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서고사에서 기형도 시인을 회상하다.
잠시 틈을 내어 황방산 자락에 있는 서고사에 갔습니다.
전주에는 동고사 남고사 북고사 서고사라는 네 개의 절이 있었는데
가장 옛 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절이 바로 서고사였습니다.
저물녘이면 멀리 서해 바다가 보일 듯 호남평야가 아스라하고
오래 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황방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서고사.
백매화. 홍매화. 흐드러진 그 아래
수선화 천리향등의 꽃이 온통 절을 휘감고 있으면서 혁신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 절도 꽃나무도 변하고 말아 그 꽃들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고,
새롭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만이 나를 맞았습니다.
이 절에 <숲 속의 방>을 지은 소설가 강석경이 소설을 쓰고 있었고,
<입속의 검은 잎>을 지은 기형도 시인이
대구에서 장정일 시인을 만나고 전주로 와서 하룻밤을 묵었고 기행산문집인
<서고사에서 하룻밤>을 남겼습니다.
“서고사는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이 지은 네 개의 절 중 하나라고 한다. 전주에는 6시에 내렸다. 전화를 넣으니 강석경(숲속의 방의 작가) 선생이 크게 기뻐하셨다. 수박 한덩어리와 복숭아, 그리고 담배 몇 갑을 사고 황방산(누른 삽살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산 이름) 서고사를 향해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가 공부하러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공부하는 분을 찾아 간다고 말했다. 택시로 20분 못 가 길모퉁이에서 소매없이 헐렁한 셔츠에 밀짚모자를 쓴 강선생이 튀어나왔고 나도 택시에서 내렸다. (...)
바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들판은 거대한 바다로 보였다. 먼 데 호수가 있었고 농가들과 송전탑이 내려다 보였다. 태양도 싸늘히 식은 붉은 빛으로 대지위에 떨어지는 중이었다. 구름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왔고, 어느덧 7시 40분이었다. 대웅전 옆방에서 비빔국수를 들었다. 강선생이 사는 방은 나한상을 모신 곳 바로 위쪽이었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뒤집혀질 것처럼 종이곽으로 만든 쪽배 같았다. 들창을 여니 커다란 두꺼비가 있었고 언젠가 귀신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강선생이 또 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평상 위에 앉아 의성스님 등과 함께 작설차(참새의 혀처럼 조그만 풀잎)와 솔차(솔잎과 설탕을 버무려 쩌낸 것)를 들고 이런저런 인생살이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참 매력 있는 분이었다. 그는 근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가 부러워 나는 슬퍼졌다. (...)
밤 10시 가까이 지나 스님과 봉숭아 물들이느라고 한껏 들떠있던 하욱도 잠자리에 들고, 나와 강선생, 숭실대학생, 선혜법우와 넷이서 종교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선혜법우가 동사섭을 말해주었고, 가식과 욕망을 없애고 진실을 향해 사는 삶을 말해주었고 가식과 욕망을 없애고 진실을 향해 사는 삶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것을 행복, 자기구원으로 깊이 인식하였고 감동했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공포에서 비롯된 스스로 성지되기의 길’임을 조심스럽게 말했고,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이라고 피력함으로써 의심이 많은 자 특유의 ‘혼란과 쟁투, 근심에의 탐닉을 통한 유한자로서의 생 읽기’의 버릇을 드러내고 말았다. 밤은 깊었고, 이미 해가 진 뒤 오래였으니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유성 두 개나 너무도 길게 떨어져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지만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비행기의 굉음이 터져 나와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
속세란 무엇이며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이 없는 삶은 이미 속세가 아니고 욕망과 화해하고 싸우는 자가 수도자가 되는 길은 속세를 버리는 길이다. 속세 속에서의 구원의 몸짓은 자기구원이 아닌 가식으로 가득 찬 이웃 구원일 것이다. 서고사의 밤은 깊고 어디선가 소쩍새들이 끊임없이 울었다. (...)
나는 너무 좁다. 처음 대구에 내렸을 때나 전주에 내렸을 때 감당하기 힘들었던 막막감. 그토록 증오했던 서울, 내가 두고 온 시간과 공간의 편안함에 대한 운명적 그리움. 난 얼마나 작은 그릇이냐. 막상 그 작은 접시를 벗어났을 때 나는 너무 쉽게 길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서고사의 밤은 깊다. 풀벌레 소리 하나만으로 나는 이 밤을 새도록 즐길 수 있다.“
<기형도의 기행산문> 중
기형도는 그 뒤 1989년 서울의 심야극장에서 새벽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산 뒤에 쓸 시를 그때 다 쓰고 돌아갔지요.
이미 오래전 일이지요.
그런데도 행여 그 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을까 싶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주저앉아 있었지만
여기 저기 풍성한 봄 냄새만
가슴을 휘젖고 지나갈 따름이었습니다.
소시부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을 적에는 사람들이 그 얼굴을 잊을 정도였으나. 해마다 화창한 봄날이 되면 문득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먼데를 관망하고 시와 술(詩酒)을 즐기면서 이곳저곳 거의 날마다 탐방探訪을 계속하며 말하기를, ‘일 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이 모춘暮春 10여일에 불과하므로 이때는 헛되이 보낼 수 없다.’ 고 하였으니, 그 활발하고 호매한 기상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이덕무의 <아정유고>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봄이 만개했는데, 온통 세상이 꽃 세상인데,
당신의 마음속 봄의 정원에는 어떤 꽃들이 피고 지는지요?
2024년 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