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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신명 4,1. 5-9
복 음 : 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복음의 빛 : 매일성경 묵상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 시작기도
성령님, 주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겸허함으로 저를 이끄소서. 아멘.
● 말씀 들여다보기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며 받은
율법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위대한 분이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올바른 규정과 법규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 그 규정과 법규를 잊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자자손손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종종 율법규정을 어기시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치 하느님의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으로 착각하게도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이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
율법과 할례를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바오로의 생각 등을 들으며
율법규정을 지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다시 올바로 세워 모두가 하느님 계명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 곧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산상설교 내용들은 모두 모세의 율법규정을 새롭게 해석하시는,
곧 그 정신을 바로 세우시는 말씀들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야말로
참된 율법 정신을 알고 있는 위대한 새 계약의 이스라엘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가르침을 믿음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이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 나를 건드리는 말씀 한마디
● 말씀 따라 걷기
*주님 말씀을 읽고 따르고 전하는 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그 말씀을 찾아 기록해 보자.
● 마침기도
주님, 주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당신이 제게 바라시는 참뜻을 깨닫게 해주소서. 아멘.
<야곱의 우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부모로부터 자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너무 못해서 이번에 꼴찌를 했다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아이에게 말했더니 아이가 뜻밖의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 못하기는 하지만, 꼴찌가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아들 둔 것이 더 나은 것 아냐?”
생각해보니 꼴찌했다는 사실만 부끄러워했지,
아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반성을 할 수 있었답니다.
하긴 어떤 부모는 사고로 일찍 자녀를 잃고 나서
“꼴찌라도 하는 아이가 있었으면 한이 없겠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공부 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일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강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 공부도 잘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요.
노력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요.
그러나 공부만 잘 하는 아이보다 공부만 못 하는 아이가
더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모범을 줄 수도 있고, 또 나쁜 모범을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으로 좋은 모범을 보인다면,
자녀 역시 책임감을 가지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가치를 쫓아서 사는 부모의 모범이 자녀 역시 중요한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좋은 모범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좋은 모범보다는 내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다보니
세상은 더욱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것을 폐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자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나 예언사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인 사랑이 세상 밖으로 실천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이로써 율법이나 예언서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글이나 말로만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바로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담긴 모범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 완성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꼭 읽어야 하는데 읽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약을 사면 설명서가 있습니다. 저는 거의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를 사면 설명서가 있습니다. 역시 거의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전자제품을 사면 대부분 설명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들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 문제가 되면 잘 아는 분들에게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설명서에 있는 대로 해보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음식점에서 뛰어 다녀도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기차 안에서 떠들어도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에게 아이는 귀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기가 죽을까봐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들도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면서 참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지켜야할 규범과 예의를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어려서부터 참는 것을 배운다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면
아이는 자라서 남을 도울 수 있고, 힘들 때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 권위가 있는 사람, 전문가들이 잘못을 해도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쌓아온 업적, 인맥, 권력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권위와 능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도, 예술인도, 문학인도, 학자도 예외가 없습니다.
외적인 능력과 권위를 담아낼 내적인 성찰과 영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마당의 쓰레기를 치우고,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고, 봉고차를 운전하고, 장례가 나면 연도를 가는 사제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제들에게 ‘신부님은 그런 거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제들에게 ‘잘 하셨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하고,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고,
고백성사를 힘들어하고, 미사 시간에 늦는 사제들에게는
‘신부님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제를 사랑하고, 사제를 위하는 것입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설계도를 따라서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도 도면에 따라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약을 만드는 사람도 약을 만드는 공정에 따라서 약을 만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설계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
이 계명들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면서 부부싸움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교통신호를 무시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산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녀들을 소유물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승차권을 사지도 않고 버스에 타려고 하는 무임승차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실행하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의미의 율법준수를 종종 거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곧 안식일법도 정결례법도 단식도 지키지 않으시고,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폐기되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는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 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성취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리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이 당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지키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지켜질 때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되게 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소죄?
전삼용 요셉 신부
제가 유학 처음 나와서 윤리 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죄가 되려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아야하고 또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어야하며
그 죄를 짓는 대상이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할 때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쉽게 질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훔쳤어, 그게 대죄야 소죄야?”
저는 그 때도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어떤 사람이 100원을 훔쳤다면 그건 대죄야, 소죄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놀라서 아주 작은 것을 훔쳤는데 어떻게 대죄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돌하게,
“만약 교수님께서 100원을 훔쳤다면 대죄에요, 소죄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하시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죄는 지으면 안 되지만 소죄는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것일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슨 큰일을 해 드려야 그 분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어떤 큰일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기침하는 수녀님의 옆에 앉아 그것을 참아낸다든지,
빨래할 때 물이 튀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는다든지 하는 작은 희생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희생들이 하느님께는 성당을 몇 개 짓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난 당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혀보라고 놀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에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 분께 하느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만 소리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괴롭히는 이들보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배신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떤 때는 작은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잘못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큰 잘못보다 자신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영성지도를 받다보니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엄격하시고
또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자상하신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사실 극단적은 것은 다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상한 모습으로 “그런 것들은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더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작은 것까지도 다 지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신자분들이 많은 선물을 주시지만 받는 사람은 그 물질적 가치로 받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할머니의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엔 크지만 속은 비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크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에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것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일상의 작은 봉헌을 주님께 드리도록 합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