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2. 상상 테마1 - 단순한 사물과 현상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상상 테마 1은 나만의 시적 의미나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또는 암시할 수 있는) 작고 단순한 사물과 현상을 바탕으로 상상을 적용해보는 방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심상(心象)을 제공하는 시의 매력은 총체적이고 대의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단순성, 근원성, 본질성을 가진 사물이나 현상이 심상을 유발하는 감각과 시적 사유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단순성, 근원성, 본질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감각하고 감지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대가 넓고 독자를 쉽게 본인의 시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갖는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통조림 / 하린
겨울잠 자기에 가장 좋은 곳은 통조림 속이다 이렇게 완벽한 밀봉은 처음 모든 수식어가 바깥에 머문다
이곳에는 1인극의 생리적 현상 숨이 막혀도 웃을 수 있고 들키지 않게 울 수도 있다 그대로 멈춰서 극한의 목소리를 삼키면 그뿐
믿어야 할 것은 오직 잠이고 유통기한은 무한대니 적을 필요가 없다 용도는 단순하게, 목적은 비릿하게
미발견종으로 1000년쯤 살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고고학적 취향을 즐기자 미라가 돼서 타인의 꿈속을 유령처럼 걸어 다니자
누구든 통조림 안이 궁금해서 서성이게 만들면 된다 한참 후에 발견될 유언 몇 줄을 바코드로 새긴 상태면 족하다
어떤 천사가 뚜껑을 딱하고 딸 때까지 처음 그대로 변질도 없다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꿈틀대면 되는 거다
계절은 딱 하나다, 궁핍도 가난도 비굴도 없다 머릿속 황사가 걷히고 심장 속 늪지대가 마르고 내가 나에게 들려주던 거짓말도 삭제된다
누군가를 저주하던 버릇을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왜 증오는 토막 난 후에도 싱싱해지고 있는 걸까, 점점 더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 + 내 시만의 장점 찾기
필자가 통조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시적 메시지를 정확하게 해설한 글이 있어서 먼저 인용하겠다.
이 시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자아와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시인은 요즈음 젊은이들의 유별난 삶, 즉 세계와 차단되어 있는 삶을 통조림에 비유한다. 심지어 시인은 자기 폐쇄, 자아 유폐를 사는 젊은이들의 삶을 두고 “겨울잠 자기에 가장 좋은” “통조림 속”이라고 말한다. 시인이 생각하기에는 “숨이 막혀도 웃을 수 있”는 곳이, “들키지 않게 울 수도 있”는 곳이 완벽하게 밀봉된 통조림 속의 삶이다. 이런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유통기한은 없다. “유통기한은 무한대”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시인은 급기야 이들 젊은이들에게 통조림 속에 유폐되어 “미발견종으로 1000년쯤 살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고고학적 취향을 즐기자”고 말한다. 통조림 속에 유폐되어 있는 삶을 살다보면 어떤 누군가는 “통조림 안이 궁금해 서성이게” 마련이다. “어떤 천사가 뚜껑을 딱하고 딸 때까지/ 처음 그대로 변질도 없이 참다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꿈틀대면” 된다고 시인이 자학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침내는 자기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거짓말도 삭제”되고 있는 것이 통조림 속 젊은이들이다.
통조림 속에 밀봉되어 있다고 하여 이들의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이를 두고 “누군가를 저주하던 버릇은 버린 지 오래”이지만 “증오는 토막 난 후에도 싱싱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통조림 속에 밀봉되어 이제나저제나 “어떤 천사”에 의해 개봉되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이 너무 안타깝다. ―이은봉, 『2017년 오늘의 좋은 시』, 푸른 사상, 2017.
해설에서 밑줄 친 부분인 “자기 폐쇄, 자아 유폐를 사는 젊은이들의 삶”이 실제로 필자가 시를 쓰기 전에 생각했던 시적 메시지다. 다만 그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창작에 임했다. 모든 인간들에게 자기 폐쇄, 자아 유폐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시를 쓴 것이다. 화자의 구체적인 경험 맥락이 중요하므로 우선 ‘어떤 화자가 통조림 속에서 자기 폐쇄를 경험하는 것으로 쓸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사는 내내 궁핍과 가난과 비굴에 젖어 있는 화자다. “계절은 딱 하나다. 궁핍도 가난도 비굴도” 없다는 표현을 통해 그런 화자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자기 유폐라는 시적 메시지를 가지고 형상화를 이루려 할 때 적용할 나만의 시적 장점은 바로 여덟 가지 장점[1. 새로운 발상(상상, 역발상 포함), 2. 지독히 섬세한 접근 방법, 3. 탁월한 비유, 4. 탁월한 상징, 5. 신선한 시적 직관이나 예기치 못한 시적 반전, 6. 솔직 담백한 시적 진술, 7. 풍자 미학, 8. 남들이 안 쓴 소재나 모티브] 중에서 ‘시적 상상’이었다. ‘통조림 깡통에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게 만들자.’ 그래서 화자인 ‘나’의 처지와 속성과 심리 상태를 담아보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2단계 - 개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 + 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그러한 의도로 찾은 객관적 상관물이 바로 ‘통조림’이다. 통조림은 지극히 단순한 속성을 지닌 사물이지만 완벽한 밀봉 상태이기 때문에 나만의 시적 메시지를 담아내는데 적합한 상관물이란 생각을 했다.
‘나’를 담을 때 구체적으로 ‘통조림’의 어떤 것과 맞물리게 할까 고민을 했다. 밀폐의 속성, 토막난 속성과 더불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통조림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런 상황을 대변할 통조림과 관련된 이미지와 단어를 열거해 보았다. ‘완벽한 밀봉’, ‘유통기한’, ‘토막 난 것들’, ‘바깥 문구와 이미지와 성분을 표시 안 하면 안쪽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처음 만든 그대로 뚜껑을 딸 때까지 변화가 없다’ 등을 메모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 적용된 상상적 체험은 “미발견종으로 1000년쯤 살다가/ 우연히 발견”되게 하는 것이었다. 1000년 동안 “미라가 된 화자가 타인의 꿈속에 유령처럼 걸어 다니”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했다. 그런 상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것은 “어떤 천사가 뚜껑을 딱하고 딸 때까지/ 처음 그대로 변질도 없이 참다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꿈틀대야지, 하는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 또 다른 예문
돌의 문서 / 이린아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궁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결을 내주고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유리의 집 / 정현우
오르골, 인형의 관절에서 도는 빛, 흐르지 못한 시간까지 듣지, 발아래 흔들리는 겨울수초, 창가에 턱을 괴면 푸른 발굽 소리, 나는 언 발을 거두고, 창밖의 새들은 고드름을 물고, 구름은 먼 틈을 닫을 때, 겨울이 들어갈 수 있는 빈 곳, 나를 끌어내리는 유리의 빛, 반사되지 않는 빛은 투명하게 잠영해, 빛을 열고 가는 기도, 말해요, 머리 위로 새들의 높이를, 투명을 타고 오르는 새들이 부딪히는 유리의 벽, 깜빡여도 떠지지 않는 눈, 집은 모두 쏟아지고 겨울나무가 짙푸르게 우는 소리, 나는 작은 우주 속의 한 톨, 내가 아는 슬픔들을 하나씩 불러볼까, 오르골이 돌지 않을 때까지, 존재는 멈추지 않고 모든 순서가 사라진다. 무엇이 나를 대신 할까, 흐르지 않는 유리의 강, 집을 짓고, 강수가 차올라도 두 손으로 쥐어도 깨지지 않는 유리가 있어, 쓸려가는 유리의 시간, 달아나는 유리의 빛
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 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아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 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둥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 본다 찡그려 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본다 눈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저자(하린 시인) 약력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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