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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거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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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내며 점점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은 자신을 해체한다.” 그는 한때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용어가 가능하다면 텍스트론을 거미학(hyphologie, 그리스어 어원인 히포스(hyphos)는 직물, 거미줄을 뜻한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책의 권력자이자 창조주로서의 저자라는 개념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필사자, 편찬자, 주석자와 같은 다양한 기능을 하는, 다시 말해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정신(鼎新)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텍스트 역시 독창성의 가치에 예속되지 않았다.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실린 많은 시에 대한 세주(細注)를 전재하여 편집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보라. '인용부호를 붙이지 않은 인용'으로 채워져 있음에도 이유원의 저자성에 대한 권위가 도전받지 않았던 점과 맥락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거미줄 같은 텍스트뿐만 아니라 주석, 해석, 논평, 번역, 편집 등 또 다른 텍스트를 더하여 만들어진 우리 옛 책의 다양한 유형을 편집하는 방식 속에 그 거미줄을 뽑아내는 저자는 어디에 놓이는가?
옛 책, 특히 문집을 간인(刊印), 필사하면서 저편자(著編者)를 생략하는 일은 우리 서책 간행의 한 특징이라 할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고전소설에서 무기명(無記名) 현상이 전통 시대 소설에 대한 비속 관념에서 온 것인데 반해, 저자의 부재 혹은 저자 미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생문집(生文集 저자 생전에 내는 문집)을 간행하던 전통과는 달리 저자 사후 문집이 정리, 편찬되면서 죽은 이나 손윗사람의 이름 부르기를 피하여 휘(諱)하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대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호칭이라 할 수 있는 호(號)를 사용하는 문집명의 경우 그 저자를 확인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독자층을 상정했을 때 가능한 가설이다. 문집은 저작권을 갖고 시장에서 상품으로 존재하지 않고, 혈연과 지연, 학연을 통한 문집 간행과 반질(頒帙: 문집 배포)이 이뤄지던 출판 과정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간혹 장정(裝幀) 과정에서 표제면이나 이제면(裏題面)에 첨기되는 저자 표지가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문집 안에 서발(序跋)이나 세계도(世系圖), 묘도문자, 연보(年譜) 등을 통해 얻어지는 전기 자료는 저자에 대한 부차적 정보원으로 기능한다. 그렇지 않다면, 가령 『형설기문(螢雪記聞)』의 저자를 텍스트 안에 기록된 인적 관계망을 재구하여 이극성(李克誠)이라는 인물을 확인하거나, 다시 『형설기문』에 언급한 필기 목록에서 『속복수전서(續福壽全書)』의 저자인 정의신(丁宜愼)을 찾아내야 한다.
근일에 문집을 간행하는 자가 첫머리 권에 남의 서문이나 발문을 받아서 싣지 않고 혹은 첫 장 옆에 모관(某貫) 모(某)의 저술이라고도 쓰지 않으니 40~50년이 지난 뒤에 이 문집을 보는 자는 누구의 글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어찌 불후(不朽)의 계획을 위하여 문집을 간행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마음인가. 모두 무명씨(無名氏)가 됨을 감수(甘受)할 뿐이다. 『손곡집(蓀谷集)』 같은 것도 중국에 흘러들어 갔는데, 중국 사람이 다만 손곡인 것만 알고, 이달(李達)인 것은 알지 못하여 그 시(詩)를 무명씨(無名氏)에 넣었으니 이것이 고루한 폐단이다.
이덕무가 지적한 대로 조선에서는 책에 저자 표기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청장관전서』에서 ‘완산(完山) 이덕무(李德懋) 무관(懋官) 저(著), 남(男) 광규(光葵) 봉고(奉杲) 편집(編輯), 덕수(德水) 이완수(李畹秀) 혜린(蕙隣) 교정(校訂)’이라는 저편자를 상세히 표기한 것도 이와 같은 비판적 인식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덕무는 연암 박지원의 문장 10편을 뽑은 『종북소선(鐘北小選)』에서는 ‘좌소산인(左蘇山人) 저(著), 인수옥(因樹屋) 비(批), 매탕(槑宕) 평열(評閱)’이라고 저자 표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호를 통한 기명(記名) 방식은 어쩌면 동호인 간의 폐쇄적 문학 유희에서 온 것으로 서책의 공공성보다는 사적 취향에 가까운 저술 형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옛 책의 저자 표기 방식은 일반적으로 권수제(卷首題) 하단, 또는 다음 행 하단에 본관, 이름, 자, 저술 역할 등으로 구성되어 놓인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는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 최치원(崔致遠) 찬(撰)’이라는 저자 표기가 있지만, 조선 초에는 원저자를 기록하기보다는 편자(編者)를 기술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와의 관계, 관직, 이름으로 기술된다. 이는 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세계(世系), 연보, 소전(小傳) 등을 문집 권수에 배치한 조선 초 문집의 편집 방식과 관련이 깊다. 『동명집(東溟集)』에 ‘일선(一善) 김세렴(金世濂) 도원(道源) 저(著)’와 같은 명기는 조선 중기 이후 전형적인 저자 표기 방식의 하나이며, 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전기(傳記) 성격의 글도 권말(卷末)에 부록(附錄)으로 엮여 편집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한편 조선 후기 연행(燕行)을 통한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서책 문화의 변모 양상도 문집 편집 방식에서 저자 표시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를 짜는 방식, 즉 저술 성격은 저(著), 찬(撰), 찬(纂), 집(輯), 술(述), 편(編), 초(抄), 선(選), 정(訂), 학(學), 설(說), 소(疏), 주(注) 등으로 기술된다. 우리는 여전히 저작, 편술, 초찬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형태의 거미줄처럼 짜인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독점적 근원이자 해석의 목표로 여겨지는 저자가 건네주는 의미 속에서 텍스트를 독해하려 한다. ‘시는 저자의 뜻을 말한 것이다[詩言志]’라는 오랜 전통 속에서 시를 읽듯 책을 읽고 있다. 따라서 여전히 텍스트의 기원과 기능을 저자에서 찾고 텍스트는 그 저자 정신의 인화지로써 작용한다. 사상과 감정의 원천인 저자, 그 뜻을 담은 텍스트, 그 뜻을 정확히 찾아야 하는 독자라는 이 신성한 삼위일체를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거미학은 저자가 갖고 있던 권능을 독자에게 열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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