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슴을 울리는 시 1 / 이종수 (시인)
시는 무엇보다 가슴을 울리는 시라야 한다.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시. 우리가 염원하는 것을 시로서 구현해 내는 것. 사람이 자연에서 나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가졌던 믿음을 실현하는 것이다.
미국 알래스카 원주민 유핏족의 말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육yuk이 있는데 그것이 소유를 뜻할 때는 유아 yua로 바뀐다고 한다.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생명이 있든 없든, 사람이건 동물이건 세상만물은 모두 유아를 가진다고 한다. 모든 것에는 그들만의 유아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들밥을 먹기 전 고시래를 하거나 노스님이 지팡이를 두들겨 발에 밟히는 목숨들에게 먼저 살 길을 만들어주었다는 말처럼.
그들은 고기와 기름 때문에 바다표범을 사냥하게 될 때는 바다표범의 유아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걸 준비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신선한 물을 떠먹여줘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그 표범의 유아가 다른 표범에게 돌아가 신선한 물을 준 데 대한 감사함의 표시로 유핏인들에게 계속해서 식량을 베풀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툰드라의 눈 속에서 나무 조각을 만났더라면 반드시 나무 조각 반대쪽이 공기와 빛을 받도록 돌려놓는다고 한다. 역시 나무에 깃들어 있던 유아가 그 사람에게 좋은 일로 되갚아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요즘 현실에서 왜 그러한 이야기들에 가슴이 먼저 느끼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살이 살과 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가령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든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든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 준다든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든지 이쪽 사람과 위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한다든지 아니 영원히 언제까지나 한다든지, 어찌됐든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참 좋은 일이다.
- 이선관,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다.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가슴과 가슴이 닿는 것이다.
어머님 처음으로 어머님한테 나약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가장 강인하고 가장 냉정하고 가장 눈물이 없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눈물이 많습니다만) 가장 착했든 제가 정말 어머님이 제 곁에 계셔준다면 어머님의 젖도 만져보고 싶고 어머님의 가슴팍에 파 묻고 한 번 실컷 울어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제 어깨가 무거워 옴을 느낍니다 저 녀석들의 엄마가 제 울타리에서 뛰쳐나간 지가 어언 3년째가 됩니다 그 동안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두 아이에게 엄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정이 많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가루비누를 만지는 파출부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스승이 되어야 하고 서투른 주방장이 되어야 합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침저녁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들 곁을 떠난 그 여자를 향해 씨발× 씨발× 하면서 미운 감정이 가실 줄 몰랐지만 그래도 그 미운 감정을 없애 보려고 동시를 써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 버리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주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고마운 마음이 일어나게 합니다. 어머니
- 이선관, <어머니 7>
어릴 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몸이 불편하고 말을 서툴렀던 시인이 어머니를 통해 아내와 자식을 만나는 것도 가슴과 가슴이 부딪쳐 만든 조화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고 두 아이를 거느린 아버지가 되어 어머니와 지난했던 살림살이를 떠올려보니 미운 감정을 삭히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준 것만으로 고맙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어머니에게서 배운 시가 아닐까.
마음 아직 지지 않았네
구석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새파란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는
1950년대 생 채송화
본적은 느티나무 두 그루 마주보며 늙어가는 내 고향마을
오빠 학비 보탠다고 코피 터지게 야근한다던 가발공장 미자 미싱을 돌리다 팔이 잘린 춘자 식모살이 가서는 이내 애 엄마가 되었다는 말순이 영등포라든가 동두천이라든가 눈물로 떠돌던 명자는 흑인 남자 손에 끌려 미국으로 갔다는데 이따금 비명을 질러대는 매미 소리에 거북이처럼 납작 엎드려 고개를 내밀 줄 모르는 고향 마을
어디에서 핀들 꽃이 아니랴
쩡쩡한 꽃으로 늙어가고 있겠지
1950년대 생 채송화 선연한 꽃
내 마음 아직 지지 않았네
- 권희돈, <채송화>
시민권을 가져 미국민(美國民) 이젠 아름다워진 美人인 누나야 오산 미군비행장 싸늘한 철조망 밖에서 가져갔던 고향 텃밭 한줌흙 굿바이 확인으로 뿌려놓고 돌아오던 날 말없이 가시는 아버지 등 뒤로 무수히 쏟아지는 달빛 뜨거운 눈물 보았다 당신 눈물로 피어나는 누나 닮은 달맞이꽃
달 지고 별마저 쉬는 날이면 바쁜 괭이질로 또 묻혀질 그래서 더욱 美人일 누나야 넘치는 그리움으로 달빛 고와 달맞이꽃 피어 밤길 열면 누나야 잘난 美人 허물 벗고 고향엘 와라 아버지 터지는 봇물 사랑으로 다시 필 달맞이꽃아
- 안경수, <달맞이꽃 2>
두 시에 나타난 누나들은 간호사로 독일에 가고 미군과 결혼해서 이민 가고, 동생과 식구들 먹여 살리러 서울로 부산으로 공장일 하러 갔던 이들이다. 양공주가 되어 미군부대로 흘러들어가기도 하면서 꼬박꼬박 월급을 고향땅으로 부치던 우리 시대의 채송화이자 잘난 미인일 수 없는 달맞이꽃들임을 안다. 붉은 동백이나 처녀꽃, 찔레꽃을을 보면 어찌 그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마음에 빚이자 꽃인 셈이다.
대흥동 옛집에서는 카톨릭 소녀의 삶을 사는 여자가 살고 있었지 누님들이 그 여자에게 세를 놓았다고 했네 누님들하고 종교가 틀린 여자인데 왜 그랬을까 의문이 있었지만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추억에 잠겨 있었네 어머니는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신명에게 기도하던 분이었지 딸 넷을 낳고 백일기도를 해서 아들인 나를 낳았네 옛 집은 어머니의 혼과 손길이 배어있는 집 카톨릭 소녀의 삶을 사는 여자는 자신이 성수聖水를 모시므로 어머니의 종교와 다르지 않다고 이상한 말을 했네 대문을 열고 원촌동 아파트로 귀가하려는데 어머님이 신명을 모시던 커다란 벽장이 큰 신전처럼 펼쳐지네 나는 울긋불긋한 신주와 촛대와 흰 꽃이 있는 제단 앞에 있네 꿈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정신세계에 갇혀 있는 아들임을 알았네
옛길이 지워졌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길을 보여주는 집 옛집은 어머니의 혼이 대모신大母神처럼 살아있는 집이었네 누님들이 세준 여자는 내 아니마였음을 나는 비로소 눈치채네 큰 현실의 삶을 살도록 꿈은 말하고 있으나 나는 작은 현실의 돈과 명예와 의식주의 불안에 갇혀 사네 눈이 침침해진 내 영혼이 미로 뒤에 숨은 옛 집을 찾아가면 나/전체가 꿈의 푸른 대문과 가죽나무 울타리를 펼쳐놓은 집 평상에 누운 내가 책을 보거나 불타는 구름을 보고 꿈을 꾸던 집 골목길과 벽돌담들이 꿈으로 돌아오라고 노래를 부르는 집 무巫의 세계에 갇혀 있는 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네 나는 수도원의 사제처럼 명상과 기도로 현실을 초월해야 하네 나는 지상의 시간에서 다른 시간의 환강을 보고 시를 쓰네 홀로그램처럼 펼쳐진 세계 혼과 내 아니마를 위해 시를 쓰네
- 김백겸, <시간이 황금벽지를 바른 집>
어머니들은 모두 신명을 모셨다. 지금은 장독대 없는 아파트, 냉장고 앞에서 천지신명에 덧붙여 하나님, 부처님까지 겹쳐 부르면서 치성이었다. 시인이란 천지신명을 다 풀어넣은 정화수에서 태어난 물의 부족인 셈이다. 꿈에서도 어머니의 정신세계와 스스로 터득한 무巫로써 시를 쓰는 것이리라. 시인이 명상과 기도로 세계 혼과 아니마(남성의 무의식에 살아있는 여성 요소, 고대 철학에서 생명, 사고의 원리가 되었던 영혼과 정신)를 불러내듯이 그 많은 시집의 헌시로 씌여진 어머니를 보라. 시간의 황금벽지를 바른 집의 대모신처럼 살아있는.
이것은 또 어떤가. 최근 구제역으로 살처분 된 짐승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의 가슴을 치는 것이 있다.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사연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어미소의 눈물과 죽음 앞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양자택일을 떠올렸을까. 이런 감정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최근 강원 횡성군 횡성읍의 한 농가에서 안락사 주사를 맞은 어미소가 숨지는 와중에서도 갓 태어난 새끼에게 끝까지 젖을 물리는 장면이 목격돼 살처분 현장에 있던 공무원 등 관계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당시 살처분에 참가한 축산전문가 A씨는 19일 현장에서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살처분을 맡은 공무원이 어미소를 안락사시키기 위해 근육이완제인 석시콜린을 주입하는 순간, 어린 송아지 한 마리가 다가와 젖을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소마다 이완제에 반응이 나타나는 시간이 다르지만 주사 후 대부분 10초에서 1분 사이 숨을 거두는데 이 어미소는 새끼에게 젖을 물린 채 2∼3분을 버티더니 젖을 뗀 뒤에야 털썩 쓰러졌던 것.
위 기사는 벌써 아이들 눈으로 바라본 시에도 그대로 담겨있다.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며 있는 그대로 표현했을 뿐인데 위 기사를 떠올리기라도 하듯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이가 먼저 지나친 감동을 해버려서 포장하려고 해서 되는 시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먼저 간절하게 감동해야 하는 것과 거짓감동으로 시적 긴장을 망쳐버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소가 차에 올라가지 않아서 소 장수 아저씨가 “이라.” 하며 꼬리를 감아 미신다. 엄마소는 새끼 놔 두고는 안 올라간다며 눈을 꼭 감고 뒤로 버틴다. 소 장수는 새끼를 풀어 와서 차에 실었다. 새끼가 올라가니 엄마소도 올라갔다. 그런데 그만 새끼소도 내려오지 않는다. 발을 묶어 내릴려고 해도 목을 맨 줄을 당겨도 엄마소 옆으로만 자꾸자꾸 파고 들어간다 결국 엄마소는 새끼만 보며 울고 간다.
- 경산 부림초 6학년 조동연, <팔려 가는 소>(1987.12.18)
소야, 몇 살이니? 그런 것 모른다. 고향은 어디니? 그것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 성은? 그런 것 그런 것도 모른다. 니를 낳을 때 어머니는 무슨 꿈 꿨니? 모른다 모른다. 형제는 몇이었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
소는 사람처럼 번거롭기가 싫다. 소는 사람처럼 따지는 게 싫다. 소는 사람처럼 등지는 게 싫다. 소는 들판이 사랑스럽고, 소는 하늘이 아름다웁고, 소는 모든 게 평화로웁고.
- 권정생, <소 3>
잘디잔 체험과 소소한 감흥을 재료로 시를 남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감동이 가시고 흔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시는 왜 이런 것에 마음이 움직여서 자화자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서울에서 이승하, 손옥자 시인이 내려 왔다
‘다심원’에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차를 마신다.
조금 뒤에 온 송경애 시인이 그릇 닦는 쑤세미 하나씩을 선물로 준다
오늘은 그릇도 닦고 마음도 닦으라는 날인가 보다
창밖에서 뻐꾸기 소리가 창틈을 밀고 들어와
내 마음을 엿듣고 있다
환한 대낮이다
- 이영춘, <차와 쑤세미>
선물로 받은 쑤세미로 마음을 닦는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듯 보이는 시다. 굳이 시인들 이름을 내세우고 차와 쑤세미와 환한 대낮을 바탕에 깔았지만 독자를 끌어들이는,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없다. 무엇이 간절한 것인지, 시를 읽는 이들을 감동시킬 만한 깊이가 없다.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갚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최승호, <북어>
새로운 세기일수록 강렬한 감동의 시가 필요하다고 했다. 상투적인 의미나 수사에 기대지 않고 밀도 있는 표현이 살려내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시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북어는 말하고 있다. 북어들마저 “너도 별 수 없지.” 하듯이 부르짖는 반전이야말로 우리들의 막대기 같은 생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을 대상으로 하든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바위이므로 할 말이 많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 벙어리의 길만 찾아 걷다가 여기까지 왔다 사람들의 속내를 다 보았으므로 눈 감고 귀 막아도 솔바람 소리에 얼핏 고개 돌리는 그대 모습 잘 보인다 높은 데서 하늘을 마주 보며 혼자 누워 있어도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나는 늘 마음에 걸린다 갑오년이던가 관군에 쫓기던 동학패가 산을 넘어 사라진 뒤 모두 잡혀 효수되었다는 소식을 소나기가 전해주었다 내 몸도 천둥처럼 찢어질 듯 떨었다 저녁 무렵 혼자 서서 지는 해 바라보던 혁명가도 소년 병사도 토벌대도 나무꾼도 경배자도 지금은 모두 사라져 산에 보태는 흙이 되었다 나는 밤새도록 검은 울음을 참느라 가슴에 큰 응어리가 생기고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단단한 살결로 남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 험하고 어렵지만 사람들은 퍼질러 앉아 쉬거나 노닥거릴 때 있으니 누군가는 웃고 떠들고 누군가는 한숨짓고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려도 내려가면 모두 언제 그랬냐 싶게 부지런히 살며 또 희망을 걸며 조금씩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알겠다 나는 모두 알아버렸으므로 나는 바위이므로 사람들이 남긴 숨결로 언제나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예민해져서 인기척에 자주 놀라지만 끝내 그대를 노려보거나 각을 세우지는 않는다
- 이성부, <마당바위>
산중턱에서 만나는 너럭바위나 마당바위에 앉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몇 번이고 쉬어가면서, 첩첩 산맥들을 내려다보며 마당바위의 속뜻을 읽었으리라. 역사의 현장을 보았고 그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받아주었던 ‘끝내 그대를 노려보거나 각을 세우지 않는’ 마당바위를 떠올리자면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두려운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저 멀리 알래스카 원주민 유핏인들이 고래 사냥을 하면서도 그 고래 한 마리 한 마리에도 혼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나 나뭇가지 하나라도 산목숨과 비할 데 없는 정기를 느끼고 경건하게 대한 믿음과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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