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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信言不美(신언부미)-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美言不信(미언부신)-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못하다.
善者不辯(선자부변)-착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辯者不善(변자부선)-말을 잘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하다.
知者不博(지자부박)-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博者不知(박자불지)-박식하기만 한 사람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81장
진정한 예술은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
위에 쓴 것은 필자가 쓴 붓글이다.
나는 서예가(書藝家)라는 이름을 듣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볼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것과 같이
그냥 붓으로 글을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
부짓갱이로 부뚜막에다 글을 쓸 수도 있고
숯으로 담벼락에 글이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이중섭 화가는 종이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
국민화가 이름을 듣고 있다.
나의 고향 진주에 서부경남에서 “서예가(書藝家)”이름을 얻고 계시던
도연(陶然) 김정(金正)이라 하는 분이 계셨다.
중고등학교시절 방학 때나 주말에 선생님에게 약 4년간 글씨를 배웠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수제자중에 경남 통영(충무) 사람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선생이 있었다.
현재 밀양 영남루(嶺南樓) 현판을 쓰신 분이다.
이분이 진주(晉州)에서 평생을 살면서 서예(書藝)를 가르쳤는데
이름 있는 제자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와 도연(陶然) 김정(金正) 선생이시다.
도연(陶然) 김정(金正)선생님께 붓글씨를 배우면서 서예오체(書藝五體)를
체계 있게 배운 것이 아니고 처음부처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배웠다.
학생시절 짧은 기간에 익힌 것이 약간 남아있어 취미로 간혹 붓을 들기도 하고
카페에 붓글씨를 올려 보기도 하는 정도다.
친목 모임이 있는데 한 친구가 어떤 사람에게 농월이 쓴 붓글씨를 보이면서
“이 글씨가 어떤가?”를 물었다고 한다.
그 사람 대답이
“이 글씨는 어떤 체(體)인지 잘 알지를 못하겠는데 아마 그 사람 마음대로
쓴 것으로 별로 평가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름 없는 사람이 쓴 것이니 가치가 없을 수밖에--
중국 서체에는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유공근 조전비등 필자가 아는 서체만도
50여체 넘는다.
우리나라도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한석봉 김생 안평대군 등 헤아릴 수 없는
서체가 있다.
붓글씨나 그림이나 기초적인 운필법(運筆法)을 익히고 나면 자기만의 고유한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외식용(外飾用 장식용)이름을 좋아하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두고 직함(職銜)을 불러주기를 좋아하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부모가 지어준 고귀한 이름을 두고, JP. DJ. YS. MB 등으로 불러 주기를 바란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전 대통령, 전 장관 전 회장 등 직함을 불러주기를 좋아한다.
나는 프랑스를 가보지 않았지만 프랑스 사회를 아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은 다양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거리가 있다고 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집에 장식용 그림이 필요하면 몽마르트 언덕에 와서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을 선택한다고 하였다.
화가의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드는 그림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그림이나 붓글씨를 선택하는 기준은 어떠한가.
그림이나 글씨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문제가 없다.
우선 그림이나 글씨를 쓴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가를 따진다.
글씨는 누구의 체(體)냐?
국전에 입선한 사람인가?
값은 얼마인가?
크기는 몇 호인가?
시나 소설 수필등 글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뒷전이고 얼마나 작가의 이름이 유명한가를 먼저 따진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이 한국 국민 대다수의 인문학을 대하는 수준이다.
진정으로 그림이나 글씨를 감상하려면 전시회를 많이 찾고
작품을 많이 구경해야 한다.
관련된 책을 많이 읽고 견문을 넓혀야 서화(書畵)의 감상을 맛볼 수 있다.
글씨나 그림의 안목(眼目) 수준이 높아야 공급의 수준도 높은 작품이 나온다.
작품의 내용은 관심 없고 작가의 명성만 중요하게 생각하면 좋은 작품이
시장에 나올 수 없다.
요즘 조영남씨의 그림이 다른 사람이 그린 것을 조영남씨가 마무리를 지어서
완성하였다고 하여 야단들이다.
조영남씨는 화가가 조수의 손을 빌리는 것을 “미술계의 관행(慣行)”이라고 했다.
이번 조영남씨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미술은 용역하청(用役下請)이나,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즉, 주문자가 요구하는 그림내용으로 완성품을 생산하는 주문 예술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을 한국 미술계의 관행(慣行)이라 하니 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한국 서화(書畵)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부끄러울 뿐이다.
위의 붓글씨 “진예무체(眞藝無體)”는 나의 예술가치관이다.
진정한 예술은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예술은 일정한 체(體)에 얽매이지 않는다 !
자연의 풀과 나무 흐르는 물 바람과 구름 눈과 비가 정해진 바가 있던가?
우리의 자연(自然)은 서양의 네이쳐(nature)와 다르다.
우리의 “자연(自然)은 그냥 그러한--”이다.
무엇 무엇 함이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 그것이다.
문학이고 서화(書畵)고 간에 이상한 규정과 틀을 만들어 놓고 그 규정에 맞아야
문학이고 예술가의 인정을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철학(哲學)이 그렇다.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써놓고 대단한 학문인냥 우쭐댄다.
요즘 신문에 나오는 글도 마찬가지다.
무슨 무슨 사회적 직함을 가진 사람, 시인이다 소설가다 하는 사람들이 글 쓴 것을
읽어보면 도대체 무슨말을 쓴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글이 있다.
그러니까 학벌(學閥)이 있어야 하고 어느 소속된 계통의 출신이어야 인정을 받는다.
조영남씨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의 내용보다 “누구의 그림이다”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니까
연예인 이름이 그림의 가치로 대신 된 결과이다.
하기야 부모의 제사도 용역을 주는 사회니까
그림정도야 용역을 준들 문제 될 것이 있을까
돈만 벌면 그만이지---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