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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지혜서의 시작 1,1-7>
1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2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3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4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5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6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7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 복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라.”
우리는 주로 자신의 죄를 부여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
(루카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형제들이 죄짓지 않도록 하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교정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카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사랑으로 꾸짖고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피해의식과 침해당한 아픔에 빠지면, 타인이 잘못하여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여기게 되고, 자신은 용서해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사실은 자신이 ‘먼저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신이 용서를 청했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먼저 용서를 청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는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사실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의 물량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 ‘순수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형제를 꾸짖더라도 사랑으로 꾸짖고,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라고 하시며,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주님!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의탁하지 못하고 신뢰를 두지 못해서입니다.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해서입니다.
제 믿음이 약하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쳐서입니다.
제 믿음이 흔들리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녀들을 향한 가스라이팅, 이젠 그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시고, 하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로서는 우리가 자아와 원죄의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사탄과 자아와 그로부터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타인을 죄짓게 만드는 일은 멈출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마치 자아와 사탄처럼 누군가를 똑같이 죄짓게 만든다면 사탄과 마귀가 영원히 벌 받게 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자아나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죄짓게 할까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고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조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는 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어느 연극에서 비롯된 말로 갖은 방법을 써서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자기 맘대로 조종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서 약을 먹입니다.
아내를 사랑해주는 척하다가도 자신이 감추어놓은 물건들을 아내가 옮겨놓았다며 아내가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얻어 그 집으로 이사 온 이유는 그 집 위층에 보석이 탐나 자신이 살해한 노부부가 있는데 그 노부부의 보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잣집 여자를 유혹하여 그 아랫집을 사고 밤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석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올라간 뒤 정확히 10분 뒤에 자신의 방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윗집에서 가스등을 켜면 다른 집들은 조금 어두워지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기 정확히 10분 전에 방은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15년 전 위층 노부부를 살해한 사람이 남편이고 남편이 자신까지 미친 여자로 만들어 보석만 찾으면 자신을 정신병원에 버려버리려고 한 것도 밝혀냅니다.
이렇듯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공범이 되게 만드는 에덴동산에서 ‘뱀’이 했던 것을 의미하는 현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잘잘못을 묻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와를 자기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죄를 짓게 하였다면 그냥 마귀요 사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심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자가 됨으로써 그냥 마귀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가정에서 어느 정도는 이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뱀의 역할을 하여 자녀들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녀들을 자신들과 같은 욕망을 추구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벼랑 끝, 상담』의 성적 때문에 조현병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항상 싸우는 사람이었고 아이가 7살 때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 죽으러 간다.”라고 말하며 나가버립니다.
아이는 불안하여 엄마에게 전화하였는데 엄마는 즐거운 목소리로 곧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엄마가 죽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찢어버리고는 그것밖에 못 하느냐며 눈물을 흘리고 웁니다.
아이는 엄마를 위해 왕따를 당해가면서 공부만 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신발 끈을 묶어주고 음식을 먹여주고 학교에 가는 것까지 모두 다 해 주며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분명 서울대 갈 아이라면 계속 부담을 줍니다.
길거리에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노동자 주제에!”라고 깔보는 말을 하고,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식으로 교육합니다.
성적 외에는 아이의 생활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하였습니다.
아이는 외고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집단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공부에 대한 공포감이 가중되어 결국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저녁 식사 때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너는 왜 이 모양이냐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숟가락을 놓고 말했습니다.
“성적이 밥 먹여줘요?”
“뭐?”
“성적이 밥 먹여주느냐고요?”
“너, 미쳤어? 지금 엄마한테 뭐라는 거야!”
엄마는 소리를 꽥 지르며 아들을 발로 찼습니다.
그 순간 머리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느낍니다.
“제기랄! 그만 좀 하라고! 이 미친 아줌마야!
넌 성적이 다냐? 성적만 좋으면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그는 식탁을 엎어버린 뒤 밥그릇을 벽에 던져버렸습니다.
밥그릇이 산산조각나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지호야, 왜 그래!”
아빠가 아들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빠에게도 욕을 했습니다.
“왜 그래? 너는 내가 왜 그러는 거 같아?
서울대? 서울대는 너도 못 간 주제에 왜 나보고 가라 말라야! 나쁜 놈아!”
부모는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착한 아이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실성한 것으로 여기고 부모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절에 감금시키다시피 하고 돈을 들여 그를 공부하게 감시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부모에게 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꼭 유명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힘으로 억누르는 히틀러를 존경하고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아르바이트 두 시간 하는 것도 남들보다 못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누가 아이를 죄짓게 만든 것일까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아이일까요, 아니면 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모일까요?
물론 그 부모도 그 부모에게 그렇게 성장하여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끊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맘대로 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유태인처럼 성인식을 치러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첫영성체입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로서 자녀를 형제로 대해줘야 합니다.
옆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와 동등한 인격체이고 더는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자유를 내 뜻대로 하려는 시도입니다.
뱀이 그랬고, 마귀가 그랬습니다.
이제 첫영성체를 했다면 아이 스스로 하느님과 성모님을 부모로 여기고 그분들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 맘대로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제 아버지가 하느님이고 제 어머니가 성모님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봉헌이 지금은 매우 힘들겠지만 나중에 위 예처럼 자녀에게 칼에 맞는 것보다 낫습니다.
위 자녀도 모두 죽이고 싶은 마음에 가방에 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부모에게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부모와 자녀 사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녀를 어렸을 때부터 성인으로 대해줌으로써 몇 년 흔들리고 올바른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7살 때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그때 술과 담배도 하며 화투만 치며 방학을 지냈지만 그렇게 저를 어른으로 대해주신 것이 부모님께 가장 큰 감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믿어주셨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졌고 아무 눈치 보지 않으며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들어 맷돌을 메고 바다로 가라앉는 게 나을뻔한 그 사례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음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거짓 명목으로 하느님 자녀를 나의 인생에 편입시키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첫영성체 이후에는 자녀의 자유를 건들면 절대 안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늘 새로운 시작 - 사랑과 인내, 노력과 훈련의 수행>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시편 139,24ㄴ)
사람 누구나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보람이자 행복은, 평생 공부는 무엇일까요?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 본래의 참 내가, 훌륭한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월 흘러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사람’ 하나뿐입니다.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람뿐입니다.
우리가 수도원에 온 목적도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단기간의 성취가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사랑과 인내, 노력과 훈련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 새삼스런 깨달음은 사람은 나름대로 그 고유의 천재성을, 성인의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재와 노력은 함께 갑니다.
천재를 이길 수 없는 것은 평생 전사로서, 평생 학인으로서 백절불굴의 탄력 좋은 노력과 훈련 때문입니다.
16년간 독일을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나라로 이끌었던 세계적 정치 지도자, 메르켈의 언젠가 인용했던 평전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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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앙겔라 메르켈에게 긴 정치 인생 동안 자신을 지탱해준 특성을 한 가지 꼽는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참을성이요!”
그는 대답하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프린터가 아니라 마라토너다.
그는 언젠가 역사책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노력했다(She tried)” 라고 답했다.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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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매력적인 아름다운 영혼, 앙겔라 메르켈입니다.
조정래 작가의 하루 12시간 이상씩 의자에 붙들어 맨 채 손으로 꾹꾹 눌러쓴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집필 자세도 감동입니다.
‘태백산맥’ 10권 200자 원고지 1만6500장, ‘아리랑’ 12권 2만장, ‘한강’ 10권 1만 5천장을 비롯한 10만 여장의 육필 원고 앞에 서면 말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감동적인 인터뷰 대목입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 것은 읽고 또 읽기 때문이다.
매일 맨손체조와 산책같은 가벼운 운동을 계속해서 피가 원활하게 돌게 한다.
매일 뭔가를 쓰는 것은 프로 스포츠 선수가 체력을 관리하는 것과 같다.
김연아도 손흥민도 그렇게 신들린 듯한 기량의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비결이 없다.
오직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집중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 그것을 성취했을 때 황홀감을 느낀다.
그 황홀감이 그 동안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킨다.
그 토대 위에 새로운 기운의 새싹이 파르파릇 돋아난다,
그 기운이 고통을 이겨나가게 한다.
그런 세월의 향기가 풍기는 우리의 삶이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인생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정신적-육체적 건강생활을 경작해야 한다.
인생은 경영이다.
나이는 육체가 먹는 횟수일 뿐이다.
나이들수록 정신은 명료하고 명징해질 필요가 있다.
내 부인 김초혜 시인은 저에게 가장 지성적인 대화자이고, 가장 슬기로운 충고자이자, 가장 열정적인 응원자다.
그러므로 김초혜를 영혼 육체를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대목 중 김초혜 대신 주님으로 바꿔도 저에겐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저에게 가장 지성적인 대화자이고, 가장 슬기로운 충고자이자, 가장 열정적인 응원자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혼 육체를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랑을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하고 겸손을 사랑하고 침묵을 사랑하고 인내를 사랑하고 믿음을 사랑하고 노력을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훈련을 사랑하고 용서를 사랑해야 합니다.
끝없는 사랑입니다.
지칠줄 모르는 사랑으로 모든 수행 덕목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노력과 훈련을 기울여야 합니다.
독일의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심지어,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며 희망의 노력과 훈련을 강조합니다.
어찌 희망뿐이겠습니까?
모든 수행 덕목에 필요로 하는 바, 한결같이 깨어 노력과 훈련에 힘쓰는 것입니다.
평생 노력하는 영적 훈련병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모든 수행의 동기이자 원천은 사랑입니다.
첫째,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의 수행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죄도 보고 배웁니다.
이웃을 죄짓게 하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죄인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둘째, 끊임없는 용서의 노력과 훈련의 수행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용서에 지치지 않도록 용서의 노력과 훈련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끊임없는 믿음의 노력과 훈련의 수행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청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믿음의 중요성을 환기시시키며 믿음의 노력과 훈련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 고무하고 격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중국의 고사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끊임없이 정의와 순수한 마음, 지혜, 거룩한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과 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금과옥조의 말씀들입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린다.
지혜는 다정한 영,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정성을 다한 노력과 훈련에 감천하신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삶의 자세와 그대로 통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우선적으로 지극한 노력과 훈련의 수행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고,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우리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우리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지혜 1,6ㄴ).
이처럼 노력의 훈련과 은총은 함께 갑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과 인내, 노력과 훈련의 수행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시며,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켜라.”
(필리 2,15.16)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용서와 믿음>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의 관계와 형제 사이의 관계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들려 주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 (루카 17,1)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카 17,3)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루카 17,5)
오늘 복음의 대목은 길지 않지만 세 가지 가르침의 모음집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서 두 가지는 사람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 가르침은 하느님과의 관계, 즉 믿음에 대한 것이지요.
앞서 두 가르침은 형제에 대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나의 그릇된 말과 표양이 작고 소박한 이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악에 떨어지게 할 수 있음을 주지시키시는 내용이고, 둘째는 형제의 오류나 타락에 무관심하지 말라는 촉구입니다.
형제의 행위를 교정하는 위치에 서게 된 이는 그 꾸짖음이 다양성에 대한 무지나 감정적 신경증적 폭발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의 죄를 꾸짖을 때 함부로 단죄하거나 모욕해서는 안 되며, 그가 회개하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언제든 용서를 건네야 하지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루카 17,5)
이미 제자단 안에서 생활하며 나름 공동생활의 고충을 겪고 있을 제자들이 형제간의 지침을 듣고 바로 예수님께 "믿음"을 청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복음적으로 잘 실천하려면 무엇보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연결이 필요함을 깨달은 건 아닐까 싶네요.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루카 17,6)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피조물 안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형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해 줍니다.
형제를 변화시키는 기적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는 있는 힘껏 믿음을 부여잡고 기다리면 됩니다.
그 형제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면 하느님께서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움직이지요.
제1독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들려줍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 1,1)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는 이들은 사람들에게는 정의를 펼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선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찾아야 하지요.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람 사이의 관계, 이 둘은 따로 굴러갈 수 없는 바퀴처럼 한 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세상의 통치자도 아니고 감히 형제를 꾸짖거나 용서할 위치도 아니라고 방심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아무리 약하고 부족하고 가난한 이라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제외되거나 형제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받은 이는 없으니까요.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지혜 1,7)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하느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영께서 우리의 앞과 뒤, 옆, 위와 아래, 안과 밖을 가득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음을 아는 이는 사람을 다르게 대할 수 없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람과는 또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듯 누군가를 일으키고 피어나게 하는 존재였으면 좋겠습니다.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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