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암 다녀온 지 십 년도 더 되었네
108사 답사를 계획하였 때 나는 염불암은 108사에 넣지 않았다. 젊은 날에 수도 없이 많이 다녔던 절이다. 팔공산 동봉을 오를 때는 이 암자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올랐다. 동화사에서 염불암까지는 길도 잘 닦아 두었다. 산을 오르는 길이니 경사가 없을 수는 없지만 등산로처럼 까다롭지 않다. 염불암을 올랐을 때의 숨이 찼던 옛 기억 때문에 108사에 넣지 않았다. 기억보다는 나이 때문이었다. ‘이 나이에 무리해서 오를 일이 없지’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매일 만 보 이상씩 걷다 보니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예전에 염불암 마당에서 땀을 식히고 석간수로 목을 축이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라서 용기를 내도록 부추겼다. 염불암이 잘 있는지, 아니면 지금은 어떻게 변하였는지의 궁금증이 나를 더더욱 부추겼다.
용기를 냈다. ‘그래, 한 번 다녀오자. 급행 1번 버스를 타고, 절의 입구에서 내렸다. 예전에 염불암에 오를 때는 절문을 지나면 입장료를 내야 함으로, 옆쪽의 골짜기로 가서 능선을 넘었다. 지금은 입장료를 낼 나이를 훌쩍 지났으므로 당당히 절문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영불암까지가 2.1 km로 되어 있다. 버스를 내린 곳에서 걸어왔으므로, 따진다면 2.5km는 조이 되겠다. 시멘트로 포장한 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랐다. 그런데 산을 오르는 사람은 우리 부부 뿐이다. 염불암으로 가는 길에는 오르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꽃피는 철의 일요일이면 산길을 메울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가버렸나. 사람이 뜸한 길을 차들만이 자주 오르내린다.
간혹, 정말 간혹 등산복이 아닌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이 보인다. 아직 새싹이 움트지 않는 키 큰 나무들 사이에 산수유도, 진달래도 망울을 맺고 있다. 이번 주가 지나면 활짝 필 듯하다. 산 아래와 달리 아직은 꽃이 피기 이른 날씨인가 보다. 그러나 골짜기로 타고 내려오는 산기운은 봄이다.
천천히 발을 옮기면서 오르다 보니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포장하여 많이 다듬은 길이긴 해도 옛 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머릿속에는 엣날의 모습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아내와 나는 ’옛날 그대로이다.‘라는 말은 되풀이 하여 나누면서 올라갔다. 골짜기를 굽이 돌아 절이 바라보이는 곳에서부터는 몹시 가파르다. 예전에도 그랬다. 여기서부터는 숨이 차서 색색거렸다. 이제는 완전히 옛날의 길 그대로이다. 절 앞은 바위가 여기저기 차지하고 있었지만 밭이었는데, 지금은 평평하게 다듬어서 포장을 해 둔 주차장이다.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물이 흘러 넘치던 석간수도 힘에 겨운 듯 방울 방울 떨어진다. 집 사람은 ’절이 왜 이리 퇴락했어‘ 한다. 내 보기에는 퇴락이 아니고, 절 마당에 사람이 사라진 것 뿐이다. 절집은 원래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극락전의 옆에 있는 마애 부처님과 보살님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봄날의 두터운 햇살이 반사하면서 부처님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집사람과 나는 부처님 앞에 두 손을 모우고 절을 올렸다. 우리를 여기까지 오르게 해준 것을 고맙다고 하였다.
부처님을 바위에 모시기 전에, 이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서 부처님의 거처지로 삼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바위 신앙은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나 높은 절벽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을 어귀의 선돌이나 돌탑은 규모가 크지 않다. 그러고 보니 염불암이 가까워지자 길 가에 돌탑이 줄지어 서 있다.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나도, 아내도 작은 돌을 탑 위에 얹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우고 절을 했다.
염불을 하는 바위 전설은 이곳이 불교 이전에 우리의 성지임을 말해준다. 우리의 고대신앙에는 바위 신앙이 있었다. 내가 젊은 날에 팔공산을 오르다보면 더러 바위 앞에 촛불을 켠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뒤편에는 지눌선사가 수행하였다는 바위 굴도 있다.
굴은 우리의 조상인 곰 어머니가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우주의 자궁이다. 굴도 우리의 고대 신앙지이다.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며, 지눌선사가 도를 닦았다는 굴은, 이곳이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우리의 토속 신앙터였음을 말해 준다. 후발 종교는 선발 종교의 신성지를 차용하여 자신의 신성지로 한다고 하니, 영불암은 단군시대부터 우리의 기도처였을 것이다.
바위에 부처가 사시도록 새겨 넣을 때는 으젓하고, 잘 생긴 모습이다. 그러나 염불암의 부처님은 조금 볼 품이 없다. 이럴 때는 민중이 가장 사랑한 미륵부처님이 많다.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 바위인데도 미륵바위라고 하는 곳이 많다. 미룩불은 힘들게 사는 민중이 가장 좋아하는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주장이나, 바위 앞의 설명서에도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 보살이다. 관세음 보살은 아미타 부처님의 협시 보살이니 당연하다. 아미타 부처님은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나까 염줄암의 주불당이 극락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부처님을 소개한 어떤 글에서, 장인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아주 잘 표현한 멋진 조각상이라고 하였다. 종교를 떠나서, 미술로만 생각하면 과연 그럴까. 일주문을 들어서기 앞서, 절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과 비교하면 미적으로는 표현이 미숙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나라 것이라면 무조건 세계의 최고니 하면서, 칭찬만 늘어놓는 것도 좋은 일일까. 특히 바위의 남쪽 면에 새겨진 보살상은 우리이 무속에서 볼 수 있는 무슨 각시라는 무신상과 닮았다. 그러나 넓적한 얼굴은 전체적으로 부잣집 맏며느리를 닮았다. 그렇다면 민불 형식의 마애불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속신앙이 중심 신앙이었던 신라에서 선진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인다. 외래 문물을 받아들일 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머리에 먹물이 많이 들은 상류층, 지식인이 앞장 선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일 때 왕실이 앞장섰다. 그러다 민중들에게도 퍼져 나갔지만 단순히 두 손 모아 빌며너 소원만을 빌던 민중들이 어려운 교리로 무장한 불교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민간에게 쉽게 퍼져나가도록 염불만 하면, 그냥 ’관세음보살 나무아미 타불‘만 외우면 부처님이 소원하는 바를 들어준다고 하였다. 염불암의 바위 부처님이 아미타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신라 시대의 아미타 부터님은 죽어서 극락가기 보다는 살아있을 때의 어려움을 씻어주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라시대 때부터 팔공산 아래 마을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던 부처님이 바로 염불암의 바위에 거처를 정하신 분이 아닐까.
극락전 왼편의 뒤쪽에 산신각이 서 있다. 내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없었었는데, 내가 찾지 않았던 동안에 팔공산 산신을 모시는 전각을 세웠나 보다. 수염이 허이연 분이 호랑이와 함께 계신다. 나는 꾸벅 인사를 올렸다.
염불암에 지눌선사의 전설이 스며있음도 의미가 있다 고려시대의 대스님이신 지눌선사는 신령의 거조암에 10년 간을 머물면서 불교 정화 운동을 했다. 팔공산에 지눌선사의 행적이 많이 남아 있어야 할텐데, 많지 않아서 안타까웠는데, 여기, 염불암에서나마 만날 수 있어서 반갑다.
집사람은 법당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마당의 기와 불사에도 가서 글을 썼다. 펜에서 잉크가 말라버려서 잘 나오지 않는다나. 바위에 계시는 부처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뒤편의 신령각에 머무시는 신령님에게 공손히 문안를 드린다. 그러면서, 이 절이 왜 이렇게 쇠락해졌나며, 안타까워 한다.
우리는 내려왔다. 내리막 길이니 훨씬 수월하다. 다리의 근육이 조금 뻐근한 것을 보니, 지금까지 다녔던 절을 찾아가는 길보다는 경사가 조금 더 심했고, 조금은 힘 들었나 보다. 내려오는 길에도 간간이 사람을 만나기는 했으나, 적막한 산길이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길가에는 이제 겨우 얼굴을 내미는 쑥이 보인다. 집사람은 쑥국을 끓이기에 알맞다면서 쑥을 캔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먼저 내려오면서, 염불암을 다녀왔으니, 다녀오기 힘들거라면서 답사 계획표에 빠져 있는 절집도 찾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댓글 모처럼 염불암 소식 잘 들었습니다. 가까운 날에 저도 한번 다녀 올 예정입니다.
오래전에 선생님과 팔공산에 답사다녔던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