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2-10. 자율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내 주변엔 사업가로서, 경영자로서, 신화에 가까운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 낸 분들이 꽤 있다. 그중 한 CEO가 사석에서 나에게 물었다.
“김 교수,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무엇일까?”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온갖 지식이 나왔다.
“미래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협동을 이끌어 내며 창조적인 것을 알아보고, 혁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고….”
상대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번지는 걸 보고 원하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런 것들이 리더의 요건이라 생각합니다.”라고 간신히 답변을 끝마쳤다.
그분은 다시 말했다.
“김 교수 공부 헛했네. 그런 사람들이야 주위에 많으니까 잘 쓰면 되지. 내 말은 현대 사회의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뭐냔 말일세.”
또 잘못 걸려들었구나, 라는 생각에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상대방이 먼저 답을 내놓았다.
“내가 없어도 일이 돌아가게 하는 능력, 그거 아닌가.”
띵 하고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워낙 잘 알고 지낸 분이신지라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분이 CEO로 있거나 리더를 맡게 되면 그 조직은 예전보다 더 빨리 퇴근하면서도 일이 잘 돌아가는 게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런 조직을 일컬어 ‘자율적 조직’이라고 부른다.
자율적 조직. 과거에는 그저 이상적인 개념이었을지 모른다.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만들기는 어려운 조직. 솔직히 자율적으로 일하는 게 무엇인지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원격근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원격으로 수업을 하고, 회사원들은 집에서 근무를 한다. 선생님이나 리더 입장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다. 공부를 하고 있는지 딴짓을 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도 없다. 새벽부터 일하는지 늦게까지 야근하는지 체크할 수도 없다. CCTV 달아서 보고 싶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실제로 많은 임원 분들이 스스로가 의심병 환자가 된 것 같다며 나에게 고충을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코로나 19는 기회다. 원격근무 환경은 자율적 조직을 만들기 위한 최고의 환경이니까.
모든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율적으로 일해야 한다. ‘자율성’이라는 요건이 강제적 필수 사항이 된 것이다. 조금 더 심하게 바꿔 말해 보겠다. 이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없는 조직은 망하는 시대가 왔다.
그렇다면 자율성은 대체 어떤 힘을 가질까? 그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춰 보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세계는 추축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었다. 추축국을 대표하는 일본군과 독일군은 최고의 군사력과 군기를 자랑했다. 병사들의 말과 행동은 절도 있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들은 국가와 상관에게 목숨을 걸고 모든 명령을 충성스럽게 이행했다.
연합국의 미군은 어땠을까? 군기만으로 따지자면 미군은 상대적으로 형편없었다. 텐트 쳐 놓고 깡통 밥 먹는 보이스카우트 같다고나 할까. 적군뿐 아니라 우방국인 영국군에게도 군대 같지 않은 군대라며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 전투에서는 미군이 제일 잘 싸웠다. 물량이나 장비로는 다른 군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기 없기로 유명한 미군에서 압도적인 승리가 연달아 이어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학자들은 그 비밀을 ‘자율성’에서 찾는다.
자율의 반대는 타율이다. 일본군과 독일군이 군기를 강조하고 상명하복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동안 병사들은 타율적으로 상급자의 명령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것이 지나치면 다른 부대와의 소통과 협동이 불가능해진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한다. 그런데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던 일본 해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기에 이른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요 정부와 육군 측도 실제 피해 소식을 한참 나중에 알게 될 정도였다. 실패를 덮기 위해 부상자들뿐 아니라 열심히 싸운 건강한 장병들을 전방으로 보냈고, 모든 통신을 단절시켰다. 그들 대부분은 냉대를 받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병종뿐 아니라 병과 간의 협동이 심각할 정도로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한 비참한 결과인 셈이다.
미군은 달랐다. 군기가 빠진 게 아니라 적당한 자율성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 덕에 병종 간, 병과 간 연결이 활발했고 변수에 대처할 수 있었다. 미군 병사들은 자신의 지휘관이 전투 중 사망하면 옆 부대 지휘관을 찾아가 대신 지휘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상륙 작전을 수행할 때 해병대나 보병이 적탄에 의해 쓰러지면 의무병도 아닌 공병까지 나서서 부상병들을 구출해 냈다. 그 공병이 쓰러지면 보병들이 잠시 소총을 놓고 가교나 부교를 놓는 작업을 도울 정도였다.
반대로 일본군이나 독일군은 자신의 지휘관이 사망하면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따라 자결하는 상황이 즐비했다. 멀쩡히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말도 안 되는 전투력 손실 아닌가.
이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가지는 자율적인 조직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를 벗어날 때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자율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일단은 작은 대화 습관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궁금한 것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회의나 업무 지시가 끝날 때쯤, 상사들이 주로 하는 말이 있다.
“알아들었지?”
“이해했지?”
이 상황에서 어떤 용기 있는 자가 “아뇨,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는데요?”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알아들었냐는 질문은 상대의 질문을 막는다. 그런데 미군의 지휘관들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질문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말이 끝난 후 상대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Am I clear?”
네가 이해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본인이 제대로 설명했는지를 묻는다. 말 그대로 조언을 얻는 화법이다. 이해를 했으면 한 대로, 못하면 못한 대로 상대는 있는 그대로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휘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언을 구하는 동시에 도움이 형성되고 질문은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퍼즐을 맞추듯 서로 부족한 부분을 맞춰 나간다. 그러면서 자율성과 협동성이 확보되고 결국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그다음은 연결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원격근무를 직장에서 하던 일을 온라인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수동적인 생각이다. 상사의 감시 없이 일뿐 아니라 관계까지 확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한국은 여전히 상명하복의 수직적 조직문화를 갖고 있으니 나와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는 상사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내가 앉아서 일하는 모습뿐 아니라, 업무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이 누군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료가 누군지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시선이 느슨해졌다. 비로소 회사 내 다른 부서, 다른 팀과 더욱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우리 부장님, 우리 상무님 눈치 보느라 만나지 못했던 타 조직, 심지어 더 먼 곳에 있는 다른 회사 사람과 만나는 것도 훨씬 더 쉬어진다. 감시가 느슨한 원격근무 덕에 다른 조직과의 협동까지 가능해진 상황이다.
미군은 군기와 절도가 느슨했지만 대신, 다른 부대와의 협동력이 강했다. 덕분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우리도 그동안 시간적 거리적 비용 때문에 못 만나던 사람들과 이 기회를 통해 연결성을 갖게 된다면 이후에 생길 변수에 창조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타율적인 환경에서는 굳이 창조성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해도 잘했다는 긍정적 착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물론 지시에 따라 타율적으로 하는 일은 양으로 측정하기 쉽다. 몇 개까지 했는지 몇 시간 했는지 평가는 용이하지만 일의 질이나 수준을 논하기엔 애매하다. 게다가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다 보면 새로운 일, 연결을 필요로 하는 일, 추상적인 일을 견디기 어렵다. 딱 떨어지지 않는 애매한 일에는 듣기만 해도 도전하기 싫어질 것이다.
그러나 측정조차 되지 않는 모호한 일이라도 어려움을 버티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뛰어난 인재가 아닐까. 그동안 직장에서 상사의 번뜩이는 감시 하에 하던 일만 해 왔다면 지금이야말로 모호하고 추상적인 일에 감히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나와 조직의 자율성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2장 ‘비대면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