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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와 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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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임금의 낮 공부인 주강(晝講)을 마치고 성종이 경연관인 이승소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이승소는 예조 판서를 지내고 신숙주와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한 성종 대의 대표적 문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금속활자를 만들어 각종 서적을 인쇄하였는데, 기전체(紀傳體) 역사서 가운데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전한서』만 인쇄하여 배포하였을 뿐 『후한서』를 비롯한 후대 역사서들은 미처 인쇄하지 못한 탓에 궁중 도서관인 비각(秘閣)에만 겨우 소장되어 있을 뿐 민간에서는 구해 보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나머지 역사서도 인쇄하여 널리 배포해 줄 것을 성종에게 건의한 것이다.
당시에는 서적을 인쇄할 때 1434년에 세종이 만든 갑인자(甲寅字)와 1455년에 세조가 만든 을해자(乙亥字)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 두 활자 사이에 경오자(庚午字)가 잠시 사용된 적이 있었다. 경오자를 만든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김영견의 답변대로라면 인쇄기술 면에서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경오자는 문종 즉위한 해인 1450년에 문종의 둘째 아우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삼아 만든 활자이다. 안평대군은 원나라 조맹부의 송설체에 뛰어나 명나라 황제로부터 칭찬받을 정도로 당대 명필이다. 하지만 이 경오자는 주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평대군과 비극을 함께 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 왼쪽 : 경오자로 인쇄한 신편산학계몽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살해하고 곧바로 안평대군을 반역죄로 몰아 강화도 옆 교동도(喬桐島)로 귀양 보내 죽음을 내린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안평대군의 글씨로 만든 이 경오자마저 도가니에 넣어 녹여버렸다. 활자가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경오자로 찍은 책을 접할 때마다 자기가 죽인 안평대군의 얼굴이 떠오를 터이니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인지도 모른다.
세조는 이때 녹인 구리를 가지고 다시 새 활자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1455년에 만든 을해자이다. 이번에 자본을 쓴 이는 강희안(姜希顏). 그 역시 당대의 명필로 글씨뿐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또한, 그 아우 강희맹(姜希孟)과 함께 세조가 왕이 되는 데 공이 있다 하여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봉해진 인물이다.
경오자는 수명이 겨우 5년밖에 되지 않는다. 수양대군의 집권이 1453년임을 감안하면 그나마 실제 사용된 것은 3년에 불과하다. 반면에 을해자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불경을 비롯해 수많은 책을 인쇄하며 장수를 누린 활자가 되었다. 안평대군은 경오자를 만들 당시 문종을 보좌하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강희안은 세조의 공신으로 있으면서 을해자의 자본을 썼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문화는 함께 하는 것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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