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는 <위서>를 인용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고와 같은 시기였다’ 고 적고 있다. 이어서 <고기>를 인용해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불렀다’ 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이르는 ‘고’, ‘당고’는 중국 삼황오제 가운데 하나인 요 임금을 가리킨다. 그러나 일연스님은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되는 해는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이라 해서 고조선의 정확한 건국연도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로 볼 수 있는 사서는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 위지(魏志)가 있으나 이 <삼국지> 위지에는 단군 과련 기록이 없다. 따라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는 왕침(王沈)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위서>로 추정되나 현재 이 <위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교과서 등에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동국통감> 등을 근거로 고조선 건국 년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나타내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의 신뢰성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기원전 7세기경 중국 사서에 이미 조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 사서 가운데는 기원전 7세기경에 관중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관자>에 처음 나온다. ‘제 환공이 “해내(海內)에 보물(옥폐玉幣) 7가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무엇인가?”라고 묻자 관자가 답하기를 “발조선의 문피(文皮)가 그 하나입니다. 제 환공이 “사이(四夷)가 입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자 관자는 “문피와 타(毤)를 예물로 청하기 때문입니다. 표피 한 장이라도 천금으로 계산해주면 8천리 떨어진 발조선도 입조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문피(文皮)는 표범의 가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관자>의 기록은 발조선이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전국시대 제나라와 무역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록에서 관자는 발조선이 8천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멀다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관자는 오월도 8천리 떨어져 있으며 우씨도 8천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상서>와 <사기>, <한서> 기록을 감안하면 고조선은 적어도 기원전 11세기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당시는 청동기 시대이다. 따라서 청동기 유물유적의 성격을 파악하면 당시 시대상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유적은 비파형 동검 유적이다. 비파형 동검은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동검이다. 이 비파형 동검은 요서, 요동, 한반도에서 출토된다.
이러한 비파형 동검은 고대 권력층에서나 가질 수 있는 무기 겸 의식용으로 다른 지역 동검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이 지역에는 비파형 동검을 매개로 하는 공동체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요서와 요동, 한반도를 아우르는 공동체 세력은 고조선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 출토 유적지는 바로 고조선의 영토를 의미한다. 이는 사서에서 이르듯 난하 동쪽 요서지역부터 요동, 만주, 한반도가 고조선이라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즉 비파형 동검이라는 고고학적 유물은 고조선이 요서지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는 사서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중에는 요서지역 동호족이 포함되므로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고죽국이나 동호족이 고조선의 한 일원, 제후국이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빚는 오류이다. 비파형 동검이라는 고고학적 사료는 요서지역에 있던 세력도 고조선의 일부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