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다해 11월11일 금요일.
[(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제1독서 요한 2서. 4-9
복음 루카 복음. 17,26-37
◈ [서울]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2022년 다해 11월11일 금.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하느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제게 길을 보여 주신
적이 많습니다. 몸이 조금 피곤하고, 지쳤을 때입니다. 일주일 전에
잡힌 약속을 취소하기 어려웠습니다. 신부님들과 전임
사목위원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루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일정을 취소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일 날 날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2020년의 코로나19는 신문사의 운영에도 커다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문 홍보는 신문사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데 전혀
홍보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신문의 광고도 도움이 되지만 예년에
비해서 광고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함께 지내는 사제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라면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습니다. 아직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경우도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인 성당이 생길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도와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겨울
여행을 가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고 합니다. 주말에 가면
가족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니 주말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중에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교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중에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고 하였습니다. 주일에는 본당 미사를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정은 본당 신부님의
몫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정을 하였고,
그 뒤로 본당의 봉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한인
공동체에 한국학교가 생겼고, 아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열정이 결실을 맺어서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 고등학교 교과에 채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신부님과 의견이 달라서 섭섭했지만 돌아보면 이민사회에서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 제게는 깊은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부부는 엄연히 ‘이심이체
(二心異體)’입니다. 단정하고 깔끔해서 좋았고, 자유롭고 편해서
좋았지만 결혼하면 깔끔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은 질서를 깨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몸을 가진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삶의
기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공동체는 부족함에도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가르침 따라 정신 차립시다.
2022년 다해 11월11일 금. 예수님가르침 따라 정신 차립시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30-37)”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장면들을 무섭던 과거 사건들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천재 전쟁 인재 각 사건들 겪어보니
이런 표현 실감합니다. 세상 끝날 개인에게나 집단 지역 조건들은
예측불허 상태일 것입니다.
요는 보고 느끼는 이 세상만이 전부 아니고 영원 세상이 있단
겁니다. 인생 짧게만 보지말고 영원까지라고 멀리 보고 살자는
게 신앙입니다. 신앙인이 아니어도 영원 무한이라는 단어를 곧잘
쓰는 게 예증입니다.
영원 세상이 이해 잘 안 된다면서 거부까지 그렇게 할 필요
없잖아요. 모두 일반 사람들처럼 지내지만 예수님 가르침 따라서
정신 차립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37)|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11월11일. 금.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잎들을 떨어뜨리는 11월의 나무들을 봅니다.불타올랐던
나뭇잎도 나무이며 나무가지도 나무입니다. 이것과 저것의
구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뿐 결국 하나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단 한 사람,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죽음까지 넘어서는 따뜻한 사랑이십니다.
무한히 열려져 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살려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 삶의 자리를 떠난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과 죽음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사람의 삶을
다시금 하느님 안에서 묵상하는 기도의 새로운 시간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겨 기념일|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2년 다해 12월11일 금. 오늘의 강론. 루카 17,26-37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방식과 장소에 대하여 다룹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여기서
노아의 방주와 롯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어서 롯의 아내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살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생명을 주다’, ‘탄생시키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드물게 사용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자신의
현세적 생명을 희생한 이들이 새로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다음,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설명이 덧붙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며 그것이
평범한 일상 가운데 긴박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일이 어디에서 이루어
질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며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는 듯해 보입니다.
전통적으로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구약의 심판 장면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 누구도 종말과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령 성월을 보내며 죽음과 종말,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오늘은 새로운
의미를 찾으며 희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서울 가톨릭 대 성신대 교수 김상우 바오로 신부
◈ [청주]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반 신부 복음묵상
2022년 다해 11월11일 금.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루카 17,26-37)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17,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이 있는 것은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 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지금은 참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은
없습니다. 올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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