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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생각은 사망,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롭고 많은지요!(왕하 3:1-20)
1. 오늘의 말씀 : 왕하 3:1-20
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14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18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9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20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오늘은 일본 홋가이도 CFNJ 성서학원 사역을 위해 출발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 싹이 나게 하고 소출을 거둡니다(사 55:10).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그의 기쁘신 뜻을 이루며 그가 보낸 일에 형통합니다(사 55:11). 생명의 말씀을 위탁받아 일본으로 떠나는 저희가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게 하소서. 생명의 결실을 사모하고 기도합니다. 봇물처럼 솟구치는 육신의 생각이 많으나 오직 주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내 몸을 쳐 복종시켜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이시여, 말씀을 조명하사 우둔한 자로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이스라엘의 북왕국 아합 왕이 죽고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아하시야는 불과 2년을 다스리고 죽었다.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어 아합의 다른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형제 여호람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히브리 이름으로 ‘여호람’은 ‘요람’으로도 불린다(왕하 8-9장에서는 ‘요람’으로 불림).
왕하 3:1-9:19은 여호람의 통치기를 기술한다. 대부분 내용은 선지자 엘리사의 활동이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 18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12년간 다스렸다(1절, BC. 852-841년). 2-3절은 여호람에 대한 신명기 사가의 평가이다.
“그는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그의 부모처럼 악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우상들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저지른 것과 같은 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도 못하였다”
여호람은 선왕 아합과 이세벨이 숭배한 바알 신앙을 척결하였다. 그러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제정한 유사 신앙은 답습하였다.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은 그가 죽은 지 80년이 넘은 이때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후 북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만큼 유사 신앙은 깊고 강고하다.
4-27절은 이스라엘이 모압을 징벌하는 전쟁 이야기다.
아합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봉신이었던 모압이 반역하였다(1:1).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동맹하여 모압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1-12절은 전쟁의 개시이고, 13-20절은 엘리사를 통해 신탁을 받는 장면이다. 21-27절은 모압이 패배하여 후퇴하는 장면이다.
모압 왕 메사는 양치기였는데, 이스라엘 왕에게 암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쳤다(4절). 4절에서 언급한 이스라엘 왕은 아합이다. 암양과 숫양의 엄청난 숫자는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철저히 굴복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이다(정중호). 그러다가 아합이 죽은 후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하였다(5절). 5절은 1:1의 병행구이다.
그때 여호람 왕은 사마리아로부터 행군하여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 전체를 점검한 후 출전하며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사절을 보내어 물었다(6절). 곧 모압 왕이 자기를 배반하였는데, 자기와 함께 모압을 치러 올라갈 것인지 물었다. 여호사밧은 흔쾌히 허락하였다. “물론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아닙니까? 나의 군대가 곧 임금의 군대이고, 나의 군마가 곧 임금의 군마가 아닙니까?”(7절).
여기 여호사밧이 여호람에게 한 표현은 전형적인 속국의 표현이다. 최근 학자들은 북왕국 오므리 때부터 브가히야까지(15:23) 140여 년간 남왕국 유다가 보다 강성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었다고 주장하였다(정중호).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과 여호사밧은 사돈 관계이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가 결혼하였다(왕하 8:18, 26). 전에 여호사밧은 아합이 아람 군대를 치며 동맹을 요구했을 때도 같은 말로 호응하였다(왕상 22:4).
여호람이 여호사밧에게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8절). 여호사밧은 에돔의 광야 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에돔 광야 길은 험한 사막 길이라서 물과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험난한 사막 길을 택한 것은 모압을 북쪽에서 공격하기보다 광야 길을 통해 남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함께 출정하였다(9절). 당시 에돔은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왕이 없었고 섭정 왕만 있었다(왕상 22:47). 이스라엘 왕이 출전하자 에돔의 섭정왕은 마땅히 동행하였다. 세 왕과 군사들이 동맹군이 되어 길을 돌아 행군한 지 7일 만에 군대와 가축들에게 마실 물이 바닥났다(9절).
이스라엘 왕이 탄식하며 외쳤다. “아, 큰일 났구나! 주님께서 우리 세 왕을 모압의 손에 넘겨 주시려고 불러내신 것이 아닌가!”(10절). 여호람 왕은 선왕 아합이 아람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죽은 것을 생생히 기억하였다. 이제 그도 같은 운명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에 이같이 외쳤다.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물을만 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지 물었다(11a절). 이것은 전에 아합이 아람 군대를 맞서 출전할 때 했던 것과 같은 물음이다(왕상 22:7).
그때 이스라엘 왕의 신하 가운데 하나가 엘리야의 시중을 들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있다고 말하였다(11b절). 그 신하는 엘리사를 가리켜 그가 특별한 선지자라기보다는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어주던 시종이라고 소개하였다(개역개정). 물을 부어주는 것은 지금도 아랍인들에게서는 종이 주인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인이 손님에게 행하는 존경의 표시이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엘리사를 여호와의 선지자로 믿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하였다(11c절). 이에 세 왕이 엘리사에게로 내려갔다(12절).
13-20절은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에 관해 엘리사가 받은 여호와의 신탁이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을 보자 거만하게 대하였다. 무슨 일로 내게 왔느냐고 하면서 아합과 이세벨의 선지자들에게나 가보라고 말하였다(13절).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 세 왕을 불러내셔 모압의 손에 넘겨주시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13b절).
확실히 이스라엘 왕은 이 전쟁에서 자기들이 패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여호사밧에 이어 엘리사 앞에도 동일하게 자기 생각을 말한다(10, 13절).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것은 엘리사에게 임한 신탁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 왕에 대한 엘리사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다만 그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되, 그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요람 왕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면박을 준다(14절).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과 엘리사의 중재자가 된다.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거문고 타는 사람이 와서 거문고를 타니 여호와의 권능이 엘리사에게 임하였다(15절). 엘리사는 예언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곡에 도랑을 많이 파라”(16절). 계속해서 두 번째 신탁이 주어진다. “너는 바람이 부는 것도 보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것도 보지 못하겠지만, 이 계곡은 물로 가득 찰 것이며, 너희와 너희의 가축과 짐승이 마시게 될 것이다”(17절).
어떻게 계곡의 도랑에 물이 찰 것인가? 게다가 두 번째 신탁은 비가 올 징조가 없다는데 어떻게 물이 계곡에 차는가? 20절을 보면, 에돔 쪽에서 물이 흘러와 계곡에 파놓은 도랑에 물이 가득 차게 된다(20절). 그런데 계곡에 물이 차는 이런 일은 여호와 보시기에 작은 일이다(18절). 여호와께서 모압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세 번째 신탁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당장의 필요는 물론 궁극적 필요를 채우신다.
이제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의 동맹군은 모압의 요새화된 모든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칠 것이다. 또 모든 좋은 나무를 쓰러뜨리며, 물이 솟는 모든 샘을 막을 것이며, 모든 옥토를 돌짝밭으로 만들 것이다(19절). 이렇듯 모압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정도로 황폐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짐승을 죽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계곡에 물이 차리라는 약속이 성취되었다. 그다음 날 아침 소제를 드릴 때 물이 에돔 쪽을 따라 흘러내려서 그 땅을 물로 가득 채웠다(20절).
여호람은 모압을 정벌하고자 출전하였다. 거기에 유다 왕과 에돔 왕이 동맹군이 되어 사기가 충전하였다. 그러나 7일간의 헹군 후 군사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바닥나자 여호람은 절망하였다. 그는 곤경에 처하여 여호와께서 세 왕을 모압의 손에 죽이기로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은 선왕 아합이 아람 군대에 넘겨져 죽임당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왕상 22장). 자기도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이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주의 생각은 여호람과 달랐다. 이전의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은 아합을 죽이기 위한 전쟁이었으나(왕상 22장), 이번 이스라엘과 모압과의 전쟁은 모압을 황폐화하기 위한 전쟁이다. 여호사밧이 개입하여 선지자에게 물은 결과 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선포된다. 바닥난 물은 채워질 것이고,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의 동맹군은 모압을 점령할 것이다.
인간은 곤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성숙도를 나타낸다. 특히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반응이 믿음의 척도를 보여준다. 여호람은 자기 생각대로 반응하며 ‘이제 죽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는 여호사밧에게도 엘리사에게도 요지부동하게 자기 생각을 내세웠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40년간 광야를 지났다. 그들은 거듭해서 곤경을 당했고 그로 인해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당연히 자기 생각대로 그러하였다. 애굽에서 나오면 자유와 풍요를 만끽할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은 척박한 광야의 삶이었다. 그들은 이런 생고생을 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느냐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들이 구원 이후 만사형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셨다.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신 8:2-3).
그리스도인은 애굽의 구원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다(롬 5:2). 그러나 그는 즉시로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 던져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는 도리어 환난을 자랑한다(롬 5:2-3).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도키모스)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도키모스는 믿음의 종결인 소망을 이룬다.
신불신 간에 사람이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해결책이 없으면 죽음을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사람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이다. 죽는 것이 해답인 이유는 죽으면 책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죽어서 책임을 벗겠다고 한다면, 살아서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데까지 질문이 연장되어야 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지속되는 환난, 그 책임은 끌어안고 사는 ‘인내’이다. 어떻게 인내하는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견디는 것이다(마 11:29). 그 ‘인내’가 ‘도키모스’를 이루고, 도키모스가 소망을 이룬다.
인내와 도키모스를 이루는 신앙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나 고통이나 환난에 대해 성숙하게 대처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고 완전하신 주의 생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며 가치이다. 우리를 향한 주의 생각은 보배로우며 셀 수 없이 무한하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139:17, 개역개정).
4. 나의 묵상
이번 한 주간은 깊은 시험의 시간이었다. 사실 오래 덮어두었던 문제들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지만,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시시로 고민하면서 헤아릴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람의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오만가지 생각인 것이 맞다. 그렇다고 딱히 해결된 것은 없다. 그나마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앙모하니 답답하거나 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법이 없는 고통 앞에 왜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는지 깊이 공감하였다. 나 하나 죽어 그 책임에서 벗어나면 만사가 해결될 듯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이고, 육신의 생각이고, 사망을 가져오는 생각이다. 해법을 위한 육신의 생각은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내는 바다와 같다. 차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오직 주의 생각이 붙들리기를 간구한다. 결국 내 생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내게 보배로운 주의 생각대로 되었다.
학교에서 성적은 시험으로 평가한다. 초등학생과 대학생의 시험은 난이도에 큰 차이가 있다. 내게 주어진 시험 역시 믿음의 성숙도를 평가한다.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여전히 해법을 찾는 나를 보며 실망한다. 주님이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으로 오신다. 환난은 해결이 아니라 인내하는 것이라고. 해결책에 대한 오만가지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난다. 내 영혼이 깃털처럼 가볍다. 오늘 일본 사역의 출발을 앞두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이다. 비와 눈이 그러하듯, 생명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기쁨으로 나아가고 즐거이 인도함 받기를 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모압 정벌에 나섭니다. 명분도 있고 유다와 에돔의 동맹군도 합세하여 의기양양 출전합니다. 그러나 7일 만에 물이 떨어져 곤경에 처합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추론합니다. 하나님이 세 왕을 모압에 넘겨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건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갇힌 자에게 엘리사를 통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도리어 모압을 황폐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여... 곤경에 처할 때 내 생각에 사로잡혀 심적 고통을 당하는 자입니다. 나를 향한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육신의 생각이 나를 주장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육신의 생각이 더러운 것을 솟구쳐내는 바다와 같이 많습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보다 내 생각을 앞세울 때마다 어둠 속에서 헤맸습니다.
아버지... 구원의 부요함만큼이니 환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자랑하는 것은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도키모스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시 오실 소망을 이루게 합니다. 환난은 해결이 아니라 인내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대부분 문제는 해결이 아니라 끌어안고 사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온유와 겸손의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고 인내하게 하소서. 도키모스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오늘 출발하는 일본 사역, 생명의 결실을 믿으며 기쁨으로 나아가며 즐거움으로 인도함 받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