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수염의 사내와 정신없이 숲을 빠져온 나온 것은 새벽무렵이었다. 이른 새벽의 공기는 매우차갑다. 마치 태양이 뜨기전에 이 세계에 아침이 오기전에 마지막 모든 기운을 마저 발산하려고 하는 밤의 여왕의 욕심이 느껴진다. 우리는 한동안 말머리를 같이 몰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고요한 정적을 깬 것은 콧수염의 사내였다.
"어때 좋은 경험이었지?"
"................"
콧수염의 사내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휘파람까지 불렀다. 그러나 난 어제밤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 아비규환의 장을......그을려 얼굴마저 볼 수 없었던 시체들을.....떨어져 나간 팔을 찾으며 슬프게 울부짖던 날카로운 비명소리들을......
"카산드라라는 그 계집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리라 맹세했던 카산드라가 떠올랐다. 이런 불유쾌한 일이 모두 그 계집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집시여자가 죽일듯이 미웠다.
"그 계집 말인가? 그 계집은 여우야! 이미 눈치채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겠지....."
"만나면 반드시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게 언제가 됬던간에......"
우리는 한 동안 말없이 대로를 가로질러갔다. 대로라고 하지만 길이 보일정도의 구불구불한 산길이었다. 조금있으니 마을이 하나 보였는데 어제밤 잠을 통 못잤는지라 눈이라도 붙혀야 할 것 같았다.
"아쉽지만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기일안에 플랑드르에 도착해야 하거든요. 맞아! 그러고 보니 하도 정신이 없어서 서로간의 통성명도 미처 못했군요, 전 가스코뉴 출신의 자크라고 합니다."
"가스코뉴? 그 산골 촌동네 말인가? 하하 예전에 한번 거기 간적이 있었지, 난 여기사람이 아니야. 머나먼 북쪽나라 섬마을이 내 고향이지...... 그냥 콧수염 조라고 불린다네.... 난 보다시피 정처가 없이 떠도는 떠돌이야...... 여기저기 다니면서 온갖 잡일은 도맡아 하고 있지! 카산드라를 알게 된 것은 같이 일하던 친구가 그 계집과 함께 사라진 후 도무지 나타나지 않아서였어. 의심이 생겨 한동안 그 계집을 따라다녔지.......그렇지만 물증을 잡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젠 자네덕에 확실한 증거와 물증이 생겼으니 다시 만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일세."
콧수염의 조는 주먹을 불끈지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우리 친구할까요? 콧수염의 조?"
"친구......!.......?"
나의 의외의 제안에 한동안 조는 머뭇거리는 듯이 보였다.
"친구 말인가? 수도사인 자네랑?"
"어차피 갈때가 없다면 저랑 플랑드르에 가는 게 어때요. 실력을 보니 보통은 넘는 것 같던데......."
웬지 믿음이 가는 자였다. 친구란게 뭔가? 같이 통하면 친구요 믿음을 공유하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플랑드르에 가서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설마 자네와 같이 수도회에 들어가자는 것은 아닐테고 말이지....."
"전쟁에 함께 나가는 거죠, 보수는 아마 두둑할 겁니다"
조는 보수가 두둔하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내가 말일세 이미 목숨은 내놓은 거나 진배없으니 전쟁 따윈 무섭지 않다네, 허나 무엇을 위한 전쟁이며 누구랑 싸워야 하는지는 좀 알아야 할 것 같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조였다.
"이 전쟁은 사악한 이교도와의 전쟁입니다. 말을 듣자니 이교도들이 우리 기독교의 위대한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잔악하게도 그들은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가로막으며 때에 따라선 목숨을 빼앗기까지 한답니다. 바로 그들을 무찌르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내 말을 듣자 조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였으나 이윽고 두 팔을 높히 들어올린 후 양날도끼를 세차게 땅에 꽂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 전쟁이다! 하하하하 사악한 이교도와의 전쟁? 하하하 정말 멋진일이 되겠군!"
순진한 사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알고보니 기분이 좋으면 휘파람을 부는 것이 사내의 버릇이었다.
"우리 잠시 술집에 들려 요기나 한번하고 가세나! 그리고 오늘 밤엔 이 마을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플랑드르로 출발하세"
도착한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마을의 술집안에는 꿰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베이컨을 구워먹고 있는 가족들, 술에 취해 여주인의 풍만한 엉덩이에 손을 대려다 양푼으로 한껏 머리를 맞고 쓰러져 헛소리를 해대는 주정꾼들, 무용담을 잔뜩 늘어놓으며 연신 탁자를 탕탕치는 기사들의 무리....정말 시끌벅쩍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안쪽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봐 주인장! 우선 포도주 한 병이랑 잘 익은 고기 세 접시 얼른 가져오게"
콧수염의 조가 호쾌하게 주문을 했다. 조금 후에 여주인은 투털대며 나타나 식탁위에 음식을 마치 던지듯이 내놓았다. 뭐가 불만인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외상은 절대로 안돼! 얼마를 먹었든간에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해!"
"뭐야? 주인장....빌어먹을...... 술맛 떨어지게시리..... 여기 계신 수도사께서 술값은 다 내실테니깐 걱정 말고 좀 있다 주문이나 더 받으라고!"
조는 내가 돈이 많을 거라 생각했나보다 허나 사실 나 역시 돈이 없었다.
"친구가 된 기념일세 한잔 쭉 들이키라고! 하하하!"
"나 역시 친구가 생겨 기쁩니다"
피곤할 때 들어가는 술 한잔은 온몸을 사르르 녹여주기 마련이다. 게다가 화롯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런지 자꾸 졸음이 몰려왔다. 연거푸 들어가는 술 한잔이 쌓이고 쌓여 차츰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그런데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악! 저 좀 살려주세요!"
떠들석한 술집은 갑자기 정적이 감돌고 한 여자가 머리와 옷이 헝글어지고 풀어진 채 누군가에게 쫒기듯 허겁지겁 들어왔다. 이윽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털보사내가 들어왔는데 그 여자의 정부 혹은 남편인 듯했다.
"저 응큼한 돼지가 나를 욕보였어요!..........."
"이런 빌어먹을 년! 내가 도대체 어쨌다는 거냐? 넌 내 부인이야......그런데도 감히 남편을 거부해? 그러고도 니가 살 수 있을 거 같냐?"
"혼인서약도 안한 니가 무슨 남편인데? 제발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사라지란 말이야!"
보아하니 흔하디 흔한 연예싸움인 것 같았다. 대부분은 별거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다시 술집은 아까처럼 떠들썩해졌다. 그런데 취기가 오를대로 오른 문제?의 조는 아니었다. 웬지 안좋은 일이 생길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내 예감은 결국 적중했다. 조는 혀까 꼬일대로 꼬인 목소리로 그 털보남자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봐 털보! 여자가 너 싫다잖아....."
"........!......."
드디어 일은 터졌다. 거구의 털보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뚜벅뚜벅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조도 대단한 것이 분명했지만 털보는 너무나도 거구였다. 아까 무용담을 내려 놓던 기사들 역시 털보의 기세에 겁을 먹은 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마 이 일대에서는 그를 당할자가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술집은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해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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