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40. 상상 테마39 - 가정법(假定法)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가정법을 상상에 적용할 때
가정법은 그 자체가 상상의 소산이다. 누구나 쉽게 상상을 전개할 수 있는 틀을 ‘만약’이라는 가정(假定)이 제공하기에, 한번 발동이 걸리면 추론적 상상력이 끝없이 펼쳐진다.
‘만약 A가 B를 한다면’ ‘만약 A가 B에게 C를 한다면’ ‘만약 A가 B를 지나 D에 도달한다면’ 등의 가정을 할 때 A, B, C, D의 자리에 최대한 낯선 것을 놓으면 그 가정은 그 자체로 시의 추동력이 되어 날개를 편다. 예시 구절을 만들어보자. ‘만약 노래가 자살을 한다면’ ‘만약 먹구름이 나에게 주문을 건다면’ ‘만약 나를 통과한 먹구름이 당신에게 도달한다면’과 같은 구절이 탄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더 살펴보자. ‘만약 책 밖으로 글자들이 걸어 나온다면’과 같은 구절이 떠올랐다고 치자. 그 순간 질문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지게 된다. ‘만약 시집 밖으로 글자들이 걸어 나와 독백을 한다면 그 목소리는 시인의 것일까? 책의 것일까?’와 같은 궁금증이 생겨 이런 식의 발화도 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질서정연해/ 난해한 태도를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관념어를 남발한 건 언제나 너야.” “저녁 속을 나는 새를 보고 어둠을 먹고사는 새가 나라고 했을 뿐이야” “넌 너무 꾸밈이 많아. 괜히 심각한 척을 하고 있어/ 내 안엔 껍데기만 있는 데도 말이야.”
‘만약’이라는 상상력을 펼칠 때 무조건 최대한 낯선 것이 A, B, C, D 자리에 놓이도록 하면 그 상상은 성공이다. 만약이라는 게임을 하듯 문장이나 구절을 툭툭 던지면서 메모를 꾸준히 한다면 시를 여러 편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아버지가 된다면’ ‘만약 사과나무에게서 포도가 열린다면’ ‘만약 어머니가 어머니를 밤마다 꺼내고 있다면’ ‘만약 사과를 전부 떨어뜨린 사과나무가 겨울 내내 굶주린 새에게 유언을 내민다면’ ‘만약 봄이 봄을 증오한다면’ ‘만약 4월이 4월로부터 탈출한다면’ ‘만약 월요일에 신발들이 전부 사라진다면’ ‘만약 하루 종일 붉은색 비가 내린다면’ ‘만약 내가 순식간에 마네킹으로 변한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들만 넘쳐난다면’과 같은 구절을 만드는 ‘만약’이라는 게임을 수시로 실천해보자.
필자의 시를 바탕으로 그것을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만약 내가 불타는 종이의 유언을 듣게 된다면 / 하린
내가 종이를 버린 게 아니라 종이가 나를 버린 거라고 확신하게 될 거다 종이는 나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솔직성의 한계를 밤새 나를 내려다본 형광등의 측은한 태도를 연애의 감정이 쓸모없게 변한 순간을 내가 쓴 시가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에 의해 읽히지 않게 될 예감을 취미는 없고 취향만 있는 결핍을 감당하지 못한 동물성과 실천하지 못한 식물성을 어설프게 흘려보낸 한밤의 열기를 아침마다 휘발된 줄 알았는데 주기적으로 다시 찾아오던 좌절의 민낯을 매번 망설인 것이 글자가 아니라 종이만 보면 움츠러들던 상투적인 나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정해진 비극을 향해 무작정 몸부림쳤던 낮의 자책과 밤의 자학을
재만 상징처럼 남는다 땅속에 묻는다 그 자리에 그 어떤 것도 피어나지 말라고 기도한다 ― 《포엠포엠》 2021년 가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이 시에 적용된 가정법은 제목 그대로 ‘만약 내가 불타는 종이의 유언을 듣게 된다면’이다. 당연히 그 종이는 화자인 ‘나’와 관련이 있는 종이다. 화자는 그 종이 위에 뭔가를 적었을 것이다. 적은 내용이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종이는 주체성을 갖고 화자의 치부를 드러낸다. 화자인 나는 쓰는 사람이다. 종이에 썼던 것은 화자의 일상과 심리 상태일 거다.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썼던 것을 몰래 소각하려고 하는데, 종이의 유언이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난감할 것이다. 종이가 말한 것이 온통 ‘나’에 대한 솔직한 모습이기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나’의 심리상태는 타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명하게 부각되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종이를 태워본 사람은 다 알 거다. 종이가 타들어가면서 글자의 윤곽이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발상도 가능해진다. “내가 종이를 버린 게 아니라/ 종이가 나를 버린 거다”라는 발상. 소멸하고 있는 존재가 오히려 살아있는 존재를 버렸다는 발상이 낯선 느낌을 주고 재미도 있다. 그것은 종이의 유언일 수도 있고 ‘나’를 향한 절규일 수도 있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객관적 상관물인 종이는 화자인 나의 실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내가 가진 솔직성의 한계”라고 쓴 부분부터 “정해진 비극을 향해 무작정 몸부림쳤던/ 낮의 자책과 밤의 자학”이라고 쓴 부분까지 전부 “나의 모든 걸” 종이가 대신 증언한다.
종이가 증언한 것들은 대부분 전부 주목받지 못한 존재의 양상이거나 불안전한 자아의 몸짓이다.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종이는 객관적 상관물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 나타난 상상적 체험은 두 가지다. ‘만약 내가 불타는 종이의 유언을 듣게 된다면’이라는 가정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죽어가는 종이 위에 적힌 다양한 내용들이다. 이 상상적 체험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필자의 경험이 일부 개입되어 이루어졌다. 필자도 오랫동안 쓰는 자로 살아왔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것의 원인은 “솔직성의 한계”와 미숙한 시적 재능 때문일 것이다.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쓴 시가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에 의해 읽히지 않게 될 예감”은 적중할 것이다.
* 또 다른 예문
다음 페이지도 파도라면 / 이원
펼쳐놓은 책은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고 그 페이지를 읽어야 했지
책은 꽤나 두꺼웠거든
문제는 죽은 사람들이 그 페이지로 자꾸 들어가는 거야 펼쳐놓은 페이지가 거기였으니 거기뿐이었으니
그거 알아? 죽은 사람은 무거워 하나 남은 표정을 못 놓치거든 점점 내가 무거워진 것은 그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기 때문이지 무거워서 들 수가 없고 거기는 와글와글 이어서 상가의 음식은 입뿐인 허기여서
상가의 근조는 여기로 몰려들었던 거야
사실 나는 몰라 죽은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어 죽은 얼굴을 본 적은 있지
이 책이 얼마나 거대한 줄 알아? 놀랍게도 어마어마하게도 딱 책상 만해 지금까지의 시간을 다 쏟아 부어 한쪽으로 접으면 양쪽이 없어지고 표정은 봉인되고
책상은 심연의 책이 된다
다무는 입술과 벌리는 입술을 떼어놓지 않으면 오른쪽 왼쪽 영영 잃어버린다고 약속하면 입들이 눈보라로 던져지면
다시 출렁일지도 다시 운동화를 신고 문 밖으로 나가게 될 지도
그만! 그만! 그러면 나는 볼 곳이 없어져
나는 내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 - 《문장 웹진》 2020년 3월호
유배(流配) / 우대식
오늘날에도 유배라는 것이 있어 어느 먼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으며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먼 바다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네 마른반찬을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쓰고 살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며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논(論)을 쓰겠네 서슬 위에 발을 대고 살면서 이 먼 위리와 안치에 대해 슬픈 변명을 쓰겠네 마음을 주저앉혀 서로 다른 신념을 지켜보는 갸륵함을 염원하다 보면 염전의 새벽에 어둑한 불이 들어오겠네 바닷가의 수척한 노동과 버려진 자의 곤고함을 배우다 문득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물속에서 발견하면 삼박 사일을 목 놓아 울겠네 며칠 말미를 낸 그대가 온다면 밥을 끓이고 대나무 낚시를 하며 서로의 글을 핥고 빨겠네 글이란 무섭고도 간절하여 가시나무를 뚫고 천둥처럼 울릴 것이라 믿고 그대의 글을 읽다가 온통 피로 멍울진 내 혓바닥을 보겠네 유배의 길에 떨어져 흩어진 몸을 살뜰히 아껴보겠네 - 《시인동네》 2020년 4월호
만약 / 최형심
양철로 된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 위에 막 발자국을 찍은 구름이 있다면 번호판 대신 당신의 이름표를 달고 달리는 차가 있다면 그리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떠돌이 꼬마별들을 낚을 수 있다면 찔레꽃에 물린 뱀의 투병기를 읽다가 어느 유월에 떠난 사람과 깍지를 끼며 안녕, 인사할 수 있다면 그를 보낸 밤을 빨랫줄에 걸어 보송보송 말리고 깡통 가득 찬 별들을 툭툭 따며 한밤을 보낼 수 있다면 무릎 위에 쏟아진 별들 위로 아주 오래전에 삼킨 들숨을 후후 뱉어낼 수 있다면 첫 번째 봄과 마지막 봄을 맞바꿔주는 고물상이 있어 한 사람을 잃고 열차가 떠난 뒤에도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사랑의 뫼비우스의 띠가 있다면 달그림자에 베인 고양이 귀에 바람을 감아주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창에 내린 별과자를 아그작 씹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잊었다 말할 수 있다면, - 《문파》 2020년 겨울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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