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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 롱아일랜드 연합장로교회에서 구역 식구들과 함께, 아마도 마 지막 구역 예배, 1996년 6월경
새로운 목회지인 롱아일랜드에서 우리 가족이 지낼 집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롱아일랜드의 집들이 대부분 훌륭하고 보기 좋아서 어떤 집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지경이었다. 그중에 싸이요셋이라는 동네 이층집을 살펴보게 되었다. 방도 많고 동네도 멋진데 집세마저 저렴했다. 교회에서 집세를 내주는 거였지만 생전 처음 내 이름으로 가져보는 집이었다.
그것도 이층집이라니. 집의 크기만으로도 우리 가족은 압도되었던 것 같다. 가족들 모두 그 집을 매우 좋아하고 기뻐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계약은 신중하게 고려해 보려고 했으나 이미 식구들은 그 집에 매료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며칠 후 이삿짐을 옮기고 아름다운 이층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층집이 저렴했던 까닭이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데 이상하게 슬리퍼가 자꾸 젖는 게 아닌가. 특히 지하실에 다녀오기만 하면 발이 축축했다. 그렇게 네 식구는 한 달 동안 무척이나 습한 집에서 지내느라 고생해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부부를 부동산 업자가 실컷 농락한 것 같은 집이었다. 나는 부동산 업자에게 더 이상 살기 어렵다고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업자는 그 사실을 이미 아는 듯했고 뻔뻔하게 그저 다른 집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 후에 소개받은 집은 훨씬 작고 아담한 집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주인집이 반지하에 살고 있었다. 월세를 사는 집이 윗집을 사용하는 희한한 형태의 단독주택이었다. 주인을 만나 보니 영어를 잘하는 인도 여성이었다. 어머니와 딸이 같이 거주하는 전형적인 인도 사람들이었다. 인도분들은 우리가 된장국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루 세끼 카레가 주식이었다. 진한 꼬랑내의 카레 냄새를 하루 종일 맡아야 하는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이번 집은 하루 종일 해가 드는 이른바 남서향 집이었다. 솔직히 방위가 뭔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을 만큼 우리는 세상살이에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축축한 집에서 한 달 동안 고생을 겪은 우리는 일단 집이 뽀송뽀송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한쪽으로 차가 들어와 다른 쪽으로 차가 나갈 수 있는 아스팔트 주차가 가능한 집이라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때 마침 약수교회 출신 이성복 전도사가 온 식구를 데리고 이사와서 우리 가족과 가까운 친구이자 이웃이 되면서 그 집에 정을 들이는 게 수월했다. 새로운 집은 작지만 쓸모 있었다. 인도 음식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랍비가 앞집에 살아서 유대인들을 자주 만날 수도 있었다. 아이들 학교도 가깝고 학군이 좋아 마음 놓고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집인 것도 감사했다. 교회와도 30분 거리라 비교적 가까웠다.
섬기는 교회의 담임은 림형천 목사님이었고, 4대째 목사 집안의 사람으로 전문 목회자다웠다. 그는 나에게 정식으로 청빙을 제안한 당사자였고 보스턴대학에서 설교학을 전공하던 학구파 설교자였다. 성격도 유하고 인내심이 많은 그는 교우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한 집사님은 그의 설교를 녹음하고 전문을 써서 보관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수행하기도 했다. 다섯 장로님도 교회와 자기 직업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던 분들이었다.
나는 일단 교육부와 성인 사역을 담임목사와 반반씩 나누어 수행했다. 물론 담임목사가 주일 설교는 주로 하였으나 새벽설교는 철저하게 한 주씩 돌아가며 인도하였다. 그 시절 나는 설교할 때마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주석을 살펴보며 비교 분석하였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주석가들의 해석을 참고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벽설교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목사가 설교를 즐기니 신도들의 반응도 두드러지게 긍정적이었다. 그 증거가 새벽기도가 끝나면 신도들이 줄지어 아침식사를 대접하겠다고 경쟁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어느 날 나는 수요일 오전 성경공부를 시작하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고 요한복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롱아일랜드에 사는 한국 교민들은 대개 신앙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고 사업도열심히 하는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우리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도 모든 면에서 본받을만한 모범생들이었다.
교우 중에 의사와 박사도 적지 않았다. 여러 성도가 1970년대 초에 미국 동부에서 유학하거나 이민을 실행한 이들이었으며, 그 당시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아이비리그 출신 의사들과 경기, 이화고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 많았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한번 결심하면 저렇게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가 보다 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그 교우들 대개는 골프를 즐기곤 했는데, 그들은 늘 “목사님 우리가 다 준비해 놓을 터이니 골프 클럽에 오셔서 운동하고 가세요”라고 청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골프는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드는 운동이라 나와 담임목사는 점잖게 사양했다. 게다가 골프를 시작하면 깊이 빠질 것 같은 생각에 감히 골프장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사실 프린스턴신학교 기숙사 바로 옆에도 골프장이 있었다. 하지만 황영훈, 임성빈, 최루톤, 최정훈, 장경철, 배정훈과 같은 신학교에서 만난 선후배 친구들은 한밤중 골프장에 들어가서 가끔 기도는 하였어도 골프를 치려고 시도조차 안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수요일 오전 성경공부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교역자 회의에서 결정하였으니 나는 여전도회 회장 권사님과 임원들을 만나 의논을 시작했다. 수요일 오전 대부분을 골프장에서 지내던 그들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목사님이 요청한 것이니 임원들이라도 참여하겠다며 모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새벽에 수요일에 열릴 성경공부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고 세상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주석을 다 동원하여 성경공부를 정성껏 연구하고 준비했다. 그렇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시작했던 수요일 오전 성경공부는 목사와 두 명의 여신도만으로 첫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성경공부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두 명은 네 명으로 네 명은 여덟 명으로 여덟 명은 열대여섯 명으로 늘어나면서 성경공부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때부터 수요일 오전 성경공부는 탄력이 붙었고, 수요일 오전의 골프 모임은 목요일로 옮겨지면서 성경공부는 말씀과 친교로 즐거움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어사역을 담당하던 피터 전도사가 슬프게 울먹이며 “사랑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소천하셔서 자신은 이제 필라델피아로 가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함께 슬픔을 나누며 장례를 무사히 마쳤지만, 피터는 갑자기 혼자 남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선함과 열심으로 사역했던 전도사의 낙향에 우리는 당황했고, 피터가 맡았던 영어사역은 졸지에 나의 사역이 되고 말았다.
나는 갑자기 영어 설교와 영어 목회까지 감당하게 되면서 밤낮으로 쉴 틈이 없었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역으로 눈코 뜰 새 없었다. 그 와중에 성인사역도 담임목사와의 협동사역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가정 사역”을 중점적으로 하기 위해 부부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가정예배를 위한 자료를 매주 만들어서 교우들에게 배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학교도 운영했었다.
이성복 전도사와 나는 노인 성도들을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모셔 가고, 즐거운 노년 생활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그들과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는 17인승 교회버스 기사, 영어설교자, 수요성경공부 인도자, 노인학교인도자, 가정사역자 등의 다양한 타이틀을 목에 걸었다. 지나고 보니 림형천 목사님과 함께한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으나 행복한 경험과 배움의 시간이었다.
롱아일랜드에서의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나중에 이 교회를 친구 황인철 목사가 사역하게 되었고, 나는 한국에서 건너오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가 이민교회 사역에서 한국신학교로 옮겨가길 바라시는 게 아닌지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롱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사계는 즐길만할 때 끝나버렸으나 나의 사역은 활짝 핀 장미처럼 만개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 중 서운하고 불편한 게 없었던 건 아니다. 아마도 나의 뇌는 과거의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역시 주님과 함께 걸어 온 아름답고 감사한 발걸음이었다고 믿고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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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