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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융을 조사하다 조선이 동이라는 허구를 발견했습니다.
연산군 3년 정사 (1497, 홍치10)
대간(臺諫)이 아뢰기를,
“전년에 서융(西戎)이 도적질하고 금년에 동쪽 오랑캐가 와서 침노하였으며, 경칩(驚蟄) 전에 우뢰가 진동하고 대궐 문 밖에서 살인을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공구 수성(恐懼修省)할 때이므로, 경축과 포상하는 일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고하기를, ‘벼슬은 친근한 사람에게 미치지 않고, 작(爵)은 악덕(惡德)에게 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였으니 친근하거나 악덕한 인물에게는 더욱 관작을 외람되게 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사복시(司僕寺)·서방색(書房色) 등의 일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또 승지·환관의 가자(加資)하는 일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좇지 않았다.
조선이 대륙에 있고 조선 동쪽 오량캐가 동이인데 동이가 무엇인지는 좀더 연구해봐야 할듯합니다.
명종 11년 병진(1556,가정 35)
대신·비변사·예조가 같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서계의 내용을 팔도에 하서하여 방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별견선(別遣船)은 접대하지 않는 것이 비록 약조(約條)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조구(調久)는 특별히 보내어 나온 처지이니 우선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접대하게 하소서.”【그 서계(書契)의 대략에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평조신(平朝臣) 종성장(宗盛長)은 삼가 조선국 예조 대인(禮曹大人) 족하께 우격(羽檄)을 띄웁니다. 1월 20일 일본의 전래(傳來)에 따르면 ‘동이(東夷)·서융(西戎)이 중국을 침범하고자 서해(西海)에 띄운 크고 작은 배가 수백 척인데, 그들은 은밀히 의논하기를, 「전에 중국을 노략질할 때는 패하지 않았는데 지난해 초에 조선에 갔다가 패한 것은 대마도가 날마다 통신하여 조선에 알렸기 때문이니 지금 기계(奇計)를 내어 먼저 대마도를 치고 동이·서융의 용감한 자들을 모아 밤낮으로 조선을 노략한다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己未/大臣、備邊司、禮曹同議啓曰: “書契中意, 下書于八道, 俾加備禦何如? 且別遣船, 不爲接待, 雖是約條, 而今此調久, 以特送出來, 姑令上京接對。”【其書契略曰: “對馬州太守平朝臣宗成長〔平朝臣宗盛長〕謹飛羽檄朝鮮國禮曹大人足下。 春正月二十日, 從日本傳來: ‘東夷、西戎, 欲犯大明, 蟻浮于西海者, 大小船數百隻也, 密議曰: 「頃年賊于大明不敗, 而去年初, 赴于朝鮮敗軍, 對馬兼日通信, 令朝鮮知故也。 今出奇計, 先攻馬島, 聚東夷、西戎之勇者, 日夜賊于朝鮮, 那無勝理?」
성종 12년 신축(1481,성화 17)
10월17일 (무오)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비로소 군(郡)을 두었습니다. 동북관(東北關) 밖은 영주(營州)·요동(遼東)·요서(遼西)의 땅이고, 서북관(西北關)의 오른쪽은 양주(涼州)·하서(河西)의 5군(郡)이 그것이며 이후에는 중국과 교통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元)나라의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가지게 한 것은 언어가 중국과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속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홍군(紅軍) 20만 명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가 대병으로써 쳐부수고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친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며, 또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또 중국이 동쪽에 있어서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는 군사를 남용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고, 요(遼)나라·금(金)나라·원(元)나라는 국경을 접했으면서도 핍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평양(平壤)을 점거하였던 중국 세력들의 흥폐(興廢)는 말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고구려가 풍씨(馮氏)의 남은 세력을 근거로 강성해져서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1백만 군이 살수(薩水)에서 대패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여섯 차례나 원정하였지만, 요좌(遼左)에서는 공이 없었으며, 한(漢)나라는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곧 고구려에 점거당하였고, 당나라는 평정하였으나 역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약간의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삼한(三韓)의 법규를 지킨 것은 옛날과 같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 모두 관중(關中)에 도읍하여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를 부모의 나라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요와 금의 두나라는 모두 서쪽에 하국(夏國)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송(大宋)이 있어서 서로 원수 사이였는데, 어느 틈에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후 야율씨(耶律氏)가 서쪽으로 만리를 달렸으나 완안씨(完顔氏)의 남하로 패망하였고, 원나라는 혼인국(婚姻國)이라고 칭하였으나 수십년 동안 침략하였고, 중국과 남북의 오랑캐가 혼합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서 국경이 없었지만 그 말년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음산(陰山) 북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이 다시 생각건대, 국가는 한 시대에 고식(姑息)되지 말고 만세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무사한 것을 요행으로 삼지 말고 만전의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천하에 금 그릇에 비길 만한 것은 잘 보전하여 깨트리지 말며, 산하(山河)가 금에 비길 만한 것은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장안(長安)·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거나 건강(建康)·임안(臨安)에 도읍하고 혹은 북쪽으로 업(業) 땅에 도읍하거나 동쪽으로 변량(汴梁)에 도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북쪽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연도(燕都)가 남북의 요관(要關)이 되어, 북으로는 거용관(居庸關)에 의거하여 호원(胡元)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는 중원(中原)에 임하고, 남으로는 사해(四海)를 제압하니,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정한 후 실로 만세의 제왕이 옮기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지금 개주에 성을 쌓으면 개주로써 그치지 않고 반드시 당참(唐站)에 성을 쌓게 될 것이며, 당참에 성을 쌓게 되면 당참에 그치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곡(糧穀)의 운반을 요청하게 되면 양곡 운반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소와 운반구(運搬具)를 요청할 것이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청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이며 농(隴) 땅을 얻으면 촉(蜀) 땅을 바라게 되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바치는 동해의 생선이 주방(廚房)의 쓰임에 충당할 만한데, 어찌 특별히 남만(南蠻)의 구장(枸醬)과 죽장(竹杖)을 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와 포백(布帛) 역시 군수(軍需)로 쓰는데, 어찌 남중(南中)의 금은(金銀)과 단칠(丹漆)만을 쓰겠습니까? 지금 당장에는 무사하다 하여도 5백 년 후에는 무력(武力)를 남용하는 자와 공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 일은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왕래하는 새 길을 열 것을 청한 것을 계기로 병부(兵部)에서 상주(上奏)한 것이지 정동(鄭同)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동을 통해 교섭을 시작하였다면 정동을 통하여 그것을 끝내어야 하며, 그는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뒷날의 이해 관계는 역관(譯官)들에게 달렸습니다. 바라건대 ‘한씨(韓氏) 족친 중에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와 통사(通事)중에 정동(鄭同)과 교제가 있는 자에게 명하여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바로 북경(北京)에 가서, 정동을 인해서 한씨에게 말하고 한씨가 어소(御所)에 말하여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나 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공(朝貢)하는 사절(使節)이 옛길로 가다가 침범이 있게 되면 철저히 방비하고, 그대로 주청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에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씨가 청을 할 수 없다면 그 뒤는 어찌 하겠습니까? 지금의 사세(事勢)는 바야흐로 병이 크게 도진 것과 같습니다. 7년이나 된 병에 만약 3년 묵은 쑥을 구하지 못하면 이것이 당(堂)에 있으면서 화(禍)를 알지 못하고 섶을 쌓아 놓고 위해(危害)를 알지 못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함을 배경으로 한 나라의 문호(門戶)입니다만, 듣건대 그 성(城)이 대단히 허술해서 광대들은 몸을 눕히고도 올라갈 수 있고 찬비(餐婢)가 상을 이고도 내려올 만하다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주(昌洲)·벽단(碧團)·대삭주(大朔州)·소삭주(小朔州) 등의 여러 성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곧 수축(修築)을 한다면 반드시 부역을 피해 유이(流移)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고, 또 수축하지 않으면 방비가 허술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 로 국론(國論)을 결정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수축을 하지 않으면 의주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으며, 의주가 없어지면 하나의 도(道)가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신은 절실히 생각하건대, 지금 8도의 인민으로서 놀고 먹고 조부(租賦)를 내지 않는 자는 승려(僧侶)만한 것이 없습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수축함으로써 보국(報國)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특별한 근로(勤勞)도 없으면서 까닭없이 복호(復戶)된 자와 사복시(司僕寺) 제원(諸員) 등으로 수축하게 하여 보국하게 함도 좋을 것입니다. 또 번(番)을 서고 있는 정병(正兵)과 동원되고 있는 수군(水軍)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압록강변 일대 행성(行城)을 쌓게 하고 또 따로 파절(把截)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도 인삼(人蔘)과 서피(鼠皮) 이외는 일체 면제 하고, 중국에 가는 사신[入朝使臣]도 정조(正朝)와 탄신(誕辰) 이외에는 정상대로 보내되, 쌍성(雙城)의 변(變)과 동녕(東寧) 사건은 마땅히 우려할 일이며, 따라서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직책이 없는 자가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도 또한 불가합니다. 삼도(三島)와 대내(大內) 등 왜인(倭人)도 마땅히 불러서 회유하여야 할 것이며, 모련위(毛隣衛)아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도 역시 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은 신이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며 글로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반드시 후세의 근심꺼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사세(事勢)를 논하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사신의 출발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구한 견마지성(犬馬之誠)을 다할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大國之置兵於境上, 萬世之慮也: 臣以古今天下之勢言之, 九州之內, 固中國帝王之所理也, 四海之外, 西域則葱嶺流沙幾三萬里, 北方則沙漠不毛, 窮荒無際, 東夷則扶桑日本, 環海爲國, 南蠻則占城眞臘, 溪洞瘴厲, 此自古不通乎中國者也, 西曰巴蜀、劒閣之路, 秦始開之, 南曰儋耳瓊崖之地, 漢始郡之。 東北關外曰, 營州、遼東、西之地也, 西北關右曰, 凉州、河西五郡是也, 此至後世, 通乎中國者也。 惟我大東, 居遼水之東、長白之南, 三方負海, 一隅連陸, 幅員之廣, 幾於萬里
여기에 동이는 일본이라 나오는데 위글에는 일본과 동이가 다른듯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와 일본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실록이 말해줍니다.
조작 세력은 왜와 일본은 하나로 만들었지만 실록의 내용 하나 하나를 다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실곡 곳곳에 왜와 일본이
같은 존재로도 다른 존재로 혼재되어 있습니다.
도데체 진실은 무엇일가여
성종 7년 병신(1476,성화 12)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무송 부원군(茂松府院君) 윤자운(尹子雲)·좌참찬(左參贊) 서거정(徐居正)을 문과 중시(文科重試)의 독권관(讀券官)으로 삼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책문(策問)을 발표하기를,
“제왕(帝王)의 도(道)는 오랑캐를 방어하고 백성들을 평안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한(漢)나라에서는 궁병독무(窮兵黷武)하여 허약(虛弱)한 폐단은 있었으나, 실로 사이(四夷)를 개척(開拓)한 공을 얻었지만, 진(晉)나라에서는 초유(招諭)하여 받아들이는 회수(懷綬)의 정책을 썼으나, 마침내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히는 변란(變亂)을 가져왔으니, 그 득실(得失)과 효과를 거둠이 같지 아니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한(漢)나라의 선제(宣帝)는 〈태수(太守)가 공로가 있으면〉 옥새(玉璽)를 찍은 글로 포상(褒賞)을 내려 장려하였고, 당(唐)나라의 선종(宣宗)은 그 이름을 병풍(屛風)에 새기었으니, 모두 수령(守令)에게 책임을 지워서 민생(民生)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다스림을 이르게 한 자취를 상고하여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우리 동국(東國)에서는 북쪽으로 말갈(靺鞨)과 연접(連接)하고 동쪽으로 도이(島夷)와 인접(隣接)하여 그 방비하는 대책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지금 왜노(倭奴)들로서 3포(三浦)에 잡처(雜處)하는 자는 그 무리가 날로 번성(繁盛)해지니, 다 쇄환(刷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흔극(釁隙)이 생길 것이요, 그대로 두고서 보내지 않으면 만연(蔓延)하여 장차 도모하기가 어렵겠으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야인(野人)으로서 5진(五鎭)에 아주 가까이 살면서 내지(內地)에 거주하고자 하는 자가 서로 잇닿는데, 과연 길이 북방 관문(關門)의 번리(藩蘺)가 되어 끝내 아무런 변란이 없이 보전되겠는가? 수령(守令)의 선임은 무겁게 여기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천거(薦擧)하는 데 그 방도가 있고 포상(褒賞)하는 데 그 전장(典章)이 있어서 마땅히 순리(循吏)가 배출되면 백성들이 그 은사(恩賜)를 받을 것이다. 청렴한 자는 적고 탐오(貪汚)하고 잔혹(殘酷)한 자는 많으니, 나의 근심을 나누어 맡아서 같이 다스린다는 뜻에 부응(副應)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대 대부(大夫)들은 오랑캐를 제어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할 방책을 곰곰이 강구(講究)하여 모조리 진술(陳述)하고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 5년 기미(1499,홍치 12)
5월14일 (계유)
홍문관 부제학 최진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듭자옵건대, 이적(夷狄)의 환은 예로부터 있어 비록 삼대(三代)와 한·당(漢唐)의 융성한 시대일지라도 또한 그 침요(侵擾)를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명철한 인주가 어거하는데 방도가 있어 오면 막고 가면 지키되 때로는 망실하는 바가 있어도 또한 그로 더불어 계교하지 않으므로 비록 변비(邊鄙)가 편하지 못한 걱정은 있을지라도 심복이 피곤한 근심은 없었다 합니다. 대저, 명철한 인주가 이렇게 함은 무슨 까닭이옵니까? 진실로 이적(夷狄)은 호랑(虎狼)인지라 사람을 보면 물지 않을 것이 없으나 또한 전멸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풀을 깎아내고 새를 잡아 죽이듯이 한다면 도리어 상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말세에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즐겨하는 인군이 선왕의 이적을 대우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고 들에서 농사짓는 백성을 몰아 위험한 사지에서 종사하게 하여,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씨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버리어 한편으로는 강토를 개척하여 불세(不世)의 공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참획(斬獲)을 많이 하여 일시의 분노를 쾌설(快雪)하려고 칼날을 교접하여 간과 뇌(腦)가 뒤범벅이 되어 땅에 질펀하고, 소득은 털끝만한데 손실은 태산같고, 변방 근심은 그치지 않는데 국내가 고갈됨을 알지 못하니, 한번 천재나 수한(水旱)이 있어 이 백성들이 더욱 곤고하게 되면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일을 살펴보옵건대, 문제(文帝) 때에, 흉노가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여 염탐하는 기병이 옹(雍)에까지 이르고 봉화(烽火)가 감천(甘泉)에까지 비쳤으니, 이적의 환이 극도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주아부(周亞夫) 등 3인을 명하여 요해처에 진을 쳐서 방비만 하게 하고 교병 접전(交兵接戰)하여 승부를 결단한 적이 없었는데도 세상을 마치도록 경내가 편안하고 국가가 부강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제(武帝)는 웅재 대략(雄才大略)으로써 흉노는 멸망시킬 거리가 못 된다 하면서 해마다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화가 연이은 지 30여 년에 비록 천 리의 땅을 개척하였으나 해내(海內)가 허모(虛耗)하고 도적들이 아울러 일어나게 되어서는 무제도 또한 후회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서 본다면 문제는 나약부단(懦弱不斷)하고, 무제는 위무 막측(威武莫測)한 것 같았으나, 그 결과의 득실에 관한 자취를 비교한다면 동일하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아조(我朝)는 성신(聖神)이 국운을 개척하시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하시와 회유(懷綏)의 도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변방이 조용하고 백성이 생업에 안정된 지 백여 년이 되오며, 때로는 비록 몰래 나온 적(賊)이 있기는 하나 또한 심하지 않았는데, 근자에 서융(西戎)들이 까닭없이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노략함이 한 번에서 두 번, 두 번에서 세 번에 장차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대신의 정의(廷議)에서 모두 쳐야 한다 하고, 무인들은 손에 침을 뱉으면서 추호(酋豪)의 머리를 베어다가 궐하에 달고자 하니, 이야말로 천 년 만의 한 기회요, 이 적들은 백 년의 쇠운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우리 국가로써 보옵건대, 그를 정벌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근년에 와서는 천문(天文)이 여러 번 변하고 지도(地道)가 편안하지 못해서 겨울의 천둥, 여름의 우박 등으로 재변이 거듭하고, 게다가 수해와 한해로서 오곡이 여물지 않았으며, 함경·전라 양도는 기근이 더욱 심하므로 사신을 보내 진휼(賑恤)하여 겨우 소생시켰으며, 금년은 또 봄부터 여름까지 석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보리와 밀이 익지 않으니, 백성들이 무엇을 믿고 농사에 취업하겠습니까. 하늘의 견고(譴告)도 또한 심한 것이므로 이야말로 전하께옵서 측신 수행(側身修行)하여 날마다 근신해야 할 때인데, 어찌 백성을 괴롭히고 군사를 움직여 동떨어진 산하에서 소추(小醜)와 더불어 종사해서야 되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사 10만을 움직이면 하루에 천금을 소비한다.’ 하였으니, 지금 가을의 수확이 비록 약간 풍년이 들었다 할지라도 2만의 병력을 쓴다면, 그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사람도 또한 2만이 될 것이니, 이는 4만 인을 써서 토벌하는 것이므로 그 비용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평안 일도는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비록 풍년이 들지라도 다른 도와 같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없는데, 근년에 와서는 흉재가 더욱 심하니, 어떻게 4만의 대중을 지공하겠습니까. 대군이 지나간 후에는 천 리의 길이 쓸쓸하고 백성들이 유리(流離)하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구제하시겠습니까. 또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킨 후에는 반드시 수·한재와 기근이 있었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창칼 아래에는 살상이 과당하여 해골이 드러나고 원망스런 기운이 쌓여 음양의 화기를 손상할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국가의 근심이 밖에서 그치는 것이 아닐 터이므로 이것이 토벌할 수 없는 것의 첫째이옵니다.
호인(胡人)은 금수와 다름이 없어 산곡의 험준한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평시에는 서로 모여서 도둑질이나 하고 몰래 들어와서 살상과 노략질을 감행하여 의식을 꾸려가다가, 한번 대군을 만나면 금수와 같이 놀래서 숲속으로 도망하며 혹은 요해처에 숨었다가 갑자기 나타나 저격하니, 비록 손빈(孫臏)·오기(吳起)의 장략과 백만의 군사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에 세조께서 신숙주(申叔舟)를 명하여 건주의(建州衛)에 가서 정벌케 하였으나 노획한 무사들이 태반이나 함몰되었으므로 지금도 애석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비록 장수된 자의 조치에 실수된 일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 지세가 험하였기 때문이오며, 기해년에 성종께서 윤필상을 명하여 가서 정벌케 하였으나 겨우 노약자를 얻어 이를 수급(首級)이라 하였으며, 신해년에는 허종(許琮)을 명하여 북적(北狄)을 정벌케 하였으나 또한 전공은 없고 사졸과 군마의 사망이 도로에 잇대었으므로 당시에 목격한 자는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그러한 명험(明驗)입니다. 그런데 이제 일시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대중을 출동시켜 천 리를 건너가서 작은 오랑캐를 치려 하시니, 비록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온다 할지라도 백성을 괴롭힘이 이미 심하고, 만일 차질이 있으면 국위를 손상시킨 손실이 매우 클 터이니, 이것이 칠 수 없는 것의 둘째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천 균(千鈞)의 쇠뇌[弩]로 새앙쥐를 쏘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멀리는 전대 제왕(帝王)의 성패의 자취를 보시고, 가까이는 우리 조정의 득실의 증험을 보시며, 천재와 시변이 일어남을 두려워하고 사방 생령의 어려움을 생각하시와 대사의 거행을 신중히 하시고 변장(邊將)을 선택하여 요해처(要害處)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상벌을 명백히 하여 용자를 올려 주고 겁자를 내친다면, 자연히 변방의 풍진이 점차 지식되어 소란스러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좀도둑질하는 것으로 말하면 비록 삼대(三代)의 성인 시대일지라도 또한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서 경악(經幄)에 대죄(待罪)하면서 비록 한 정사의 실책일지라도 진실로 대체에 관계되오면 감히 천청(天聽)에 호소하여 만의 하나라도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번 거동은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아 경솔하게 다룰 수 없음에리까. 신 등은 이러한 까닭에 뇌정(雷霆)을 무릅쓰고 재차 신총(宸聰)을 번독(煩瀆)하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그 우국의 충성을 살피시와 사람이 변변치 않다 하여 말을 폐하지 않으시면 국가가 다행하고 생령들도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일시의 분노로써 만세의 한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대의(大議)가 이미 정해졌으니, 정지할 수 없도다.”
북적과 서융은 다른것으로 판명되고 북적을 퇴치했다면 결코 동이가 조선이 될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에 동이가 조선임을 말한적이 없고 동이는 일본이라 하는데 우리는 도잉족이라고 배운 것은 무슨 해괴머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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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왜(倭)와 일본(日本)이 같거나 다른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지적에 동감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들을 살펴 보면, 일본(日本)과 왜(倭)라는 낱말이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록(實錄)의 원문(原文) 기준으로 1,166건이나 나옵니다. 왜(倭)를 도이(島夷)라고도 하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조 6년(1397년) 기사를 살펴보면, 원문(原文)으로 "相望日本: 望洪濤外, 倭奴稟性頑. 未嘗霑聖化, 常自肆兇奸. 剽竊侵隣境, 偸生寄海山. 願將天討去, 問罪凱歌還"라고 나옵니다. 여기서도 일본(日本)과 왜(倭)라는 낱말이 동시에 나옵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왜노(倭奴)는 노략하고 도둑질로 이웃나라를 침범하면서, 바닷가 산기슭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倭)를 해적(海賊) 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실록(實錄)에서는 왜구(倭寇)라고도 하는데, 원문(原文) 기준으로 535건이 나옵니다.
동이족은 대조선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조선이 바로 명, 청이 역할했던 중원국, 중국이기 때문이지요.. 대조선사를 논하려거든, 동이족, 한반도를 버려야 합니다. 동이 한반도를 자꾸 머리에 올려 놓으니 풀리지 않는 겁니다.
명과 지나족을 대조선이라는 영토 욕심에 우리민족으로 만들려다가...동이족 우리 한민족이 지나족에게 역 병합되는 격입니다~...ㅠㅠ..
명과 지나족을 대조선이라는 영토 욕심에 >> 명은 대조선의 번국이요., 지나족은 대조선이 망한후 중국대륙에 있는 민족을 지칭합니다. 영토욕심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나라가 진,한, 고구려, 신라,고려, 대조선으로 대를 이은 한민족 국가입니다. 여기에 동이가 무엇이며, 한반도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만 한반도인으로서 한반도엔 무슨나라가 있었는가가? 최대의 의심거리이니다. 그러나 한반도역사에 관하여 남겨놓은 것이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한반도사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대륙사를 한반도에 대입시키는 것은 일제의 의도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한마디로 반도조선, 식민지조선, 식민사관으로의 회귀입니다.
동이족을 더 인정해야..수많은 동이족 갈래들..청..몽고..돌궐..여진..등 모든 민족을 우리 대조선 ..내지 한 민족으로 포용할 수있는겁니다~!!!....... 동이가 일본이라..허걱~!!!...이제 동북공정에서 친일 싸이트라고 오해 받겠네요...좀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이족이 누구인지 모른는데, 청, 몽골은 무엇인가요... 몽골은 단군조선의 지파이고, 청은 신라의 지파이며, 돌궐은 고구려의 지파, 여진또한 발해의 지파... 모든 국가가 중원국가이지요, 대조선= 중국과 관련있는 국가란 말입니다. 여기에 동이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싸이트는 말도 않되는 동북공정은 거론조차도 않합니다. 대조선=중국=아시아= 한+중+일 이란 논리를 벗어난다면, 더 거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구지 이씨조선을 대조선으로 만들지 않아도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환인 황우 단군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쳐 대륙에 존재했습니다....이씨조선도 지금의 한반도만이 조선의 영토였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역사를 좀 안다면...하지만...동이와 한반도를 버리면서 까지 명나라+조선+일본= 대조선 이라는 허구를 만들어선 안된다고 봅니다...크게보면 이(夷)안에 동이 북이 서이 등 만은 갈래가 잇구여...구러케 크게 따지면 모두 한핏줄 형제 입니다...그러나 역사상 분명 ..저 지나족들은 명과 이씨조선을 다른 국가로하고 있습니다...청나라의 여진족 만주족들도 크게우리 민족이지만...지나족이 지나족 역사로 편입해 버렸구여.
왜 그랬을까요...그 청이 근세사에선 대중국의 실체 였으니까요~...(전 갠적으로 청이 광의의 우리 민족이라는 인식이 더 중요한것 같습니다...) 그러니 너무 지나친 애국심과 대조선 욕심과 비 논리적 역사 논리로 동북공정이나 친일파에게 역 이용되지 않도록 이성적인 전개가 필요한것 같습니다...
참고:동방을 '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회사(淮泗) 유역에 분포된 민족 집단이 한족과 접촉하는 은(殷)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그후 중국인들에게 여러 종족 개념과 방위개념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서융(戎), 남만(蠻), 북적(狄) 등의 명칭이 나타났다. '동이'란 특정한 민족 개념이 아니라 방위개념이 첨가된 한족에 대한 상대적 개념의 동방 이민족의 범칭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예(濊)·맥(貊)·한(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황하, 회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부와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지칭하였다.
삼국사기: 또한 동이(東夷)의 최초의 나라는 구리(九黎)-(한웅 배달국)라고 하는데 그 통치자에 치우 천자가 있었는데 제후(諸侯)인 소전(少典)의 아들 헌원이 치우와 탁록에서 전투하였으나 패하여 서쪽으로 가서 황능에 묻히고 한무제(漢武帝)에 의해서 한부족(漢部族)의 시조로 모셔졌다고 하였으니 동이(東夷)의 구리(九黎)가 정사에 나오는 아시아의 공식적인 최초의 나라이며 한반도인이나 한족(漢族)은 모두 동이(東夷)의 후예인 것이다.
동이는 중국과 상반된 개념 이분법으로 나타낸 단어라고 봅니다. 중원, 중국으로 본다면 조선엔 4이가 있었으며 동이 동쪽의 제후에 불과합니다. 그 중국 자체가 대조선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치우천자가 중국에서 지배했고여..여기서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려가 나왔으며, 진, 한도 같이 존재했습니다. 이들국가도 우리나라 선대국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한족이란 족속은 원래 없었고, 중국본토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그 한족이란 대조선인을 말합니다. 중원에서 살던 한겨레를 말하지요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하여 대조선의 모든 사서들은 대륙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글들은 대륙일색입니다. 그런 사실을 한반도에 맞춘다면 억지지요. 한반도에 관한 사서를 찾고 싶습니다. 아직 까지 두눈을 뜨고 찾아보았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잘 나타낸 책은 보지 못했습니다. 일제가 왜곡시킨 것은 제외하고요..
제목 수정 새벽에 글을 쓰느라 잘못 올렸네여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저도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동이는 대조선 영역에 있지만, 대조선을 침탈해 오기도 하는 오랑캐입니다 하여 동이는 한민족이라기 보다는 왜인에 더 가깝습니다.
연산 22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3월 14일(병진) 1번째 기사의 원문은 [丙辰/臺諫啓: “前年西戎竊發, 今年東夷來寇。 雷震驚蟄之前, 殺人闕門之外, 正殿下恐懼修省之秋, 慶賞之擧非其時也。 傅說告高宗曰: ‘官不反私昵, 爵罔及惡德。’ 私昵、惡德尤不可濫施官爵。” 又啓司僕寺、書房色等事, 不聽。 又論承旨、宦寺加資事, 不從]입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출처의 주석에 따르면, 서융(西戎)은 여진(女眞)이라고 하는군요...
'동이'(東夷)라는 낱말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든 내용에서 일관성 있게 ('중국' 또는 '중원'을 기준으로) "동쪽 오랑캐"라는 뜻이었다면 더 자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西域則葱嶺流沙幾三萬里, 北方則沙漠不毛, 窮荒無際, 東夷則扶桑日本, 環海爲國, 南蠻則占城眞臘, 溪洞瘴厲"라는 문구를 살펴보면, ('중국' 또는 '중원'을 기준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의 인접 지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동이(東夷)는 곧 부상(扶桑) 또는 일본(日本)이며 "바다(海)로 둘러쌓인 나라"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그래서 이 문구만을 살펴보면, 일본(日本)은 일본열도(日本列島)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東夷則扶桑日本, 環海爲國"의 "海"를 "陸海"(육해)로 본다면, 바다의 섬(島)이 아니라, 대륙(大陸) 안에서 부상(扶桑) 또는 일본(日本)을 비정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든 내용에서 "海"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九州之內, 固中國帝王之所理也, 四海之外"의 "海"(해)는 "陸海"(육해)로 보입니다. 따라서, "九州"(구주)는 "神州"(신주)에 "八域"(팔역)을 더한 지역이고, 이는 곧 "四海"(사해)라고 보입니다.
"惟我大東, 居遼水之東, 長白之南, 三方負海, 一隅連陸, 幅員之廣, 幾於萬里"라는 문구를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라고 해석합니다만...
원문에서는 조선(朝鮮)을 대동(大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이(東夷)라는 낱말과 어떤 관계인지?
또한, "幅員之廣"의 해석과 "幾於萬里"의 기준이 문제됩니다.
만리(萬里)라는 것이, 조선(朝鮮) 땅의 총둘레를 말하는 것인지? 총면적인지? 조선(朝鮮) 땅의 한쪽 구석(끝)에서 다른 구석(끝)까지의 거리인지? 경도(京都)에서 각 구석(끝)까지의 거리인지?
일본을 열도라고 단정짓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은 사이중 동이로서 중국의 동쪽,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등 동부,동남부, 혹은 한반도를 의미합니다.
도대체 제가 무엇을 '단정'하였습니까?? 그래서, 제가 위에 단서를 붙였습니다. 저의 댓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세요.
다만... "東夷則扶桑日本, 環海爲國"의 "海"를 "陸海"(육해)로 본다면, 바다의 섬(島)이 아니라, 대륙(大陸) 안에서 부상(扶桑) 또는 일본(日本)을 비정하여야 합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부상(扶桑)입니다. 아묵리가, 일본, 호인이라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데요, 과연 부상(扶桑)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