후 환복한 다음 어쩌다 한번씩 동아리 방에 가면 십중팔구는 모르는 후배들이 먼저 인사를 했다.
"선배님, 저는 바인 몇 기 홍길동입니다"
"저는 몇 기 박길동입니다"
이런 식이었다.
보통 3-5년 나이 차이가 나는 앳된 후배들이었다.
귀엽고 착했다.
처음엔 조금 서먹하기도 했으나 몇 달이 지난 후엔 완전히 달라졌다.
만나기만 하면 후배들이 "밥 사달라, 커피 사달라, 술 사달라"고 졸랐다.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예뻤다.
나는 전역 후 2학년에 복학하여 졸업 때까지 꼬박 3년 간 매일 저녁 면목동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내가 담당했던 과목은 국어, 사회, 지리였다.
그랬으므로 주중엔 술을 마실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대신 낮엔 후배들에게 밥과 커피를 자주 사주는 편이었다.
'야학'이 끝난 뒤엔 중랑구 '면목동'에서 송파구 '가락동'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 타고 달려갔다.
'농수산물 도매시장'으로 가서 다음 날 새벽 4시 반까지 '밤샘알바'를 했었다.
일을 마치면 리어카를 반납하고 첫버스를 타고 왔다.
학교 정문 앞 자취방에 도착하면 마루타처럼 그대로 쓰러졌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면시간은 늘 짧았다.
쪽잠을 잔 다음 오전엔 수업, 오후엔 검도부와 수영부의 훈련부장 역할, 밤에는 야학 선생님, 그 이후엔 '철야알바'의 패턴을 대학 졸업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갔다.
돈이 필요했다.
내가 쓸 돈이 아니었다.
불우하고 형편이 어려운 '야학 학생들' 때문이었다.
그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누다 보면 눈물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의 형편에 비하면 나는 배부른 '부르조아'일 터였다.
누가 나를 그렇게 평가했던 건 아니었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해병대에서 복무할 당시, 나는 특수부대에서 엄청난 땀과 고통 그리고 눈물을 쏟으며 부대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수도 없이 다짐했었다.
전역 후엔 헌혈과 봉사, 나눔과 헌신에 진력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 골수에 새겼던 나만의 '서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캠퍼스에 복귀하여 그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게다가 2학년 두 학기, 3학년 두 학기, 4학년 두 학기, 총 6학기 동안 '과대표'를 맡아 동분서주했다.
시간을 쪼개가며 아내와 연애도 했는데 정작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언제나 그 점이 미안했다.
아무튼 나의 '캠퍼스 라이프'는 그랬다.
그래서 였겠지만, 좀처럼 쉴 시간이 없었다.
'철야알바'를 하면서 코피도 숱하게 쏟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힘들었고 때때로 곤고했지만 절대로 불평하진 않았다.
보람도 매우 컸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끼는 '기쁨과 감사'가 그 당시 내겐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그런 '보람과 감사'가 늘 과로에 지쳤던 나를 다시 힘차게 이끌어 주었던, 고맙고도 강력한 에너지였다.
아무튼 복학 후 3년 간 '학과', '운동클럽' 뿐만 아니라 '봉사 동아리' 후배들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방학 때마다 동아리에서 장기간 '농활'을 떠났는데 나도 진심으로 임했었다.
1980년대 중,후반은 그런 시대였다.
도시나 농촌, 어촌, 산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미더운 땀을 많이 쏟곤 했었다.
그땐 남자 후배들이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했지만 여자 후배들도 '형'이라고 불렀다.
당시엔 대개 그랬다.
분명 어법엔 맞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호칭하던 시대였고 형이라고 부르는 앳된 후배들이 일견 귀엽고 살가운 면도 있었다.
대학생활 3년 간 정말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캠퍼스를 떠나 취직하고, 결혼해 자식 낳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어느새 나도 '중년'을 지나 '장년'에 접어 들었다.
아직도 나를 '형'으로 부르는 한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달포 전 쯤에 '광화문'에서 그녀를 만났다.
"꼭 만나고 싶고,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동아리 행사나 산행 등 단체활동이 아니고 외부에서 그 후배를 따로 만난 건 아마도 처음이지 싶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얼마 만의 만남인지 나도 가늠키 힘들었다.
무지 반가웠다.
후배도 흰머리카락이 적지 않았다.
3년 전에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듯했다.
꼭 남편과의 사별이 아니더라도 오십대 후반이니 당연하다 싶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의 안부를 교환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후배는 아들만 둘을 두고 있었다.
이미 장성하여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둘 다 따로 살고 있었다.
큰 아이는 스물아홉, 작은 아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열심히 뛸 나이였다.
젊음 그 자체가 축복이요, 가장 강력한 무기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가능한 한 후배의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Y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 지를 알 수 있었다.
남편과 단란하게 살 때에도 후배는 직장에 다닌 적이 없었다.
육아, 가정주부로서의 역할, 교회와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안락하게 살았던 후배였다.
남편은 중견기업의 임원이었는데 매년 실시하는 건강검진에서 폐암이 발견되었고, 수술을 했으나 되레 급격히 악회되어 암 발견 일 년여 만에 허망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부고를 받고 나도 퇴근 후에 장례식장에 갔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조문객들로 인해 후배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계제가 아니었다.
부의금을 전하고 짧은 위로의 말을 남긴 채 돌아왔었다.
그리고 무심한 시간이 바람처럼 흘렀던 터였다.
Y의 얘기는 이랬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이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점점 더 '종교'에 몰입하게 되었고, 이미 청년이 된 두 아들에게 예전 보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고 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여유가 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식들이 자신을 멀리했고, 심지어는 피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엔 심한 언쟁까지 했다"고 고백했다.
자기에겐 자식들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삶의 소명인데 어째서 애들이 엄마를 피하는 지 모르겠단다.
"자신이 언제 이 땅을 떠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30년 이상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하다면서, 갑자기 형이 생각 나서 전화했노라"고 했다.
"그래, 전화 잘 했다. 잘 했어. 우리들 나이가 5말6초인데 서로 가는 길은 달라도, 가끔씩 안부를 확인하고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
"머릿속이 복잡할 때, 어째서 갑자기 형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두서 없이 전화했어요. 형도 두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이고 무엇보다도 부모자식 간에 '소통'과 '공감'을 잘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불연듯 형이 생각났나봐요"
나는 전문 '카운셀러'가 아니었다.
그 방면의 학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인간관계론'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나도, Y도 같이 늙어 가는 나이에 그 후배에게 조언할 상황도 아니었고.
다만,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건넸다.
내 평소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내 삶을 지금까지 견인해 주었던 나만의 '개똥철학'이었다.
"애들 나이가 스무살이 넘었다면 이젠 자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본다. 인생이라는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가는 또 다른 '인격체'이자 가끔씩 만나서 소통하며 그들에게 조건 없이 박수를 보내주는 '동행자'일 뿐이지.
계네들 등 뒤에서 조용히 기도를 해줄 뿐, 더 이상의 어떤 충고도, 역할도, 안내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맞는 지, 틀리는 지 나도 몰라. 하지만 일생 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고 그렇게 실천했던 건 사실이야"
"그랬더니 오히려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더 돈독해 지고 끈끈해 지더라고. 나도 옛날엔 주변의 절친한 친구들로부터 "너는 자식을 계부처럼 키운다"는 소릴 가끔씩 듣곤했었지. 지금은 그런 말을 했던 친구들이 오히려 나를 칭찬하지만 말야.
신뢰하는 만큼, 믿고 기다려 주는 만큼 자식들도 자신의 앞길을 잘 헤쳐나간다고 믿고 있다.
비록 뒤뚱거리다가 넘어져 이따금씩 코가 깨질 때도 있지만 스스로 털고 일어나는 법도 배워야 하니까"
"남편과 사별 후에 20대 후반의 두 자식들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을 쏟았노라고 얘기했지만, 애들 입장에선 그 점이 바로 과도한 '간섭'이나 지나친 '참견', 또는 '집착'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테니까. Y가 애들을 각별하게 사랑하는 만큼 이제는 전폭적으로 믿고 맡기는 것이 제일 현명한 부모노릇이 아닐까 싶다. 시시때때로 청년들을 위해 먼 곳에서 기도해 주고, 박수를 보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리고 얘기가 나온 김에 또 한가지 말하자면, 이제는 후배가 당당하고 야무지게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동생의 관심분야를 지속적으로 배우고 익히길 바라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밝고 활기찬 삶을 엮어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엄마가 바로 서야만 자식들도 엄마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겠지.
사실은 자식을 믿고 기다려 주는 일보다 Y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열정적이며 행복한 인생을 엮어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지. 또한 후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인 동시에 최후의 '결심'이라고 믿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었고 해서도 안되는 국면이었다.
각자의 인생길엔 각자의 '풍경화'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Y가 나에게 전화를 해주었고, 만나자고 했던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각자의 삶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패스워드'가 있기 마련이니까.
"자식에게로 향했던 과도한 '집착'과 '관심' 보다는 자신의 인생 후반전을 향한 야무진 '도전'과 '열정'으로 밝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진심이었다.
그러면서 "긍정적이며 활기찬 에너지가 Y의 자식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넘쳐 흘러 후배로 인해 모두가 '해피 바이러스'에 젖어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한 Y가 즐겁고 감사한 삶을 엮어가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발자국엔 자신만의 특별하고 유니크한 '소설책'이 한 권씩 들어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만남 후에 Y도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다.
후배와 헤어져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었다.
그 시간이 대략 오후 2시 경이었다.
5월 하순인데도 밖은 뜨거웠고 기온은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와우, 대단한데?"
올 여름엔 제발 폭우와 폭염의 피해가 없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걸으면서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했다.
드넓은 포도 위로 강렬하고 따가운 햇살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