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
며칠이 지나 그(한음 이덕형)의 고자(孤子) 여벽(如璧)이 초췌한 모습으로 참최(斬衰)를 입고 장사를 지내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곡을 하고 상장(喪杖)을 내려놓으며 절을 한 다음에 가장(家狀)을 나에게 올리며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이 늙은이의 마음은 친구 이모(李某)가 잘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교유한 분들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분은 오직 대부(大夫)뿐이십니다. 이에 감히 아버지의 묘지문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옛날에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叔向)이 그의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는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 짓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 지었다. 진나라는 국정을 여기에 의지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내가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너의 아버지보다 나이로 따지면 조금 위이지만, 덕으로 말하자면 내가 한참 뒤처졌다. 태평 시절에는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번갈아가며 군대를 관장했으며, 만년에 무능한 재상으로 있을 때는 형제처럼 막역하여 끝까지 함께 마쳤으니, 평생 벼슬한 자취가 대략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나를 알아준 사람은 그대의 아버지였고, 그대의 아버지를 사모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 젊을 때에는 삼밭의 삼대에 의지하는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천리마의 꼬리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 어찌 그대의 아버지를 위해 즐겁게 묘지문을 쓰지 않을쏜가.”
[원문]
居數日. 其孤如璧. 纍然服斬. 越紼而來. 哭捨杖拜. 獻狀曰. 吾父嘗有言於子曰. 老夫心事. 有友李某知之. 今父不幸死. 凡與父游而有文者. 唯大夫在. 敢以幽堂之辭爲托. 余曰. 吾聞昔司馬侯死. 叔向撫其子曰. 自此其父死. 吾蔑與比而事君矣. 此其父始之. 我終之. 我始之. 此其父終之. 晉國賴之. 吾於今. 不亦悲哉. 且余於若父. 計年則差先一飯. 語德則常後三級. 平世文昌. 鴈序而進. 當國板蕩. 迭居中兵. 衰年伴食. 塤箎莫逆. 終與相竟. 平生䆠迹. 略相先後. 知我者君. 慕君者我. 少得倚麻之益. 今有附驥之望. 敢不樂爲之志. -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한원부원군 이덕형 묘지(墓誌)」, 『백사집(白沙集)』 제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