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뿐이고
석오균
어느 허무주의 철학자는,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다.”라 하였다.
요즘들어 망각증세가 나날이 더해가는 것같다. 오래전 일은 오히려 생생한데 최근의 일들이 아스라할 때가 다반사다.
F. W. 니이체가 한 말을 어시스트라도 하듯, 독일의 시성 J.W. 괴에테는 그의 《괴테 시선》 제8권 《온순한 크세니엔》에서,
“젊을 때는 흥미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잊기 쉽고, 늙어지면 흥미가 결핍돼 있기 때문에 잊기 쉽다."고 피력하였다. 이러고 보면 망각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나보다.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때마침 아내는 호기심에다 역마살 (驛馬煞)까지 지니고 있어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국내든 국외든 불문가지다. 덩달아 나도 그러하다.
히브리어의 '떠나가라'라는 뜻으로 '에크르캄'이 있다. 이 말에는 4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떠날 때는 '결단하여 가라, 스스로 가라, 본질로 향하여 가라 그리고 미래로 가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아들과 딸이 사는 한양으로 전입한지 삼년째가 되었다. 저간에 친구 모임에 참석할려고 지하철을 이용할 때 4호선 서쪽 종점이 '오이도' 라는 표지를 보았다. 오이도라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어릴 때 시골에선 '물외'라고 하였고 여름철 물의 냉국에 식은 보리밥 말아 먹은 그 '오이의 섬' 인가? 여보는 언제라도 좋으니 가 보잔다.
NAVER에 검색해 보았다. 열매 채소 '오이'가 아니고 섬 모양이 까마귀 귀를 닮아서 '오이도(烏耳島)'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까마귀 귀는 까마귀 눈 옆부분의 깃털을 쓸어올리면 그 안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녀석의 귀란다. 깃털을 일부러 쓸어 올리지 않으면 그의 귀를 볼 수가 없다. 이러고 보면 '오이도'란 '까마귀의 귀를 닮은 섬'이란 말을 합리적으로 수긍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는 듯하다.
오이도역에서 택시를 타고 빨간 등대가 있는 식당가에 내려서 긴 제방을 거닐어 보고 식당을 물색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결단하여 부부 스스로 떠났으니 육감으로 판단할 수 밖엔. 찰라적으로 괜찮아 보여 한 식당의 2층으로 안내 받았다. 한 테이블엔 남녀 두 사람, 다른 식탁엔 남녀 6인이, 한 쪽은 조곤조곤 대화하고 다른 쪽은 시끌벅쩍 했다. 두 사람 있는 옆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서해를 향해 두 시 방향에 인천의 송도가 보이고, 수인 분당선으로 환승해서 세 정거장 가면 소래포구라고 했다. 회맛이 끝내준다는 친구의 조언을 들은 적이 있어 다음엔 거기를 가보기로 했다.
점심 식사 시간대인데 바닷물이 빠져나간 썰물이라 시궁창처럼 보인 시꺼먼 개펄이 넓게 펼쳐져 있고 얕은 물이 있는 곳에 100여 마리 미만의 갈매기 떼가 노닐고 있다. 식사가 차려졌다. 몽매에도 그리던 오이도의 첫 식사다. ‘죽은 사람의 오구도 들어줄판’인데 애인이자 친구를 위한 외출 밥상이랴! 식대는 다소 높았지만 음식은 만족스러웠다. 반주로 곁들인 복분자술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매주 목요일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바깥바람 쐬기’위해 개별 일정은 안잡기로 했다.
둔촌동역까진 편도 두어시간이나 소요되기 때문에 오이도 주변을 더 깊게 살피지 못하고 택시를 이용해서 시발역으로 향했다. 택시를 탄 것이 오늘 나들이 중 어쩜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택시 기사분이 백발에 가까운 칠순 초반으로 보이는데 표정이 밝고 유머가 넘쳤다. 여기서 가까운 시화호가 행정구역이 옛 시흥군과 화성군에 걸쳐 있어 각 앞글자를 따온 것이라 하면서,
“오이도는 왜 오이돈지 알고 오셨나요?”
“그야 섬의 모양이 까마귀의 귀를 닮아서겠지요.”
네이버에서 검색한 대로 답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궁색한 대꾸였다.
“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계시죠. 실은 ‘오이도(烏耳島)의 귀이(耳)자가 명사로 쓰면 ‘귀 이’이지만, 접미사로 쓰이면 '~뿐'이라는 뜻이 된답니다. 이를 테면 그것 만이고, 더는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지역의 한학자가 의문을 풀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섬의 모양이 까마귀 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섬에는 까마귀 떼만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일영중겸용 상해한자대전(詳解漢字大典)을 펼쳐 보았다. 耳는 ⓵ 귀 이 ⓶ 뿐 이 (語決詞) 외에 4가지나 더 기록되어 있었다. 영어의 'only'와 'just'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영어의 한 단어에 뜻이 여러가지 있듯, 한자(漢字)의 글자에도 뜻이 여러가지 있고, 문장의 어순도 같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은 영어의 이해도가 빠른가 보다. 천재일우로 만난 그 택시 기사분의 해설에 따라 오이도 (烏 까마귀오, 耳 귀이, 뿐 이 島 섬도)는 섬의 지형이 까마귀 귀를 닮아서가 아니고, 섬 전체가 까마귀뿐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 게 설득력이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기사분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식사 때 보니 제방으로 화려한 무지개 의상 차림으로 활보하는 여인네 무리는
뭡니까?”
“그들은 ‘소딸’이죠.”
“무슨 의미죠?”
“의식있는 이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뻔뻔함이나 내로남불 또는 불리한 과거 사실은 빼고 눈가리고 아웅하지 않고, 상식이 통하고 정의롭고 소신껏 행동하는 딸들인 셈이죠.”
‘돼딸’ 이든 ‘소딸’이든 ‘맞는 건 맞다 하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하는 정직하고 솔직한 사회가 그립기만 하다.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언사는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적반하장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칭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손가까이 올텐데···.
남북통일의 전제가 동·서가 화합하고, 남·남 갈등의 해소가 급선무가 아닐런지.
오늘의 오이도 탐방은 막연한 의구심을 해소해주는 의미있는 발길이었다.
‘떠나가라’는 뜻으로 4가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에크르캄'이 강하게 크로즈 업 된다. 매주 목요일마다 바깥 바람 쐐기 기분 전환용 약속이 잊혀지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까마귀 뿐이라서 오이도 였었는데 지금은 까마귀는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고 갈매기만 보이니 이젠 갈매기 구(鷗)자를 써서 구이도 (鷗耳島)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석오균 ogsheog @ hanmail.net
《문장》 가을호 등단(2012).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이사. 문장작가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달구벌 문학회 회원
수필집 《회초리》
새주소 :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동대로 55길 39, 102동 1003호 〈성내동, 힐데스하임 올림픽파크〉
전화 : 010-6343-1601
첫댓글
이 분이 누구신가?
대구 수필문학 회장 아니신가
서울로 떠나고 대구는 잊으신가 했더니
글을 대하니 넘 반갑다.
글도 모재 답게 젊잖구먼
열벗회 올라온 사진보니 여전하더라
반갑고 반갑다
좋을 글 자주 올려 내 눈을 씻어주려므나
알간?!
고맙구이.
이죄명 판결도 예단하시고.
선견지명이 탁월하시구려.
그대와 우정 무진 누리려고 체력관리
꾸준히 한다네.넘 고마워.
추석명절 환하게 보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