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다
小珍 박 기 옥
난타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자 친구들은 스트레스 풀기에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 딴에는 악기라고 생각하여 시작한 일인데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특별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다. 바이올린이나 플룻이었다면 박수를 칠 일이었을까?
난타의 특징은 두드리는 것이다. 두드림은 아득한 신석기시대에도 있었다.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고분벽화에도 춤과 음악이 등장한다. 어제보다 많이 잡은 고기를 들고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에 맞추어 양손으로 무언가를 두드림으로써 장단을 맞추는 이도 있다.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 이전이라 정형화된 악보는 없더라도 나름 보편적인 박자와 리듬이 존재한다. 우리 몸속에 숨어있는 원시적 감각 때문이다. 몸속의 리듬,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어쩌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더 생생히, 날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40대 중반의 노총각이었다. 7년 동안 사귀던 여자가 작년에 떠났다는 것을 보면 북만 잘 두드렸지 여자는 제대로 두드리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선생은 우리들에게 북 속에 숨어있는 리듬점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일깨워 내 몸 안의 욕망과 합일을 이룰 때 멋진 연주가 탄생된다고도 말했다. 우리는 좀 어려웠다. 내키는 대로 북의 여기저기를 있는 힘껏 두드려 리듬이 부서지는 참담함을 맛보았다. 새색시 때 팥죽을 끓이던 때와 같았다.
결혼과 동시에 시집살이에 들어간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동짓날 부엌에서 팥죽을 끓이는데 이 사람 저 사람 옆에 붙어 서 있노라니 누군가가
“새댁은 팥죽이나 저으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주걱을 들어 팥죽을 젓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정성껏, 쉬지 않고 저었다. 팥죽은 원래 끓는 비등점을 따라 눋지 않게 달래듯 저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온몸으로, 혼을 바쳐 투쟁하듯이 그것을 저었다. 그날 밤 나는 몸살을 심히 앓았다. 동짓날 단지 팥죽을 젓기만 했을 뿐인데도 온몸이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팥죽에 대한 내 몸의 과도한 두드림이었다.
난타반에서도 6개월쯤 지나자 어깨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북을 칠 때 어깨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간 결과였다. 더러는 북과 호흡을 못 맞추어 도중 탈락하는 사람도 생겼다. 오른손을 쓸 때 왼손을 쓰고, 테를 쳐야할 때 북을 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박자를 놓쳐 허둥지둥 헤매는 사람도 있었다. 합주다 보니 민폐에 대한 걱정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두드림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였다.
2년쯤 지나자 작은 단체 행사에서 오프닝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동시에 선생에게도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가 자신의 소리에 몰입하는 동안 선생 역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막이 오르자 우리는 음악에 맞춰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북과 테의 미세한 떨림이 우리를 선사시대로 인도했다. 몸 안의 리듬이 서서히 깨어나서 피돌기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첫 연주에 대한 설렘과 열기가 피돌기에 채찍을 가했다. 몸이 열리며 발끝에서부터 충일감이 차올랐다.
관객 뒤쪽에서 선생이 우리를 향해 손 모양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중 혹시라도 리듬을 놓치는 경우에 자신만 따라오라고 응원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유치원 재롱잔치에 출연한 아이를 향해
“엄마 여기 있어. 걱정 마”
하는 심정일 터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인들로써,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학생들이었다. 북채도 없이 손동작으로 하는 선생의 연주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 생긴 여자 친구를 두드리는 것으로도 비쳤다. 우리는 선생을 비켜나기 시작했다. 카네기홀 데뷔 연주라도 하듯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서 북채를 높이 휘둘렀다.
선생이 놀라 상기된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펴서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갑자기 소심해져서 동작을 줄이고 소리를 불러들였다. 그 과정에서 박자가 흐트러지고 화음에 균열이 생겼다. 어쩌면 연주 후 우리 모두는 아이들처럼 벌을 서게 될는지도 몰랐다. 혹은 팥죽 몸살처럼 다음 시간에는 모두 결석을 하게 될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우리의 첫 연주는 고분벽화에서처럼 우리끼리의 축제로 마무리되었다.
첫댓글 나도 이것저것 꽤나 만진
이력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난타 곁을 서성거린적
이 없어서 소진선생이 쓴
감을 정확하게 몸으로 알
수가 없어 많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해는 했다
하면 말이 안되겠나요?
하이고, 선생님.
감지덕지입니다.
고맙습니다.
@小珍(박기옥) 소진선생님
그러고보니 생각이 나요.
년전에 중앙공원에서 수필가협회 시민상대로 낭송행사를 제법 크게 벌렸던날, 복장도 차려입고
소진과 동료들이 난타를
공연하는 바람에 다들
신명이 도져 박수도 치며
즐겼던 생각이 납니다 그려. 고마운 밤이 었습니다. 추억이 뭔지...늙으면
파 먹을거라곤 추억밖에 없는데.
@남평(김상립)
ㅋㅋㅋ.
창피.
훗날 누군가가 저더러 그날 소진 닮은 여자 하나가
반짝이 옷 입고 신명나게 두드리고 있더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