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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四聖諦) 핵심정리》20230227
이 글은 불교 이야기보다 수행 이야기가 먼저라 경허집은 다음 주로 미루고 오늘은 사성제(四聖諦)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요.
상담 중에 오래도록 수행을 하신 분들도 아직 사성제에 관한 이해를 잘 못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인데요.
사성제를 모르고 수행을 하시면 자동차 바퀴가 헛돌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하셔도 그 자리에서만 맴맴 돌 수 박에 없답니다.
(이런 분들이 아주 많음)
사성제는 부처님이 수행하셨던 방법이고 너무도 간단하게 요약해 두셨는데요.
후대 사람들이 경허선사 말씀대로 이것을 절반만 이해하고 있고, 자꾸 이런 저런 살들을 붙여 놔서 지금 사람들은 헷갈리게 수행을 하시고 계시는 분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깨닫는 사람들이 안 나오는 것이고요..
♡
《사성제(四聖諦) 핵심정리》
사성제(四聖諦)의 원리는 글자 그대로 한문을 해석하면 되는데요.
사성제(四聖諦)의 본뜻은
"네가지(四)를 살펴봄(諦)
으로 해서 성인(聖)이 된다"라는 뜻이랍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살펴보는 거랍니다.
다른 말로 알아차려 보라는 것입니다.
줄여서 [알아차림]이라 하는 것이고요.
수행은 거창한 게 아니랍니다.
그냥 내가 내 마음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을 조사선(祖師禪)이라 한다면
내가 나를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을 위파사나라 한답니다.
화두를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을 간화선이라 하고요.
여기서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을 "보다"라고 표현을 할 수도 있겠지요.
수행은 그냥 내 마음을 보는 거랍니다.
수행은 그냥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거랍니다.
수행은 그냥 화두를 궁금해하면서 보는 거랍니다.
그래서 간화선(看話禪)입니다.
이 중에 잘 되는 쪽으로 알아차려보라는 것이고요. (※)
수행은 그냥 살펴보는 거랍니다.
처음에는 이 외에는 할 게 없답니다.
화두를 보든, 내 마음을 보든, 나를 보든 보는 거랍니다.
깨닫기 전에 할 일은 이것밖에 없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려면 의식이 깨어서 보라는 것이고요.
이것이 다랍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계속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는 언제 어디서든 내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숙달돼 있어야 제대로 된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답니다.
이것이 안 되어 있으면, 하다 말다 하면 매일 그 자리에서만 돌고 있는 것이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무언가 들어왔을 땐 반드시 알아차려야 한답니다.
화든 욕심이든 즐거움이든 무엇이든 100% 놓치지 않고 자동으로 알아차려졌을 때 사성제가 제대로 먹힌답니다.
부처님은 이 상태를 [알아차림의 확립]이라고 표현하셨답니다.
자랑 같지만 제 경우는 언제 어디서든 아주 미세한 것들까지 올라오면 놓치지 않고 100% 제 마음을 알아차린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들의 소중한 마음인데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답니다.
그래서 잡스러운 것들이 마음에 쌓여만 가는 것이고요.
화가 나도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무척 많답니다.
즐거워도 자신이 왜 즐거운지 모르는 사람들도 무척 많고요.
그냥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즐거우면 즐거워하는 거랍니다.
수행은 "아?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랍니다.
수행은 "아? 내가 즐거워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랍니다.
이것이 안 되어 있으면 사성제를 아무리 가르쳐 줘도 소화를 못한답니다.
그래서 저도 계속 여러분들에게 "현재 이 순간 의식이 깨어서 알아차리라" 하는 것이고요.
현재 이 순간 나를 알아차리느냐? 아니냐? 가 세존과 여러분들의 차이랍니다.
♡
이렇게 살펴보고 알아차리는 것을 네 가지로 체계화 시킨 것이 사성제(四聖諦)랍니다.
여기서 네 가지란
①고제(苦諦), ②집제(集諦), ③멸제(滅諦), ④도제(道諦)를 말하는 건데요.
이것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글자 그대로만 해석하시면 된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諦) 자는 [살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알아차림] 또는 [보다]라는 뜻이고요.
★
(1) 첫 번째인 고제(苦諦)는 나의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 등을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셨답니다.
[통곡과 울음 비탄, 깊은 통곡 깊은 비탄, 깊은 통곡과 깊은 비탄 등 이런저런 마음의 상태가 따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라고요.
살다 보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고통스럽고 아플 때가 많잖아요.
이러한 마음들을 알아차리고 살펴보라는 뜻이랍니다.
제 경우는 전부 다 알아차리고 있는 경우이고요.
★
(2) 두 번째인 집제(集諦)는 여기서 말하는 집(集)은 (집합)(집결) 같은 [모이다] [모여있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셨답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욕망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어디에서 자리 잡는가? ~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는 어디에나 유혹적이며 즐거운 것이다. 거기서 이 욕망은 일어나고 거기서 이 욕망은 자리 잡는다.] 고요..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끝에..
[욕망은 자리 잡는다.]랍니다.
내 마음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욕망뿐 아니라 수많은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과 즐거움 등이 모여있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 나쁜 것 할 것 없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많은 것들이 모여서 딱딱하게 굳어서 뭉쳐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여있는 것들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 등이 따르는 것이고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서 뭉쳐있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버리기가 불가능한 것이랍니다.
거기다가 우리들은 마음에는 탐착(貪着)과 집착(執着)과 애착(愛着)까지 착 달라붙어 있으니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버릴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착(着)이란 "붙어있다" 란 뜻인데요.
이렇게 껌딱지처럼 마음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들 때문에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버릴 수 있을까요?
그뿐인가요?
우리들 마음에는 아집(我執), 고집(固執), 집착(執着) 등의 마음들도 완전히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버리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執)이란 "잡고 있다" 란 뜻이거든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스스로가 이러한 것들을 잡고 있다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내 마음에는 모아둔 것들도 많고, 착 달라붙어 있는 것들도 많고, 거기다가 스스로가 잡고 있기까지 하니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버릴 수가 있을까요?
마음에 깃발이 펄럭이는 깃대들처럼 꼿꼿하게 뿌리박혀 있는 것들을 어떻게 뽑아버리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것들을 강제로 꺾어야 하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꺾이지 않으면 도저히 뽑아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을 걲는 모양을 선문(禪門)에서는 깃대를 비유해 [깃대를 꺾어라]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이 뜻은 우리들 마음을 수행을 통해 꺾으란 뜻이랍니다.
그리고 그 깃대 위에서 펄럭이고 있는 깃발은 우리들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요.
사람들 마음이 자꾸 깃발처럼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탐착(貪着)과 집착(執着)과 애착(愛着) 아집(我執)과 고집(固執) 등이 우리들 마음에는 나도 모르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거랍니다.
자꾸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거랍니다.
이렇게 우리들 마음에는 그동안 저장해둔 것들 때문에..
"이럴까? 말까?"
"갈까? 말까?"
"줄까? 말까?"
"할까? 말까?"
하는 마음들이 깃대 위에 매달려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정견]을 할 수가 있고? [정어]를 할 수 있고? [정사유] 같은 [팔정도]를 할 수가 있을까요?
하물며 어떻게 "줄까? 말까?" 하는 마음으로 [육바라밀] 같은 것을 행 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도성제]는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하는 거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마음속에 깃대처럼 뿌리박혀 있는 것들을 꺾을 수 있을까요?
깃대만 꺾어서 없애버리면 깃발은 자연히 펄럭이지 않겠지요?
내 마음의 것들만 꺾어서 없애버리면 마음도 왔다 갔다 하지 않겠지요.
내 마음을 꺾는 방법이 바로 [수행]이랍니다.
내 마음을 자꾸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거든요.
그리고 저처럼 일상생활을 통해 마음이 자동으로 꺾이는 경우도 아주 많답니다.
이것을 못 알아차려서 그렇지요.
내 마음이 꺾이면 기분 나쁘게만 생각하시잖아요?
알아차리지는 못하고요?
저는 다행히 그때 마침 반야심경을 해석하고 있을 때라 따라 하다가 운 좋게 마음의 것들을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이고요.
그래서 제가 저는 얼떨결에 된 경우라고 하는 거랍니다.
★
(3) 세 번째인 멸제(滅諦)는 이렇게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 등이 모여있는 것을 내려놓고 버리라는 것이 멸제(滅諦)라 하는데요.
쉽게 말해 마음을 비우고 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이란 고귀한 진리 멸성제(滅聖諦) 인가? 그것은 바로 이 욕망의 완전한 소멸이며, 버림이고, 포기이며,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초연함이다.]
라고요.
쉽게 말해 위에서 말한 마음의 깃대들을 뽑아 없애란 뜻인데요.
그러나 이것이 말이 쉽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니? 일반 사람들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알려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위에서 말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꺾어야 한답니다.
손오공이 마음의 요괴들과 싸워 힘으로 꺾어서 밖으로 내쫓듯이 말이지요.
이 그림이 바로 멸성제를 표현한 내용이랍니다.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 뒤에 보충 설명에서 따로 자세히 설명드려보겠습니다.
(4) 네 번째인 도제(道諦)는 멸제를 이룬 후 팔정도와 육바라밀 등을 통해 후 공부를 하는 건데요.
이것은 지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마십시오.
지금은 [고제]와 [집제]에만 집중하십시오.
이런 것에 의식을 둘 시간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고제]와 [집제]에 집중을 하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셔야 할 점은 요즘 가르치는 위치에 계시는 분들이 사성제를 제대로 이해를 못 하다 보니까..
도성제 안에 있는 팔정도와 육바라밀 등으로 초보자분들이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인데요.
이런 가르침들은 사성제를 경허선사 말씀대로 절반밖에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아직 깨닫지도 못한 분들에게 정견을 하라하고, 정사유 등을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가 있을까요?
팔정도나 육바라밀 등을 잘 해내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인데요..
팔정도나 육바라밀 등은 최소한 깨닫고 증득을 한 후에 하는 후 공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랍니다.
이 말은 팔정도나 육바라밀 등은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지, 일반 사람들에게 하라는 수행이 아니랍니다.
아직 도력(마음의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것들을 하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가르침들은 괜히 보시나 열심히 해달라는 이야기뿐이 안된답니다.
자꾸 가르치는 위치에 계시는 분들이 대중들에게 보시를 많이 해야 극락에 갈수 있다느니? 공덕을 지을 수 있다느니? 하며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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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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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설명)
모든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꺾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증득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탐착(貪着)과 집착(執着)과 애착(愛着)과 아집(我執)과 고집(固執) 등을 마음에 강하게 뿌리박혀 있는 한 아무리 부처님이라 해도 마음을 비우고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내 마음을 잡고 있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비우고 버릴 수가 있겠어요?
,,
그럼 어떻게 마음이 꺾을 수 있느냐?
하면요.
방법은 두 가지랍니다.
하나는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꺾을 수 있는데요.
수행은 크게 깨닫기 전의 수행이 있고 깨닫고 나서의 수행이 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닫기 전의 수행은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따를 수 박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직접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쭈그리고 앉아서 몇 시간에서 몇십 시간씩 많게는 며칠 몇 달을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있으면 그것 자체가 고통 아닐까요?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지요?
이렇게 깨닫기 전의 수행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거랍니다.
그래야 괴로움과 고통을 알아차릴 수가 있거든요.
이것이 위에서 말한 고제(苦諦)랍니다.
간화선(看話禪)으로 하면 간화(看話)인 것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과 고통이 내 마음에 모일 때로 모여서 단단하게 뭉쳐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때가 위에서 말한 집제(集諦)랍니다.
간화선으로 하면 의단(疑團)인 것이고요.
그리고 이렇게 모여있을 때 더 이상은 이렇게 모여있는 것을 마음에 들고 있을 수 없을 지경까지 갔을 때 이때 내려놓고 버리는 것을 멸제(滅諦)라 한답니다.
간화선으로 하면 화두타파(話頭打破)인 것이고요.
화두타파란 화두를 버리란 뜻인데 화두를 버리는 방법을 모르는 수행자들이 또 아주 많답니다.
그러니 화두만 들고 있을 뿐이지 깨닫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고요.
,,
그러나 깨닫고 본성을 알고 수행을 하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에 즐겁게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답니다.
깨닫기 전에는 깜깜한 절벽을 앞에 놓고 수행을 하는 격이라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고요.
그러나 이것이 고통이 많을수록 빠를 수 박에 없는 것이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고제(苦諦)는 고통을 살펴보라는 뜻이거든요.
마찬가지랍니다.
깨닫기 전의 수행은 일부러 고통을 유도하는 것이 수행의 일환이랍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마음을 꺾을 수 있거든요.
고통이 따르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탐착(貪着)과 집착(執着)과 애착(愛着) 아집(我執)과 고집(固執) 등은 내려놓고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고통인 줄을 모르고 있거든요?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잘 이해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좌선을 하면서 수많은 망상과 번뇌가 들끓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다리는 저려오고 경허스님처럼 졸음은 쏟아지고 그것들을 쫓아내려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쑤셔대고 있는 상황인데도 왜 그러고 있겠어요?
이것도 집착 아닌가요?
오기와 집착이 마음에 모여들지 않겠어요?
마치 쥐덧을 쳐 놓은 것처럼요?
감(感)이 잡히시나요?
또 탐착은요?
또 애착은요?
또 아집은요?
또 고집은요?
모두 다 마음으로 몰려들지 않겠어요?
마치 손오공이 그물을 쳐놓고 요괴들을 한꺼번에 때려잡으려는 것처럼 말이에요?
어떻게 내 마음의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내 쫓을 수가 있겠어요?
부처님 말씀대로 바로 이 상태가..
[통곡과 울음 비탄, 깊은 통곡 깊은 비탄, 깊은 통곡과 깊은 비탄 등 이런저런 마음의 상태가 따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가 아닐까요?
간화선 같은 경우는 화두에 꽉 막혀서 수십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가 고통이 아닐까요?
이러한 고통을 참으면서 왜 내려놓지를 못하겠어요?
이것도 집착 아닌가요?
이것도 탐착 아닌가요?
이것도 애착 아닌가요?
이것도 아집 아닌가요?
이것도 고집(固執) 아닌가요?
부처님 말씀대로 바로 이 상태가..
[통곡과 울음 비탄, 깊은 통곡 깊은 비탄, 깊은 통곡과 깊은 비탄 등 이런저런 마음의 상태가 따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가 아닐까요?
이때 경허선사처럼..
몇 달을 배고프고 졸리고 온몸은 쑤셔오고 화두는 잘 안 잡히고 했을 때 경허선사의 마음을 여러분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셨나요?
아마 모르기는 해도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은 들지 않았겠어요?
"아이고.. 견성이고 뭐고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 다 내려놓고 밥 먹고 잠이나 자러 가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경허스님도 사람인데요?
이럴 때 마침 한 아이가 와서 [콧구멍 없는 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소리를 들은 경허스님은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경허스님의 당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한답니다.
왜냐하면 소는 코로 숨을 쉬는데 콧구멍이 없어 봐요? 그 소가 어떻게 살겠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는지요?
지금 경허스님도 콧구멍 없는 소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헐떡거리면서 죽을 지경인 것이지요?
바로 이때 코가 숨을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를 뚫어야 하지 않겠어요?
화두 타파를 하는 것처럼요?
그럼 경허스님은 어떻게 해서 코를 뚫어야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마음에 들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버려야 살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 경허스님은 여사미거마사도래(驢事未去馬事到來) 라는 화두에 꽉 막혀서 꼼짝 달싹을 못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 화두를 풀고자 하는..
탐착(貪着)과 집착(執着)과 애착(愛着)과 아집(我執)과 고집(固執) 등으로 인해 부처님 말씀대로 경허스님도..
[통곡과 울음 비탄, 깊은 통곡 깊은 비탄, 깊은 통곡과 깊은 비탄 등 이런저런 마음의 상태가 따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등에 휩싸여 있는 상태가 아니겠어요?
그럼 이런 상태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화두랍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것들도 같이 화두와 함게 버리는 것이랍니다.
이것이 [화투타파]의 묘미이고 [간화선]의 묘미인 것이고요.
무조건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원리를 모르고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랍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배우는 사람들이나 정확히 알고 하시는 분들이 없어요?
지금 저의 이 이야기를 많은 수행자분들에게 복사해서 돌려보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처님의 수행 원리는 아주 간단하답니다.
① 고통을 알아차려라 → ② 뭉쳐있는 고통을 알아차려라 → ③ 힘들면 버려라 → ④ 그러면 도성제로 들어갈 수 있다.
입니다.
이해가 가셨나요?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요?^^
언제든 저에게 문자나 메일을 주십시오.
e-mail : 119e@daum.net
그러면 성실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
,,
그리고 일상생활을 통해 내 마음이 꺾이는 경우도 많이 있답니다.
살다 보면 내 마음이 꺾이기 싫어도 꺾이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동안의 그 마음은 이주 많이 꺾여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을 받는 순간은 완전히 마음이 꺾일 것이고요.
이때 버리기가 좋답니다.
마찬가지로 몹쓸 병에 걸려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그 마음도 많이 꺾여 있을 겁니다?
이럴 때에도 버리기가 좋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했을 때에도 그 마음이 많이 꺾여 있을 겁니다?
자살률이 가장 높은 비율도 연인과의 이별을 못 견디고 죽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통계 자료에 의하면 자살이나 살인 비율이 가장 높은 것이 사랑이 잘못 꼬여졌을 때라 함, 출가를 하는 이유도 이성문제 때문에 출가를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 외에도
사업을 하다가 크게 망했을 때?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마음이 꺾이는 경우도 있지요?
생각해 보면 무수히 많을 겁니다.
이럴 때 마음을 비우고 버리기가 좋답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가장 내 마음이 물렁 물렁할 때이거든요.
부처님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통곡과 울음 비탄, 깊은 통곡 깊은 비탄, 깊은 통곡과 깊은 비탄 등 이런저런 마음의 상태가 따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라고요.
,,
도움이 될까 싶어 부끄럽지만 제 경우를 간단히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 경우로 예를 드는 이유는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도 혹시 힌트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마음에 관한 내용들이다 보니 마땅히 비유할 만한 것도 없고요?^^
제 경우는 조사선으로 한 경우인데요.
내가 조사선으로 했다는 것도 4년 후에나 알았답니다.
그때는 중국에서 일을 할 때라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혼자 사전을 뒤져가면서 법화경을 이해해 보려고 하나하나 해석해 가면서 무척 애를 쓸 때인데요.
2년 반가량을 거의 단 하루도 안 거르고 보고 듣고 해석해도 내용은 대강 알겠는데 뜻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이것이 저의 수행이라면 수행인데요?
당시에는 속된 말로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했답니다?
자존심도 엄청 상했고요?
그런데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자꾸 "마음을 봐라" "마음을 보는 법" 같은 문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따라서 봤지요 뭐?
그때는 마음이 엉망진창이었고요? ^^
반야심경도 이해가 가는 것만큼만 따라 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만약에 법화경이나 반야심경이나 수행이니? 견성이니? 성불이니? 하는 책인 줄 알았으면 분명히 제 경우는 던져 버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전혀 저하고는 어울리지가 않거든요?
또 이런 쪽으로는 믿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때는 마약사건에 연류가 돼서 흑룡강에서 2년 넘게 은행 자금이 묶여서 꼼짝을 못 할 때라 따로 할 일도 없었고 마음도 착잡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제 경우는 그냥 마음을 보라고 하니까 본 것이고 내려놓고 버리라 하니까 그냥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랍니다.
그냥 옛날 책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따라서 해본 것인데요.
바로 앞전에 중국에서는 사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대학교 내에서 학생들과 같이 종횡가(縱橫家)라는 학문을 3년 정도 수련을 한 적도 있었는데요.
그런 마음으로 제 경우는 따라 해 본 것이랍니다.
전혀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증득이니 하는 것들은 생각도 못 해봤고요.
제 경우는 어릴 적부터 친구들은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항상 번잡한 생활을 많이 했었던 사람이라 단 하루도 마음이 안정되게 살아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항상 마음이 들떠 있었거든요?
항상 혼자서 신나가지고 읍내에서 노는 친구들과 함께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노는 것이 그때는 그것이 너무 즐겁고 좋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직업도 친구들과 선배들이 있는 사채업 쪽에서 20년 넘게 일을 했던 것이고요.
전부 이런 쪽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하루도 마음이 안정이 되는 경우가 적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은 좀 벌었어도 엉뚱한 곳에서 놀게 되는 것이고요.
나중에는 중국까지 건너가 석탄 딜러로 시작해서 거기서 좀 큰돈을 벌어서 세명이 같이 돈을 모아 흑룡강이라는 곳에서 노천광산을 5구 임대해 장사를 하고 있는 도중에 법화경을 만난 것인데요.
이때부터 제 경우는 이 법을 만나려고 그랬는지 운명처럼 끌려들어 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답니다.
마치 "다음은 이것을 해봐라?" 그다음은 "이것도 해봐라?" 하는 식으로 2년 반 정도는 마치 자석에 끌려들어 가듯이 자연스럽게 불법 속으로 끌려들어 간 경우인데요.
이렇게 끌려들어 가지 않았다면 제 경우는 성격상 이런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누구나 자기 성격은 자기가 잘 알잖아요?
제 경우는 단점이 부끄럽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여자관계가 많이 복잡했던 경우인데요.
그맘때 면 다 그렇잖아요?
저처럼 행동으로 못 옮길 뿐이지요.
저는 잘못 빠져든 것이고요.
제 경우는 학교 가서 아무리 맞아도 또 가는 편이거든요.
그까짓 것 몇 대 맞으면 되지요.
밴드부 할 때부터 맞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는데요.
그리고 빨간불 파란 불들이 돌아가는 곳들을 너무 좋아했고, 당구 같은 노는 쪽으로만 너무 좋아했었답니다.
그리고 욱하는 성질 때문에 항상 아홉 가지를 잘해 놓고도 마지막 한 가지를 성질을 못 이겨서 엎어먹는 경우도 많았고요.
돈이고 사업이고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그냥 엎어버리는 경우이지요.
참으로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런 것이 너무 부족했답니다.
평시에는 저도 꽤 괜찮은 놈이거든요?
물론 일도 열심히 했고요.
그러나 거기서 번 돈은 대부분 노는 쪽으로 많이 탕진을 했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돈은 잘 들어오는 쪽이라 돈 쓰는 재미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신경 쓰고 마음을 써야 할 곳들이 한둘이 아니었거든요?
가정은 또 어떻고요?
노는대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놈이 가정엔들 잘 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항상 미안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러니 당시의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느 것이든 즐거움은 잠시뿐이고 나중에는 그 즐거움들이 다시 큰 고통으로 돌아오더라고요?
비록 바람둥이 이기는 했지만 부처님 말씀처럼 남녀 간에 헤어지는 마음의 고통은 정말로 크거든요?
그러니 제 마음이 온전할 턱이 없지요?
아무리 환경이 좋고 행복해도 제 경우처럼 일단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삼천포로 빠지게 되어있다고 본답니다.
그래서 재벌 집 자제들이나 유명인들도 간혹 시끄럽게 구는 것이고요.
물론 크고 작은 다른 아픔들도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흔히 있는 일이고요.
아무튼 제 경우도 딱 두 번 정도 크게 마음이 꺾인 적이 있었는데요.
2004년도에 조류독감 때문에 한 번 엄청 마음이 꺾였던 적이 있었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중국에서 석탄사업을 하는 도중에 조선족 동업자(삼합회 조선족 오야봉)와 한족 직원이 한국 업자에게 마약 중개를 하다가 걸려서 저도 직책이 총경리로 있었기 때문에 2년 정도 공안에게 불려 다니면서 마음고생을 엄청 한 적이 있었답니다.
이때쯤 우연히 법화경을 보기 시작했던 건데요.
처음에는 별로였지만 계속 반복해서 보다 보니까 어딘지 모르게 보통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제 이야기도 많이 있는 것 같아 빠져들었던 건데요.
특히 화택(火宅) 이야기와 길 잃은 장자 이야기와 밀림을 해치고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예전에 읽었던 천로역정(天路歷程)과 비슷한 것 같아서 더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장춘에 한 호텔에서 일행들이 한국 업자에게 마약 중개를 하다가 걸려서 저도 꼼짝없이 한국은 물론이고 성 밖으로도 못 나가는 상태에서 2년 정도 공안에게 불려 다니면서 마음고생을 엄청 할 때 법화경을 만난 경우라 더욱 빠져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2년 후쯤 결국 우리 쪽 사람 둘은 물론이고 전원이 사형을 당하고 그 시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물론이고 다들 겁을 먹고 못 들어 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제가 들어가서 시체 둘을 수습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는 정말이지 오만가지의 마음들이 교차되면서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고 힘들었답니다.
그야말로 그때는 몰랐지만 고(苦) 자체였답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평시에도 지랄 같은 성질이 더 지랄같은 거지요.
나중에는 우울증이 올 정도로 더 이상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경우의 마음이 오더라고요?
그 후로 제 경우는 마음이 완전히 꺾여가지고 우울증 비슷하게 실의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요.
마음이 꺾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런 특별한 느낌인데요?
마음이 확 내려앉는다 그럴까?
무기력해져서 온순해지는 느낌? 그런 느낌이랍니다.
그리고 장시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거고요?
계속 이렇게 가다간 자살까지 하겠더라고요?
그때는 그랬습니다.
마치 어떤 느낌이냐 하면 카우보이들이 성난 말을 등에 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결국은 제풀에 지쳐서 마음이 온순해지는 그런 느낌인데요.
마음이 꺾이니까 자연히 제 마음도 온순해 지더라고요?
하도 제가 힘들어하니까 형님들이 동생은 한국에 가서 좀 쉬었다가 들어오라는 주의의 권고로 한국에 나와서 당시에는 아무도 만나기가 싫고 저 혼자만 있고 싶어서 혼자 막 돌아다녔답니다.
예전 같으면 빨빨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친구들과 놀던 사람이요?
누구에게도 연락을 안 하고 무작정 혼자서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 천안에 방을 잡고 좀 쉬었다가 들어갈 마음으로 있었는데요.
한두 번 마음이 꺾이니까 뭐를 해도 흥이 안 나고 원상 회복이 안되더라고요?
마음이 묵직한 것이 너무 힘들었답니다.
본래 제 성격은 가까운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엄청 활기차고 힘차거든요.
말도 잘하고 유머감각도 넘쳐흘렀고요.
이런 성격 때문에 어려서부터 여자 친구들도 많았고요.
그런데 한번 마음이 꺾이니까 일단 흥이 안 나더라고요?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저는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를 한답니다.
2004년도에는 실제로 9시간 만에 응급실에서 깨어난 적도 있고요.
천안에서 쉴 때에는 중국에 있을 때 법화경을 본 경우라 할 일이 없으니까 각원사라는 절에 가서 뒷산을 오르기도 하고 절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시립 도서관에 가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저녁때면 수원이나 온양 쪽에 있는 당구클럽에 가서 밤새워 놀다가 새벽에 온천욕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곤 했었는데요.
이때쯤 또 자석처럼 오쇼 라즈니쉬가 지은 달마 어록이라는 책이 저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요.
그 책에서 본성 이야기를 처음으로 봤답니다.
바로 그날 도서관 문을 나서면서 또 운명적으로 반야심경을 접하게 된 것인데요?
처음에는 아무리 해석을 해봐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그래도 할 일이 없으니까 한문이나 해석하면서 염불이나 외워보자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정도 반야심경을 절반쯤 외웠나? 했을 때인데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부분을 해석해 가다가 혹시 이거 마음을 공(空)으로 만들라는 얘기 아니야?
하고 따라 해본 것이 와장창한 것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반야심경은 절반 정도 박에 못 외운답니다.
왜냐하면 외울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뜻을 알게 됐는데 그까짓 것 외워서 뭐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성 자리를 알고 나면 경전 속 내용들이 훤히 드러난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마음을 그대로 묘사해둔 것이 경전 속 내용들이라 그렇습니다.
전부가 본성(불성/성령/마음) 이야기이거든요.
그래서 본성 자리를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요.
남대문을 직접 가서 보고 이야기하는 사람하고 남에게 말로만 듣고 설명하는 사람하고는 아무래도 차이가 많겠지요.
이렇게 말로만 듣고 공부한 분들을 성문승(聲聞乘)이라 하는 것이고요.
이것은 마치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에 답안지를 옆에 놓고 시험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답니다. (진실)
그래서 저도 불교 공부를 한 번도 안 하고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고요.
이것이 가능한 것이 경전 속 내용들만 그대로 옮겨서 보내주면 되거든요.
이참에 저도 같이 공부를 하는 것이고요.
아무튼 이런 상태에서 하도 마음이 이상하게 변해서 중국으로 들어가 다시 일을 하자니까?
그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도저히 일을 못하겠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제가 엄청 극성스러웠거든요.
그런데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면서 완전히 바보가 돼서 돌아오니까?
형님들이 오죽했으면..
"아우? 한국 갔다가 뭔 일 있었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은 못 하겠고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는데요.
석탄 쪽 일도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거의 바보처럼 2년 정도를 보내다가 한국에 출장 나올 때면 처음으로 스님들을 찾아다녔던 건데요.
이유는 다시 예전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답니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으로는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절을 찾아다녔던 것인데요.
절은 또 이상하게 아무리 가도 누구 하나 아는 척을 해주는 사람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실패를 하다가 내가 답답하니까 불교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아까 그 스님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아.. 이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알았는데요..
제가 길게 저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중에 경전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의 이야기들이 모두 경전 속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와..!" 했답니다.
살아온 인생을 통해 고통을 받는 것 하며, 즐거움에 빠지는 것 하며, 그로 인해 괴로움에 빠지는 것 하며, 사람들 마음이 어떻다 하는 것 하며, 수행 방법이며 깨닫고 증득한 후 조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 하며 모두가 경전 속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그러니 지금은 더 재미있게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고요.
모르고 하면 뭐든지 재미가 없잖아요?
아무튼 제일로 중요한 것은 수행을 통해서든 저처럼 인생을 통해서든 나의 마음을 꺾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요.
마음이 꺾이지 않으면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랍니다.
그래서 증득은 때가 있다 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깨달음은 너무 쉬운 것이랍니다.
옛 분들은 세수할 때 코 만지는 것보다 쉬운 것이라고도 하셨는데요.
그만큼 쉬운 것이랍니다.
이것이 어러우면 지금처럼 알아차림을 통해 이 공부를 하시면 된답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이 덜 발달돼서 못 알아차리는 것이거든요.
그럴 수 박에요?
평생을 밖으로만 의식을 두고 살다가 갑자기 안으로 의식을 돌리자니 그것이 어디 쉽겠어요?
비유를 하자면 깜깜한 밤에 지하 창고에 뭐좀 찾으려고 들어갔는데 전기가 안 들어오는 겁니다.?
라이터나 후뢰쉬도 없고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포기를 하고 나오던지?
아니면 잠시 눈을 감고 있디보면 희미하게나마 지하실 윤각이 드러나잖아요?
이것과 비슷하답니다.
분명히 지하실 안에는 내가 찾는 물건이 있지만 어두워서 못 차는 것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공부란 일반 공부처럼 책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르지 이 마음 하나만 보면서 하는 거랍니다. (※ 중요)
물건은 지하실 안에 있는데 자꾸 남의 말이나 경전 같은 밖에서만 찾는다고 그것이 찾아지겠어요?
♡
끝으로 한 말씀 더 올리자면..
불교는 마음 체험의 종교랍니다.
중생의 마음에서 완전히 본성(불성/성령)의 마음으로 바뀌는 종교랍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뀔 때 그동안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과 행복과 고요한 마음의 체험을 하게 된답니다.
그야말로 광명(光明)이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천도재 같은 다른 짓들만 안 하고 관리만 잘해도 죽을 때가지 지속된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의 마음이 열려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엄청 큰 도움이 되고요,
무엇보다 다음 생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답니다. (진실)
지금도 많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은 체험이 아니다 어쩐다 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이런 소리를 하시는 분들은 모두 다 이 자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들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부처님이나, 원효 스님이나, 경허 선사나 이런 마음 체험 하나 때문에 속된 말로 마음공부에 미치신 분들이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리고 이것은 누가 인가(認可)를 해주고 말고 할 것도 없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제일로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경우는 원체 이쪽으로는 몰랐기 때문에 초기에는 헤맸던 경우이지만 여러분들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확실하게 마음 체험을 한답니다.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순간 갑자기 순간적으로 마음이 본성(불성/성령)의 마음으로 확 바뀌기 때문에 자신이 모를 수가 없답니다.
이런 것을 누가 누구를 인가를 해주겠습니까?
인가를 해줄 만한 분들도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은데요?
저도 깨우친 사람을 딱 한 분 정도는 같이 해본 적이 있는데요.
아쉬운 것은 처음에는 불법을 잘 지켰다고 들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먹고사는 것이 불안했는지? 천도재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고 그 뒤로는 발길을 끊었던 적이 있었는데요.
요즘 세상이 그렇답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거든요..
만약에 깨닫고 먹고 살 방편이 없을 때에는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이 훨씬 더 큰 이득이랍니다.
깨달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증득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은 단계가 깨달았을 때의 단계랍니다.
증득을 했어도 마찬가지랍니다.
완전한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수행자의 길은 그야말로 구도자(求道者)의 길이랍니다.
오로지 이 마음자리 하나만을 물고 늘어져야 할 (연각승)이나 (보살승)들이 사리불처럼 다 이루었다고 착각들을 하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성문승)은 말할 것도 없고요.
깨닫지도 못하고서 이름값만 높은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방금 말한 이분도 증득을 하고도 천도재 같은 길로 빠짐으로 해서 탐욕의 늪으로 빠지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이 법은 깨닫고 증득하기 전보다 이루고 나서가 더 중요하답니다.
이것은 마치 쌀을 안쳐놓고 다 된 밥에 뜸만 조금 더 들이면 되는데 그새 그것을 못 참고 솟뚜껑을 열고서 밥을 퍼먹는 것과 같답니다.
끝까지 이것을 잘 관리하고 지키 내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렵기 때문에 더욱더 열심히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 불법이랍니다.
골프든 당구든 공부든 뭐든지 최고의 한계치에 다다르면 더 이상 앞으로 올라가기가 힘들잖아요?
이것도 이와 같답니다.
그래서 완전한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요.
이 말은 제 말이 아니랍니다.
세존의 말씀이랍니다.
세존이 사리불에게 말한 이승과 삼승은 방편이요. 일불승이 진짜라 하는 말씀이 바로 이 내용이랍니다 ..
책이나 법문 등을 듣고 배우는 성문승이나
깨달은 연각승이나
증득한 보살승이나
이들 모두는 아직은 일불승을 증득하기 전 단계랍니다.
문 앞에까지 힘들게 다 와서,
돈 없고 헐벗는 것이 두려워서?
굶어 죽는 것이 두려워서?
뒤로 물러선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사리불도 당시에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었거든요.
이 외에도 비유로 든 예가 아주 많답니다.
여러분들 혹시 그거 아시나요?
상대가 깨닫고 증득을 했는지? 아닌지? 아는 방법을요?
이것은 아주 간단하답니다.
그 기준점은 보살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랍니다.
불성의 마음이 드러나느냐? 안 드러나느냐?의 차이랍니다.
깨닫고 증득을 했다는 사람들이 보살의 마음은 전혀 안 보이고?
보시 같은 것만 바라거나?
지금처럼 엉뚱한 짓들이나 하는 분들을 어떻게 인정을 해줄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대안 스님이나, 원효스님처럼 팔정도와 육바라밀 등을 행하면서 살고 있느냐? 아니냐? 가 그 기준점이라 하는 거랍니다.
이 기준점으로 현재의 선지식인이라 하는 분들을 비교해 보시면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 기준점은 제가 마음대로 만든 기준점이 아니라 세존께서 우리들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사성제(四聖諦)가 바로 그 기준점이랍니다.
평시에는 알아차림도 안 하시는 분들이.. <고제(苦諦)>
평시에는 자신들 마음에 무엇이 쌓여가는지도 모르시는 분들이.. <집제(集諦)>
평시에는 자신들 마음에 쌓여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버리려는 노력조차도 안 하시는 분들이.. <멸제(滅諦)>
무슨 도제(道諦)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글을 보시는 분들만이라도 이런 사람들 이야기는 그냥 참고만 하시고 부처님이 알려주는 대로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경허선사 말씀대로 아무리 늦어도 7일 안에 깨닫는 것은 유도 아니랍니다.
증득하는 것도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는 (고집멸도) 모두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요.
※오로지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데에만 집중을 해 보십시오.. ※
그리고 불교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위한 종교랍니다.
부처나 가족 등을 위한 종교가 아니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나와 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이(不二)라고 한답니다.
♡
(지난 글들이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 사이트를 누르거나 복사해서 보시면 된답니다. .🙏)
https://cafe.daum.net/119sh
♡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
ㅡ♡
<참고 동영상>
이분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이라는 분인데요.
이 내용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연결해 들어보시지요.
그러면 오늘 이야기와 엄청 닮아 있음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요즘은 정신과 박사나, 심리학 박사들이 불교 경전을 엄청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미국 나사에서도 우주에 관한 내용만 따로 뽑아서 참고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부처님은 우주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 표현하셨답니다.
그런데 이 설명 안에 있는 부처님 당시의 수학 공식을 요즘 식으로 바꾸어 계산해 보면 태양계의 주기나, 은하계의 주기 등 아주 다양하고 많은 자료들이 경전 속에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지금은 불교 안에서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불교 경전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인데요.
짧지만 한번같이 들어보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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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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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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