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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 30 모든 것을 아시고 - 요 16: 33 환난을 당하나
요 16: 30 모든 것을 아시고 -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
제자들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적어도 예수께서 사람들의 뜻에서 어떤 일을 하고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하신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한테서 오셨다는 것을 믿었다.
1]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모든 것을 온전히 아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이시다. 단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를 안다고 고백한다. 예수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신다.
* 요 2: 24-25 –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아시고(19절) 그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지극히 연약하여 그들이 고난을 극복할 만큼의 믿음은 되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본 절과 29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 마 26: 33 -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마 26: 41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그들은 스승 앞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해는 아직 불완전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32절의 말씀은 예수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 나름대로 진실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에게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다.
요 16: 31 너희가 믿느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성령이 강림하기 전의 믿음으로 완전하지 못한 믿음 상태였다.
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예수는 제자들의 믿는다는 고백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상고(詳考)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다는 고백(30절)과 예수를 떠나게 되는 배신(32절) 사이에 본 절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본 절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견해를 제시한다.
(1)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이해하여 '이제는 너희가 믿는 도다'로 재번역한다(Bernard, Godet, Meyer).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하는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McClymont)는 것으로 지금까지 무지했던 그들의 믿음이 이 정도라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수에게 기특하게 여겨졌다는 뜻이다.
(2) 예수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반어적(反語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Calvin).
즉 본 절은 '너희에게 믿음이 굳게 섰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 절을 이와 유사한 13: 38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3: 38에서 예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때 분명히 반어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무시했거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불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라는 권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요 16: 32 나를 혼자 둘 때 -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예수께서는 슥 13: 7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 슥 13: 7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제자들은 지금 신앙 고백을 했지만, 이 밤에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 마 26: 56 -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1) 너희가 흩어지고
'흩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르피스데테'(*)는 원래 '뿌려 버리다'를 뜻하는데 10: 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 떼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헤치느니라'로 번역함).
본 절에서 예수는슥 13: 7에 언급된 예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그 흩어짐은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예수의 예언대로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그 밤에 모두 예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길로 도망해 버렸다(마 26: 56).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다.
* 마 26: 33-34 –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다. 예수는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후 승리를 얻으셨고 이 승리를 통해 교회가 출발하였다.
무엇보다 그토록 연약했던 제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그 출발의 궁극적인 기원이 제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있지 않음을 증언한다.
2]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 16: 16-32)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시간이 촉박해져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어 그 실상을 말씀해 주심으로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을 주어야 했다.
예수님은 이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자신이 고난을 당하실 때 그들로 이 말씀을 기억하여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가르치심이 필요하셨다.
(1)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예수님은 이 같은 복안을 세우시고 그 서두를 이처럼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지신 이 말씀은 그 말의 뜻을 알려고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되어 이 의문을 토대로 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나타내셨다.
① 이 말씀은 예수의 고난의 죽으심을 의미한다.
제자 중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이 한 명도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겪으실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아니하셨다.
제자들이 대망하고 믿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영광의 메시야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처럼 비참하게 죽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참담하게 죽게 될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는 믿음은 더군다나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잘 깨닫지도 못하는 이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런 일을 당할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들로 기억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으셨다. (요 16: 4).
② 예수님의 “조금 있으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시간적으로 촉박한 상태를 말한다.
32절에서 이 말씀을 다 끝맺으시기도 전에 “이때가 벌써 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때가 오면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근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참으로 이 세상에 기쁨을 가져왔다. 참 기쁨이 되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으셨다면 이 세상은 절망만 있을 뿐 아무런 기쁨이 없었을 것이다.
③ 이 말씀은 그의 부활과 성령의 내주 하심을 의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조금 후에 다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그들의 기쁨에 대하여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22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기쁨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이 기쁨이 충만하였다.
(2)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예수님은 이 같은 말씀 끝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시는 놀라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예수 이름으로 구하라 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셨다.(24절)
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슬픔을 가져오는 일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기도의 응답자가 되신다고 하신 뜻이다.
②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반드시 해야 할 근거는 바로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있다.
* 요 14: 13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이요, 아들을 믿는 일은 곧 아버지를 믿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들의 이름으로 구원함을 받았고 그 아들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음으로 우리 기도는 반드시 아들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③ 이 말씀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주님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라”라고(26절)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라고(27절)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서 온 사실을 믿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성령의 빛에 의하여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어느 정도 깨닫기는 했어도 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한결같이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할 것을 예언하셨다. (32절) 그러나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하시기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 16: 33 환난을 당하나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왜 고별 설교를 하시는지 이러한 방법의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나중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13: 19, 14: 29)였고, 두 번째는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요 15: 11), 세 번째는 '환난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요 16: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1]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이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표현과 관련된 내용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다.
(1) 예수의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이다. (13: 19. 14: 29).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 (15: 11).
(3) 환난 때에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14: 4).
(4) 본 절에서는 평안을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칭하는 바를 고별 설교(13-16장)로 국한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25절과 16: 1절 주석을 참조하라.
2]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조차 제자들이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수고하셨다. 예수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것이다.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22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갈 5: 22) 이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수 있었다.
* 갈 5: 22-23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제자들이 담대(膽大)해야 할 대상은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다. 이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 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그 둘이 나오게 된 출발점 역시 대조된다.
즉 환난은 세상에서 나오며 평안은 예수 안에서 나온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된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다.
* 마 5: 12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용어는 오직 예수께서만 사용하셨다.
* 마 9: 2, 22 –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 마 14: 27 -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 막 6: 50 -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 막 10: 49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행 23: 11 -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4]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기었노라"(nikavw 니카오)는 "극복하다, 승리를 거두다"를 요한은 자신의 서신 요일 2: 13-14, 4: 4, 5: 4-5에서 동사 완료형으로 완벽한 영적 승리를 거두었음을 말했다.
예수께서 이기신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가 된 제자들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 롬 8: 37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예수는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 묘사함에 있어서 동사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 이 완료형은 본 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예수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그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로써 사망의 왕 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셨으며 세상을 정복하셨다.
* 롬 5: 12, 14 –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딤후 1: 10 -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리의 영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 37)고 고백할 수 있었다.
(1) 여기서 세상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세상과 약간 구별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들이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본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사탄의 무리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
* 요 12: 31 -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 요 14: 30 -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예수가 싸우는 대상은 전자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치적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은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이처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3) 평안을 누리게 하시려는 주님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평안이 있다. 이 평안은 위로부터 오는 평안으로, 이 평안의 출처는 주님이시다.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제자들이 말할 수 없는 환난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해야 할 그 시기에 주안에서 참 평안을 얻게 하시려는 뜻에서 주신 것이다.
① 주안에서의 평안은 주를 위해 환난을 당할 때 온다.
이 같은 평안은 장차 나타날 소망에서 온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마 5: 10-12).
② 주안에서의 평안은 죄를 이기는 생활에서 온다.
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을 심어 준다. 죄를 이기는 생활은 힘겹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안은 이 같은 생활에서만이 누릴 수 있다.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회개에서 오고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의 평안은 순종에서 찾아온다.
순종의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첩경이다.
* 요 15: 9-11 –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③ 주안에서의 평안은 그 출처가 세 가지임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서 온다. 예수님의 고난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평안의 뿌리가 된다. 그의 고난으로 우리들의 구원의 소망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창조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
* 요 16: 7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세 번째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응답은 큰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요소가 되고 있다.
(4)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해야 할 환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환난이 없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세상의 환난에서 구원하시려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 패역한 세상의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셨다.
세상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여전히 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악의 권세는 강하게 모든 사람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이 세상의 환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피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라고 말씀하셨다.
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환난이 따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 벧전 4: 12-14 –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②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도 이런 환난을 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다. (마 10: 34).
한 가정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그 복음은 그 가정의 세상적인 화평은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화평이 임하기까지 깨어지고 화평을 깨는 칼이 된다고 하셨다.
* 마 10: 35-36 –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5)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 세상의 환난을 이기시어 승리하게 된 것인가?
32절 말미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승리는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마 28: 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이기게 하신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는 바로 이 같은 주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 빌 1: 6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환난은 바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한 체휼이라고 말씀한다.
* 히 4: 14-16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 응답의 약속을 다시 주셨다.
23-24절 –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요 14: 13-14 –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기도 응답을 약속하셨다.
둘째, 그는 기쁨의 충만도 약속하셨다.
24절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요 15: 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누리는 것은 복된 약속이다.
셋째, 그는 평안을 약속하셨다.
33절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때마다 일마다 평안을 주실 것이다.
* 살후 3: 16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넷째, 우리는 환난 중에 담대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세상을 이기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을 믿고 두려워 말고 담대해야 한다.
* 사 41: 10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사 43: 1-2 –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마 28: 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특히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