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칠월 칠석이었다. 직녀는 없더라도 머슴아들 끼리 만나 회포나 풀자고 모였다. 술 한 잔 걸치고 친구들과 헤어져 지하철을 탔다. 카톡을 확인하고 고개를 드니 누군가에게 어깨서핑을 당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당하는 사람은 방안퉁수가 아닌 다음에야 알아채게 마련이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여인이 45도 정도 비껴 앉은 건너편 자리에서 힐끔 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도 마주 힐끔거릴 수는 없는 노릇, 앞을 보는 척 했지만 신경은 그녀에게 가 있었다. 그녀는 아예 작정을 하고 정면을 보는 척하는 나를 뚫어지게 살폈다. 여인의 가공되지 않은 민낯이 맑고 품위가 있어 보였으나, 나를 훔쳐보는 놀란 토끼 눈처럼 큰 눈동자는 빨다만 사탕처럼 반짝였다. 누군가? 나는 구년묵이 기억창고 저 밑바닥에 누렇게 바래져있는 사진들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딱히 집히지 않았다. 게다가 눈썰미 없는 나에겐 가뭇없는 노릇이었다.
감삼 역에서 내려 출구를 빠져나오는데 잔걸음으로 따라오던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 혹시….” 그녀는 내 이름을 정확히 대며 맞느냐고 물었다.
“그런데요. 절 어떻게 아시나요?”
“저 생명을 구해주셨잖아요. 바닷가에서…”
“누구시더라?…”하긴 사라호 태풍과 바닷가에서 사람을 구해준 것이 열은 안 되도 다섯 손가락은 꼽을 수 있었다.
“모기, 카면 아실라나?”
“아~, 알다마다요!”
그녀의 예상 트랙을 벗어난 힌트가 방아쇠가 되어 나는 머리에 총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구년묵이 기억창고 저 밑바닥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문신처럼 누렇게 바래져있던 사진들 중에서도 오래고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겨우 찾아 꺼내 들고 먼지를 털었다. 퇴락한 세월의 고적감이 흩날렸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단편소설 ‘유령의 집’에서 “아무리 멋진 기억도 종국에는 사라진다.”는 M의 말은 낭설인가보다. 기억으로 플래시백 되는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법처럼 나는 그녀를 기억 속에서 소환했다.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60년이 지난 기억의 서사가 한 순간에 아련히 펼쳐졌다.
영화 ‘그레이맨’에서 클레어가 “그냥 평범한 목요일이야”하고 자주 말하듯, 59년 여름방학 어느 한 주일의 어느 요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꽃 시절은 있듯이 하릴없던 나는 다투던 동네 청년들과 친구가 되어 대송해변(지금의 포스코 자리)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모래사장에서 얼음을 섞은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한 편의 서부 영화 속 건달 같았다. 그때 사람이 바다에 빠졌다고 난리를 쳤다. 보니 한 젊은 여인인 듯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몸은 보이지 않았으나 긴 머리카락이 수면에 시커멓게 깔려 있었다. 나는 누가 떠다민 것처럼 총알같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술을 두고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술을 사랑하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그 시절 나는 평생을 같이할 여자보다는 한 때의 연애를 그리워하였으며, 그보다는 맑고 차가운 술에 빠져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자유형으로 전력을 다해 다가가다가 가까이가선 개헤엄(평영)을 치며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며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며 내게 매달리려고 허우적거리며 맹렬히 다가왔다. 얼핏 보아도 내 또래였다. 그러나 나는 발헤엄을 치며 그녀를 발로 밀어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죽기 살기로 구원자에게 칡넝쿨처럼 매달려 둘 다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발에 차여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는 나를 향해 허우적거리며 무조건 들이댔다. 아직도 힘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지쳐 힘이 빠지도록 여인의 주위를 뱅뱅 돌았다. 그러다 바닷물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가만히 서 보았다. 이럴 수가! 어깨가 드러난 상태였으나 발이 바닥에 다였다. 이런 맹랑한 일이 다 있나.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접시 물에도 빠져죽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그날 물의 깊이가 사실은 어깨 정도였다고,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바닥에 선채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영원히 내 목에 매달려 있을 것처럼 다짜고짜 두 팔로 내 목이 부러지도록 껴않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농염한 몸짓을 선보이는 것도 지능을 뽑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마돈나의 주장에 동조나하듯 그 당시로는 발칙하게도 비키니 차림이었기에 브라자는 벗겨져 달아나고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걱정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독였다. 그러나 그녀는 발을 바닥에 댈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고 두 발로 내 허리를 감고 두 팔로는 내 목에 죽어라 매달렸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비키니를 입을 정도로 피부는 간밤의 눈처럼 맑고 깨끗했고 글래머였으나 꼴은 메란 없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내 가슴에 밀착시키고 훈장처럼 목에 매단 채 해변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 나왔다.
그날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그녀가 저녁을 샀다. 경주 가는 막차를 타면 된다기에 우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울창한 해변 솔숲으로 스며들었다. 어둠이 깃들자 불을 휘영청 밝힌 대형 화물선이 영일만에 두 채 떠 있었고, 고양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여기저기서 우릴 우화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알과 굼벵이로 거의 6년을 흙 속에서 살던 매미가 기껏 한 달 삶의 최후를 앞두고 맹렬히 울어댔다. 교미할 암컷을 찾아내야만 기나긴 굼벵이 세월에 후회가 없을 테니 귀청을 찢는 세레나데가 어쩌면 나까지도 울렸다. 게다가 하늘에는 반달이 떠 있어 생동감 넘치는 숲 속 풍경은 어쩠거나 환상적이었고 그 이미지를 모티브로 우린 더 친밀해졌고, 나는 야한상상을 하며 스킨 헝거처럼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으며 노닥거렸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었고 그건 아주 자연스런 몸짓이었다.
현실과 초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 안락하던 우리들의 공간과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해변 가 모기들이 야료를 부리며 각개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바지에 반팔티셔츠의 나도 모기의 공격에 항복 직전이었는데 어깨가 드러난 짧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동풍이 불어오든 서풍이 불어오든 손으로만 맨살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모기에게 두 손 들었고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그 날 경주행 막차는 그녀가 모기에게 피를 헌납한 공로로 결국 놓치고 내 평생 처음 여관에 들었다. 낮에는 그녀가 살려달라고 몸부림쳤지만 밤에는 죽여 달라고 매달리는 풍경을 그리자 내 심장은 광폭하게 뛰기 시작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자고 작정했지만 모든 것은 나무아미타불이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발작을 시작했다. 온 몸이 모기에게 물려 피부는 국화빵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근지러워 몸부림쳤다. 얼굴도 팅팅 부어 공갈빵처럼 부풀어 올라 묵사발이 되어있었다. 대략 난감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욕망의 시동은 꺼지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관 마당에 있는 우물물을 퍼와 수건에 적셔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피부를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먼동이 틀 때까지 작업은 계속 되었고 날이 밝자 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허망하고 잔인했다.
오죽했으면 조선의 천재 학자 정약용도 모기를 증오하는 시 '증문(憎蚊)'에서. 울 밑의 호랑이도, 처마 끝의 뱀도, 괜찮은데 모기만은 간담이 서늘하다 했을까. 점잖은 선비가 제 뺨을 제 손으로 치게 하는 모기. 호통을 치고 꾸짖어도 안하무인인 모기. 나는 지금도 해변 가 숲속의 모기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든다.
갈매기(김이대)시인은 그의 시에서 ‘추억이 가슴 속에 잠들어 있기에 노년은 외롭지 않다’고 노래했다. 추억의 그 강물이 지금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모든 것을 무화하는 세월 앞에서 뜬금없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여러분이 매듭지어 주길 바란다.
첫댓글 너무재미 있어서 자꾸만 읽는다
어이 야성.
자네 근간에 재미난 일이 없는 모양이지?
그거 있자나, 그거...
하긴 자넨 학창 시절부터 순수 파였지.
60 여 년 전 있었던 사라호 태풍 잊을 수 없는 사건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한 자네의 이야기가 흥미롭네.
아! 아!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을 어찌 잊으리..
자네는 천국에 가서도 상급이 크겠네 .부러워요!
수해진 날 여인이 물에 쓸려 가며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서 모두는 겁에 질려 구경만
그때 한 노인이 뛰어들어 여인을 구했어.
기자가 달려가 물었지. 이 연세에?
아니야, 누가 등을 밀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