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수사 다섯 명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하였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게 시성되었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로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는 늘“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1,18-22
형제 여러분, 18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19 우리 곧 나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20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21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금이 제맛을 잃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빛과 소금은 나의 빛과 짠맛으로 무언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향을 주는 일이 ‘착한 행실’,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있을까요? 짜지 않은 소금이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이 어제의 ‘행복 선언’에 이어진다는 것에 착안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란 행복을 잃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얻는 자존감의 상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부터 이미 빛과 소금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성령으로 생기고 자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곧 행복입니다. 행복을 잃은 사람은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착한 행실을 보여주려 해도 주님을 찬미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뤽 벡송이 감독한 ‘레옹’(1994)은 매우 다른 두 캐릭터, 즉 고독하고 감정이 없는 암살자 레옹(장 르노)과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사이의 깊고 특이한 관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매우 상징적인 소재가 등장하는데, 레옹이 즐겨 마시는 우유와 화분입니다. 우유는 아직 레옹이 정신적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화분은 그 이유가 땅에 뿌리박지 못한 식물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레옹은 어렸을 때 살인을 저지르고 더는 성장하지 못한 화분에 심어진 아이와 같은 킬러입니다. 아이와 같은 레옹에게 가족을 잃은 마틸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틸다는 어린애입니다. 처음에 레옹은 마틸다를 꺼렸지만, 그녀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원하는 그녀에게 살인 방법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살인하면 더는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레옹의 말을 듣지 않고 원수를 죽이러 가고 그 과정에서 마틸다를 구하기 위해 레옹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에게 오히려 식물은 화분이 아니라 땅에 뿌리박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마틸다가 레옹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레옹은 글도 읽을 줄 모르지만, 마틸다는 읽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더 큰 사람에게서 성장한다는 것을 압니다. 레옹은 오히려 마틸다에게 사랑을 배우고 희생을 배웠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으로 상징되는 화분을 땅에 심습니다. 마틸다는 자신이 땅에 심어져야 거기에서 영양분을 얻고 자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레옹은 아닙니다.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화분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에 심어진 식물은 저절로 자랍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도움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땅에 심어진 식물은 크게 자라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화분에 심어진 사람이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누구도 짜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원숭이들에게 길러졌습니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만큼 마리나를 키웠습니다. 그가 사냥꾼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사창가의 몸 파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수준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엔 사랑 가득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내가 어느 땅에 심어지느냐에 따라 제맛을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정해집니다. 내가 뿌리박고 있는 땅이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는 성령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만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심어진 소금은 제맛을 잃지 않습니다. 그 맛이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리서는 말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내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먼저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에 행복할 것입니다. 이 맛을 잃으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입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읍시다. 식물은 땅과 하나입니다. 이 믿음만이 내가 소금이되 짠맛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샤워하는데 갑자기 눈이 아픕니다. 눈썹이 눈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손으로 비벼서 눈썹을 빼려 했지만 잘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실의 거울에 눈을 비추면서 눈썹 하나를 조심스럽게 뺄 수 있었습니다. 이 거울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제 얼굴이 보입니다. 이제 거울 앞으로 더 다가가서 거울에 얼굴을 딱 붙여보십시오. 더 가까이에 아니 완전히 붙어있는데도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즉,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자기에게 딱 붙어 바라보면 절대 알 수 없게 됩니다.
저 역시 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 말을 잘하지 못했기에 남들 앞에서 말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학창 시절에 과제로 글짓기를 하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칭찬받은 적도 그리고 상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역시 저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래도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 글쓰기입니다.
자기에 관한 판단도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남 보듯이 나를 바라봐야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으며, 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그 안에서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아니라, 썩는 것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귀한 소금이기에 고대와 중세에는 화폐나 임금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빛도 아주 중요하지요. 어둠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통해 우리가 제대로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귀한 우리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힘과 재주가 없다면서 늘 뒤로만 물러서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드시는 주님이었습니다. 빵의 기적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작고 힘없는 우리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가 귀하다고 선언하셨기에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설마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진리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란 정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