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3,4-11
형제 여러분,
4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7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8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9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하면 죄 짓지 못한다
계명을 지킴은 구원의 길입니다. 계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그 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지 말고 지키라고 합니다. 눈빛 하나까지 사랑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려면 행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행복 선언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자존감만큼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도정에 있습니다.
왜 행복하면 죄를 짓지 못할까요? 모든 죄는 ‘불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불만족하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하고 허락되지 않은 것으로 그 불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그것이 죄가 됩니다. 결국 그 죄는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고 더 큰 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렇다면 불만족은 어디서 나올까요? 사랑받지 못해서 나옵니다. 불만족은 더 바랄 수 있는 존재인데 그만큼 채워지지 않는 것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뱀은 자꾸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세상 것으로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으로.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모기가 되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다 떠나 버립니다. 우리는 사실 무엇을 더 갖지 못해서 불만이기보다는 그것을 가져서 더 높은 수준의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불만입니다. 그러니 가장 높은 존재가 되면 그러한 불만이 사라지고 그러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민이 느껴져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영화 ‘시민 케인’(1941)의 줄거리입니다. 영화는 막대한 부를 지닌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의 사망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죽으며 “로즈버드”(Rosebud)란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케인을 이해하기 위해 기자 제리 톰슨은 로즈버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고자 합니다. 케인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눈사람을 만들고 썰매를 타고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는 엄청난 금광을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됩니다. 어머니는 무식하고 아이만 학대하는 아버지 옆에서는 아이를 올바로 키울 수 없다고 보고 아이를 부유한 은행가에게 보냅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기 유산을 물려주기로 합니다. 아이는 반항하지만, 어머니의 결정은 꺾을 수 없습니다.
성인이 된 케인은 막대한 부로 다른 사업을 할 수 있음에도 작은 신문사를 인수하여 몇 년간 많은 적자를 냅니다. 하지만 그는 겁내지 않습니다. 나중에야 언론을 통해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공격적 스타일 경영으로 결국엔 뉴욕의 모든 언론을 장악합니다. 여기서 케인의 신문에 대한 집착은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물만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습니다. 그는 정치에 도전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조카인 에밀리 노튼과 결혼합니다. 이로써 선거에서 그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그는 젊은 가수 수잔과 불륜을 저지릅니다. 그렇게 이혼당하고 선거에서 낙마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언론사 친구들도 다 떠나갑니다. 여기서 권력에 대한 집착은 아무 힘 없이 남의 집에서 살아야 했던 상황에 대한 불만의 상징입니다. 케인은 수잔과 결혼하고 그녀를 위해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줍니다. 그녀는 가수지만 노래를 썩 잘하지 못합니다. 오직 케인만 그녀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수잔은 자기 능력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 시도를 합니다. 케인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주는 데 죽으려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한 여인에 대한 집착은 나만을 사랑해줄 단 한 사람도 없었음에 대한 불만의 상징입니다.
케인은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부동산 소유주가 되고 자신만의 성을 건설합니다. 그 성에서 수잔과 단둘이 삽니다. 젊은 수잔은 그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케인을 떠납니다. 케인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 내리는 풍경이 있는 구슬을 떨어뜨리며 ‘로즈버드’만을 외칠 뿐입니다. 여기서 부동산과 커다란 집에 대한 집착은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할 시간이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의 상징입니다. 기자는 여기까지 케인의 삶을 취재하고 모든 것을 가졌지만 또 모든 것을 잃은 케인에게 로즈버드가 어떤 의미인지 찾아내지 못합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케인의 예술품들을 감정하는 사람들이 쓸모없는 것들을 태워버리는데 케인이 어렸을 적 타던 썰매에 ‘로즈버드’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케인이 평생 그리워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부모의 사랑과 따뜻함이었습니다. 부모는 케인을 더 큰 부자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쏟아주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았습니다. 케인은 그 공허감에 많은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 했지만, 결국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죄는 부모에게 인정받았으면 없었을 것들이었습니다.
돈을 바라고 쾌락을 바라고 명예를 바라는 마음은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입니다. 아무리 그런 것들을 많이 가져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그러면 타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반칙을 써서 불만을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이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결국 죄를 이기는 길은 나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랑만이 채워줄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믿음’입니다. 자존감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랑에서 생깁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가 귀한 존재임을 믿게 만듭니다. 사랑받은 아이는 세상 것들을 통해 인정받으려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죄에서 멀어집니다.
개 밥그릇이 안 되려면 누군가 보물에 맞는 가치를 쳐 주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치가 하느님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성체를 영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불만족이 사라지고 그러면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가 되었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러면 불만이 없어지고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아주 작은 계명까지도 지키게 할 것입니다. 죄는 행복하지 않기에 짓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녀 헬레나의 아들이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에 가톨릭을 공식 승인했던 황제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입니다. 어머니의 열성적인 신앙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가톨릭을 승인했고 드디어 로마의 긴 박해 시대를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례를 받았을까요? 만약 받았다면 언제 받았을까요?
그는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겨우 세례받았는데, 세례를 계속 미뤘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면 신자답게 살아야 하므로, 죄악에 빠질 자유를 잃는다.”
이렇게 늦게 세례받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컷 죄를 짓고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가장 깨끗한 상태로 구원에 이르게 될까요?
주님을 멀리할수록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육체의 병이 생기면 치료받아야 하지요. 또 혹시 모를 병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예방접종도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병이 생기기 전까지 건강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함부로 몸을 굴리다가, 병에 걸린 다음에 치료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영혼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병도 치료해야 하고 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예방접종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하지만 병이 생긴 뒤에 치료받겠다고 합니다.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실컷 놀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다가 나중에 힘 빠지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점점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후회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주님 안에서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망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지요. 자유와 해방의 법을 율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사랑의 율법은 지금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만을 쫓다가 먼 훗날 힘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회개하고 “자비를
.”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삶, 영적으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랑의 율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로소 큰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을 향해서 배를 저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몽테뉴).
콘스탄틴 대제와 성녀 헬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