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산두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선생 사당 봉양사.
유허비
학사대.
도원서원. 폐허로 버려져 있고.
최산두(1483-1536)를 출산하는데 하늘에 북두칠성이 떴다.
백운山과 북斗칠성의 정기를 이어라.
그래 이름은 산두가 되고.
본관 초계. 호 신재新齋.
1497년 <주자강목> 지고 백유동 석굴 속에 들어가 독서.
“아빠, <주자강목>이 머야?”
“B.C. 403년부터 959년까지의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사마광(1019-1086)의 <자치통감> 294권을 주자가 59권의 강목체로 정리한 책.”“오늘 만만치 않군. 편년체가 머야?”
“연월에 따라 역사를 정리하는 거.”
“자치통감은 머야?”
“중국의 역사를 거울로 삼으려고 우리 실정에 맞게 쉽게 정리한 책.”
“강목綱目은 머야?”
“큰 글씨로 줄거리를, 작은 글씨로 구체적인 사실을 써 나가는 거.”
1500년 3년 만에 깨달았다. 굴 밖을 나서면서.
태산압후천무북 泰山壓後天無北.
태산이 뒤를 덮어 하늘엔 북쪽이 안 보이고
그 다음에 머더라.
지나가는 동자 왈.
대해당전지실남 大海當前地失南
큰 바다가 눈앞에 있어 땅엔 남쪽이 없다.
머라. 공부 더 하세유.
1500년 5월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이웃마을 순천으로 유배를 오셨다.
“선생님 한 수만 가르쳐 주십시오.”“다시 들어가라. 속세에 관여하지 말고.”“아, 예.”
다시 동굴행.
1504년 7년 만에 굴을 나서면서 암반에 글을 새겼다.
학사대學士臺.
후학들은 여기 들어와 공부할 것. 죽임.
“아빠, 학사는 선비들이 공부하는 거고. 대臺는 머야?”
“경사면을 절토해 만든 공부방에 붙이는 거야.”
1504년 사마시 응시. 시험 문제는 이렇다. 강목을 논하라.
머야 이거. 거저먹는군. 강목부綱目賦 제출. 당연히 수석.
“아빠, 부賦가 머야?”
“마음에 느낀 것을 사실 그대로 읊은 거.”
같은 해 스승 한훤당 사형.
이 거지같은 세상. 낙향.
전남 승주군 송광면 천자암에 머물며 9년 동안 도학궁리道學窮理에 정진.
“아빠, 도학이 성리학이야?”
“응.”
“궁리는 머야?”
“사물의 이치를 밝히다.”
1513년 별시문과에 합격.
중종이 일인유경 보명유신一人有慶 寶命維新이라고 쓰인 옥홀을 내렸다.
“임금에게 선이 있으면 보명이 새로워져 사직이 영원하리라.”
“광영이옵니다.”
“아빠, 옥홀玉笏이 머야?”
“임금을 알현할 때 관복에 차는 부장품.”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길이 27.4cm, 너비 3.4cm의 이 옥홀은 최산두의 종가에 보존돼 있다.
1519년 기묘사화.
전남 동복현으로 유배.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
학교를 차렸다.
우리시대의 선비 하서 김인후가 선생을 찾았다. 술 한 통 매고.
“자네 올해 몇인가.”“18살 인디유.”
“지도자가 무능해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우찌해야 돼냐?”
“술 먹어야죠.”
“그 놈 참. 이 책 읽어라. 굴원의 초사다.”
“술 더 가져올까요.”
“당근.”
1533년 해배 될 때까지 14년 동안 수백 명의 후학 양성.
이게 고단한 선비의 길.
해남에서 유배 중인 윤구에게 편지를 띄웠다.
화순 적벽 같은 적막한 곳에서 살고 있자니 분통만 터진다.
세상이 다 흐린데 나만 깨끗하게 살면 무엇 하리.
그러다가 굴원처럼 자살이라도 할 것 아닌가.
“아빠, 근데 굴원이 누구야?”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이야.”
“자살했어?”
“응. 강으로 몸을 던졌어.”
“왜.”
“자기가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
“그래서 노무현대통령도!”
“응.”
“굴원선생이 여러 명 죽이는군. 난 굴원 싫어. 오래 살아야지.”
“머라.”
최산두선생이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약 7km에 걸쳐 발달한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을 찾았다. 어라, 여긴 꼭 중국의 적벽과 똑같군.
그래 이곳은 전라남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어 화순 적벽이 된다.
눈치 빠른 후학 송정순은 최산두선생이 시를 읊던 화순 적벽 언덕에 정자를 짓고 현판을 걸었다.
물염정勿染亭.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없이 살겠다.
“아빠, 현실에 살면서 물염이 가능할까.”
“불가.”
“그럼 어떻게 해야 돼.”“빨랑 나가야지.”“아빠, 나갔어.”“아직.”
“왜 못나갔어.”
“돈이 없어서. 나가면 춥걸랑.”
1536년 간다. 향년 54세.
1578년 광양현감 정숙남이 봉양사 건립. 선생을 모신다.
1668년 후학들이 유배지인 동복면에 도원서원 건립.
1688년 숙종이 사액현판 내리고.
[출처] 최산두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작성자 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