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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법사 영축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절로절로
건봉사 답사는 2018년 03월 24일 창원에서 출발하여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일원을 순례한 사찰 중 한곳입니다. (^_^)
빌려온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2007년 04월 고향친구들과 2박 3일 일정으로 강원도 고성 순례 및 관광한 사진입니다.
(빌여온 사진) 2007년 04월 건봉사 참배갈 때 모습
군인들이 순례 버스에 올라 검문도 하고 하였는데 . . .
건봉사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그 자체가 불신(佛身)과 똑같이 여겨지므로 불상을 조성하지 않고 진신사리만 모시는데 이러한 사찰을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이 적멸보궁 뒤쪽에는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탑이 세워져 있는데 선조 38년(1605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경종 14년(172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최근에 새로 지은 "적멸보궁" 뒤편 오른쪽 앞에 건립되어 있는 치아사리탑은 천고의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방형의 지대석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구분한 팔각원당형의 부도입니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는데 하대석에는 복련, 상대석에는 양련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은 높이 53cm의 구형인데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낙수면과 상면이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개의 돌로 조각된 상륜부는 연국문대, 편구형부재, 상단에 여의두문이, 하단에 화문이 새겨진 부재가 있고 사리탑의 전체 높이는 1.6m입니다. 지금의 적멸보궁은 1994년 5월 25일 준공하였습니다.
건봉사 불이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
건봉사 전체가람의 정문에 해당하는 불이문(不二門)은 1920년에 건립된 것으로 6. 25의 전화를 유일하게 면한 건물이다.
자연형의 장대석 위에 넓이 70cm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1.5m의 둥근 석주를 세웠다. 석주의 가운데 부분은 약간 볼록한 배흘림을, 정상부에는 돌림띠를 돌출시켰으며, 앞쪽 석주의 정면에는 커다란 금강저(金剛杵)를 새겨 놓아 눈길을 끈다.
천왕문을 따로 건립할 수 없었던 당시의 경제사정에 의해 불이문에다 금강저를 그려서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보탠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주 위로 나무 기둥을 다시 세우고, 그 위로 다포계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려놓았다. 정면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 매우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다.
천정에는 불이문 중건단청 대시주(不二門重建丹靑大施主) 설암당봉흔(雪巖堂奉欣) 불기2955년 무진 4월일(佛紀二九五五年戊辰四月日)이라 묵서로 쓰여진 현판이 있다.
기둥의 금강저(金剛杵) 문양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선생 글씨이다.
불이(不二)란 모든 분별이 소멸한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모든 망상으로 인한 시시비비가 사라진 자리입니다. 일(一)은 '진리'를 말하고 이(二)는 '거짓, 가짜'라는 말이니 불이(不二)란 거짓이 '아니다. 가짜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망상으로 인한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거짓망상을 걷어냈으니 그 자리는 해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불이문은 해탈문(解脫門)으로도 불립니다.
불이문 기둥에 금강저를 새긴 것은 금강문이나 천왕문을 기능을 두루 겸한 뜻이 있습니다. 금강저는 고대의 인도의 무기입니다. 인도의 여러 신과 역사(力士)들이 적을 항복시킬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단단함 때문에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이는 곧 마음의 번뇌를 없애 주는 상징적인 뜻으로 변하여, 특히 밀교에서는 번뇌를 부수는 보리심(菩提心)의 상징으로 수행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가 부처님의 신통력을 이어, 금강저로 악마를 쳐부수어 티끌같이 만든다."고 설한 바와 같이 금강저는 금강역사가 들고 있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이 돌기둥에 금강저를 새겨 놓은 것은 금강역사가 삿된 무리들이 청정한 불법세계에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결연한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문에 들어서는 불자들은 번뇌를 부수고 보리심을 발하라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건봉사 상징석 솟대 같은 아미타불 석주
극락전 지역의 현존 유물로는 입구의 커다란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는 입석(立石)이 있다. 사각형의 석주를 3m높이로 세우고 그 위에 돌로 봉황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새는 대웅전 쪽을 바라보게 앉혀 주목된다. 석주의 동쪽 면에는 한글로 ‘나무아미타불’을 북쪽 면에는 한문으로 ‘南無阿彌陀佛’을 새겼으며, 남쪽 면에는 ‘大方廣佛華嚴經’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서쪽 면에는 ‘佛紀 二九五五 戊辰夏’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연도는 북방 불기식 표현이다. 여기에서 1027년을 빼면 우리가 사용하는 불기가 된다고 한다. 그럼 우리식 불기로 1928년이 된다. 불기 아래 무진하(戊辰夏)라고 새겨져 있는데, 1928년과 맞아 떨어진다.
건봉사 극락전 지역 전경. 건물은 모두 상실되고 터만 남아있다.
앞에 보이는 누각은 봉서루(鳳棲樓)입니다.
눈앞의 다리는 능파교이고 이 다리를 건너면 봉서루.
두 석주 기둥이 극락전 영역의 입구임을 알려 줍니다
전면의 전각들은 템플스테이로 이용되는 요사체이다. 앞에는 2개의 석주가 세워져 있고 연못이 있다. 용사활지는 용과 뱀이 함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용은 부처나 깨달음을 얻은 이를 상징하고 뱀은 중생이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를 상징한다. 방생장계는 방생하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좌우에 연못을 파놓은 모양이다.
이 건물 뒤로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왕소나무
능파교를 넘다 보니 좌측 멀리 왕소나무가 보인다. 6.25로 산과 절이 활활 타오를 때에도 용케도 피해 살아남아 당당히 우뚝 선 왕소나무다.
1994년에 적멸보궁 뒤쪽에 세워진 부처님진신치아사리탑이다.
이 사리탑에는 부처님의 치아사리 3과가 모셔져 있다
(빌여온 사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온 치아 진신 사리를 모신 탑
건봉사 진신사리탑
건봉사에는 사명 대사가 모셔 놓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진신사리탑이 있고, 이 탑을 참배하기 위한 적멸보궁이 있다. 진신사리탑은 일명 세존영아탑(世尊靈牙塔)이라고 하여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하였다. 이 사리탑은 1605년(선조 38) 사명 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와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1724년(경종 4)에 건립하였다. 따라서 치아와 사리가 건봉사로 온 뒤 120년가량은 다른 곳에 모셔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이 3.45m인 이 탑은 한 변이 1.8m인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의 모양을 이루며 우뚝 서있다. 기단부 하대석의 밑부분에는 8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16잎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는데, 귀꽃을 8면의 모서리에 돌출되게 세워 놓지 않고 16개의 연꽃잎 속에 바로 새겨 넣었다. 기단부 중대석에는 동심원을 새기고 그 안에 범자(梵字)와 만(卍)자를 새겨 놓았다. 이 경우 사리탑의 정면에는 ‘卍’이나 ‘옴’이 와야 한다. 그런데 현재에는 다른 범자가 정면에 놓여 있다. 이는 1986년 도굴꾼들의 만행이 있은 후 잘못 놓은 것으로 보여 진다. 마땅히 고증을 거친 다음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건봉사 능파교(보물 제1336호)
건봉사 일원의 4개 홍예교 중 규모가 크고 가장 견실하게 보존되어 있는 이 다리는 1708년 (숙종24) 처음 건립되었고, 1745년과 1880년에 중수되었다. 현재의 다리 폭은 3m, 길이는 14.3m, 높이는 5.4m로서, 다리 밑쪽에서 올려다보는 둥근 모양의 홍예가 아름답다. 흔히 능파교(凌波橋)로 부르는데, 본래 이름은 산영교(山映橋)가 맞다.
능파’란 흔히 가볍고도 우아한 미인의 걸음걸이를 형용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고해(苦海)의 파도를 모두 헤치고 이제 해탈의 부처님 세계로 건너간다는 의미에서 능파교라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홍예교는 2002년 루사 태풍 때 거의 훼손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십바라밀석주 설명 안내판
능파교(凌波橋)를 건너면 대석단(大錫壇)이 보이고, 대석단의 중앙통로 좌우로 높이 158cm의 사각형 석주 2기가 서 있다.
이 석주에는 십바라밀(十波羅蜜)의 도형이 음각되어 있어, 십바라밀석주(十波羅蜜石柱) 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비록 조성연대는 1920년이라 하지만,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이다.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에다 이 여섯 가지를 보조하는 방편(方便)ㆍ원(願)ㆍ력(力)ㆍ지(智)의 4바라밀을 첨가하여 구성한 것이다.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 가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
봉서루 앞 계단 위에 서 있는 십바라밀석주(十波羅蜜石柱)
십바라밀석주의 문양의 뜻
원월(圓月) 이는 보시바라밀을 나타낸다.
곧 재물과 진리와 두려움을 없애 주는 3종의 보시를 베풀되, 그들을 만족시킴에 마치 청정한 허공에 보름달의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둥근달을 묘사한 것이다.
신날(鞋經) 이는 인욕바라밀을 나타낸다.
해탈의 바라밀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욕됨을 참고 나아가야만
가능하다. 마치 신날이 돌 뿌리 등 바깥의 모든 장애물로부터 발을 완전하게 보호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도우 듯이 인욕의 자세로 나아가면 어떠한 어려움이 부딪쳐 와도 해탈의 저 언덕으로 나아가는 발을 보호하여 쉽게 도달할 수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구름(雲) 이는 선정바라밀을 나타낸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삼매(三昧)를 이루게 되면 마음속의 모든 열기와 번뇌가 소멸되어 청량을 얻게 된다. 이 선열락(禪悅樂)이 마치 열기로 가득찬 대지를 구름이 덮어서 시원함을 안겨 주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선정을 구름 모양으로 묘사한 것이다
좌우 쌍정(左右雙井) 이는 방편바라밀을 나타낸다.
물 한 점 없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을 편안하게 인도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방편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다. 따라서 하나의 원천에서 좌우로 두 우물을 나누어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듯이 보살은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고리두테(卓環二周) 이는 역 바라밀을 나타낸다.
수행을 할 때 힘을 투입하면 집중력이 생겨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집 주위에 담장을 쌓고 주야로 잘 돌보면 재산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하여 고리 테두리의 형을 취한 것이다.
반월(半月) 이는 지계바라밀을 나타낸다.
계율을 지켜 그릇됨과 악한 것을 방지하고 선행을 쌓아감이 마치 초생반월(初生半月) 어둠을 감하고 밝음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반달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가위(剪刀) 이는 정진바라밀을 나타낸다.
반야(般若)의 지혜에 의거하여 수행하되 결코 물러나지 않음을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과 같이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없음(有進無退)을 보여 주고 있다.
금강저(金剛杵) 이는 지혜바라밀을 나타낸다.
지혜는 능히 두터운 번뇌의 산을 파괴하여 불성(佛性)이라는 보배광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지혜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것은 마치 견고함(堅), 예리함(利)과 밝음(明)의 세 가지 특성을 갖춘 금강저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 같다고 하여 이러한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전후쌍정(前後雙井) 이는 원 바라밀을 나타낸다.
위 아래로 하나씩의 우물을 둔 것은 귀하고 천함,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신분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피안에 이룰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래위로 우물을 배열한 것이다.
성중원월(星中圓月) 이는 지 바라밀을 나타낸다.
삼계(三界)와 삼세(三世)의 세간적인 지식(偏知)을 세 개의 조그마한 원으로 표시하고 불교의 정지(正智)를 바깥의 큰 원으로 표현하였다. 곧 정지를 갖추어서 반야의 지혜를 올바로 성취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금강산 건봉사(金剛山乾鳳寺)
편액의 글씨는 초당(艸堂) 이무호(李武鎬)선생 글씨랍니다.
만일염불회는 서기 758년 발징화상께서 정신, 양순스님과 1만일(27년 5개월) 동안 염불수행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는 법회를 하였는데 만일이 되어 회향하는 날 기도에 동참했던 스님 31인이 건봉사를 중심으로 1.5km 지점까지 허공위로 날아가 육신은 땅에 버리고 정신은 서방정토에 극락왕생한 이적을 남기셨던 염불 대법회를 일컫는다.
건봉사 등공대
서기747년 발징화상께서 정신 양순 등 수행승 31인과 신도 1.820명의 참여로 아미타만일염불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만일동안 신행을 닦았는데, 해마다 신도 1,700인은 쌀 한말과 향유 한 되의 식량 시주를 하였고, 신도 120인은 오종포 한단의 의복 시주로 만일을 공양하였다. 29년이 지나 서기776년 (병진년) 7월17일 아미타불께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시어 크게 칭찬하시어 수행승 31인을 극락세계로 이끌자 이어 신도 1,820인이 기쁘고 경사스러워 1,300여번의 절을 하자 신도 913인 또한 극락세계로 이끌어 나머지 신도 907인이 남아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어 두 번 더 아미타부처께서 나타나시어 18인과 30인을 극락으로 이끄시며 발징화상께 나머지 859인은 부처님 수기를 입고 다시 태어나 제도하라고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그 자리에 건립한 등공대가 건봉사 북쪽 능선을 따라 5리를 가면 위치하는데 능선 끝이 봉긋하여 연꽃의 분 술이요 어우러진 산봉우리는 연꽃잎이라 할만하다. 상서롭기 이를 데 없는 이곳 등공대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지극 정성으로 염송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아미타부처님의 가피를 입는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금강산 건봉사와 석가여래 진신 치아사리
진신사리는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말하며, 신체부위와는 관계없습니다.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을 적멸보궁이라고 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는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입니다.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여기에, 선산 도리사, 강원도 건봉사 , 비슬산 용연사를 포함하여 8대 적멸보궁이라 합니다.
명부전 옆에는 만일염불원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건봉사 종무소다. 이곳에 바로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가 있다.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종무소를 거쳐 친견하도록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가운데 한 곳에 불빛이 비친다. 그곳에 진신치아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부처님 진신치아사리가 너무 완벽하고 깨끗하다. 25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이렇게 귀한 성보를 보게 되다니, 다 부처님의 가피인 것 같다.
1.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의 봉안배경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636년(선덕왕 5년)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중 일부이다. 자장율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 월정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일어난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하여 갔다. 그 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 등의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왔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석가여래치상탑비를 세워 봉안하였다. 이것은 귀중한 진신사리가 다시 약탈될 경우를 우려해 분장한 것이다. 그런데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 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부터다.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서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한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지만, 관리 또한 어렵다는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 운운, 유유자적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는 척했다. 일당은 12일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다. 하지만 잘못 가져간 것이다. 6월 하순부터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것이었다.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한달 여에 걸친 7월14일, 일당 중 주범 ㄱ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ㄱ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다.
건봉사 측은 결국 되찾은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만일염불원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한다. 사리4과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의 의미
국내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한 사실이 분명하므로 그 가치가 더욱 높은 셈이다. 치아사리는 세계에 15과 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 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한다.
건봉사 부도 밭
아도화상과 도선국사, 나옹화상,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등이 이 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고승들이니 한국불교사가 여기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승군을 일으켰고, 일본에서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찾아 건봉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는 만일염불원에 모셔져 있어 일반인들의 친견이 가능하다.
이 치아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었다. 이것을 임진왜란 때 일본이 훔쳐가자 사명대사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판을 벌여 되찾아 왔다. 그 후 건봉사는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00년대 초까지 영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의 아픔도 배어 있는 곳이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북한의 통치권에 묶이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두고 재앙을 맞이했다고 한다.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을 벌인다. 3~4대의 폭격기는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었다. 향로봉·건봉산 전투는 물론 북한 쪽의 351고지전투, 월비산 전투 등 전사에 남을 지루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발에,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국군 수도 사단을 시작으로 이곳에 교차 투입된 국군 부대가 7개 사단에 이르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건봉사의 남아 있던 전각과 요사채는 군부대 막사와 땔감으로 헐려 나갔단다. 휴전 후에는 주둔한 군부대의 실화로 낙서암 지역이 소실되는가 하면 고승들의 부도탑이 밀반출되고 그 많았던 중요 문화재들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첫댓글 만일염불회의 시작을 건봉사에서 하였으니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무상지법인 나무아미타불 염불법이 모든 중생들에게 전파되어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불설무량수경에서 나무아미타불 염불법보다 더 믿기 어려운 법은 없다고 말씀하시고 시방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증명해 주십니다.
믿기는 어렵지만 믿고 행하면 쉬우면서도 그 과는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몸받기 어려운데 먹고 살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다 생을 마치는 그것이 지복이라고 생각하는데, 한번 인간 몸 잃으면 언제 받을지 모릅니다.
아직 사람 몸 있을때 무상대도인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배산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
가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빈손으로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니 그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