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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5,1-15ㄷ
그 무렵
1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회개>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오늘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들만 고쳐 주셨다고 고향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고향 사람일지라도 듣고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데, 아무리 사실이라도 이런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런 도발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고향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일까요?
고향 사람 입맛에 맞는 말은 하지 않으려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고향 사람들을 사랑치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첨꾼이 아니라 사랑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첨꾼은 결코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아첨하여 그에게서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얻어내거나 이루려는 자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정 유익한 말, 곧 바른말을 하여 그를 진리와 진실에로 돌아서게, 다시 말해서 거짓과 잘못에서 그를 회개케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진실한 믿음으로 돌아서도록 도발하십니다.
왜냐면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적당히 얘기하면 또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에, 폐부를 찌르는 도발적인 말을 해야만 똑바로 알아듣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수긍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주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분노하고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만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님도 배척합니다.
이제 이들에겐 주님이 고향 사람도 예언자도 구세주도 아니고 원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무장하기에 보통 확신범과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는 확신에서 하기에 거리낌이 없는데, 그 생각과 믿음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그러하지요.
요즘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못된 믿음으로 확신에 차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고, 천주교 신자들은 다행히도 그리 많지 않은데 그것이 꼭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신범이 될 만큼 자기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향 사람들에게 회개를 바라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믿음의 회개입니다.
잘못된 확신은 강할수록 더 큰 죄이고, 더 회개가 필요한데,
자기가 믿는 종교만 옳다는 믿음,
하느님을 자기가 믿는 종교 안에 가두는 믿음,
곧 자기 종교가 가르치는 하느님만 하느님이라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신자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
그래서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믿음은 하느님을 왜곡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정말로 잘못된 믿음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경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리 회개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 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화가 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부한 상태인 이유>
채종기 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분노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우리나라의 오랜 상징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범행 당시 68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 전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이런 망언을 늘어놓습니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런 문화재는 재 복원하면 되잖아요.”
토지 보상은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건설사는 약 1억 원의 감정 평가를 내렸고 채종기 씨는 5억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분노를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채종기 씨의 경우처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마치 일부러 화가 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분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의 예를 드십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와서 자신들이 메시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말에 분노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반복됩니다.
감정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여러 감정을 말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 가지인데 투쟁-도피-경직의 세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은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위협에 다시 직면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달아나게 됩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생각합니다.
‘담부턴 이 산에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나라는 뭐 하는 거야? 저런 멧돼지를 잡지도 않고.
아 짜증 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렇게 감정은 생각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을 인식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몸의 반응은 생존을 위해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의 아미그달라라는 생존 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연결된 것이 자율 신경계입니다.
자율 신경계는 몸의 근육이나 장의 운동, 심박수나 체온 등을 담당하는데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붙어있습니다.
대뇌는 생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변연계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뇌는 신체의 변화를 해석하여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그때의 기억보다도 감정을 기억하며 그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삶을 유지합니다.
이 역할을 전두엽이 합니다.
전두엽은 인간만이 가진 가장 발달한 뇌의 부분입니다.
자, 이제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생존을 포기하면 됩니다.
생존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존을 포기할까요?
‘평안’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 해답을 압니다.
자신의 생전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대상에게 마치 보험 들듯이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네 살 아이가 호흡 곤란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을 안아 달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안으면 자신은 부모를 더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존재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서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부모의 포옹에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에 더는 잃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잃을 생명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부모의 품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나 화, 두려움 등이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생존권을 내어 맡길 대상을 만나지 못한 이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나의 생존권을 보장 받아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품에 맡깁시다.
그러면 모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보험입니다.
왜 돈에 대한 보험은 들면서 감정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 것일까요?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
나자렛 사람들은 참으로 큰 축복과 은총,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느님, 그토록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아 예수님과 동향(同鄕)이라는 것 얼마나 큰 영예였을까요?
예수님 입장에서도 나자렛 사람들,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면서 갖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었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계셨기에, 그 어떤 사람들에 앞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대상자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경한 사람으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즉결심판에 처하려고 합니다.
일정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죽입시다!’ ‘옳소!’ 하는 식의 인민재판식으로, 다수의 폭력으로, 예수님 한 사람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참으로 큰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천부당만부당한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구사일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셔서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단죄하는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십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 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마을을 등지십니다.
이제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록 동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복음의 수혜자가 됩니다.
세례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수도 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성당 가까이에 산다고 해서, 단체장을 맡는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의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 나가려는 매일의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몸 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왜 화를 냈을까?>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자, 나자렛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화를 덜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도’가 아니라, ‘이방인들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너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크게 화를 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유대인들만 선택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방인들만 구원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그렇게 표현해서 나자렛 사람들을 자극하셨을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믿고 청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는 엘리야 예언자를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고, 또 나아만처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청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먼저 하느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라는 것.
하느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의 특권의식과 선민사상은 초대교회 내부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는데(로마 10,12-13), 바리사이파 출신인 일부 신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사도 15,1-5).
그래서 결국 그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열렸고(사도 15,6), 사도회의는 필수적인 몇 가지 율법 외에는 유대교 율법들을 모두 폐지했습니다(사도 15,28-29).
말하자면, 유대인으로 귀화하지 않아도 이방인들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공식 확인한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갈라 3,26-29)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메시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유대인들만의 특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입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특별한 은총’이라는 말도 이스라엘에게만 차별적으로 더 큰 은총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믿는 은총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당신을 계시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민족들을 인도하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분명 큰 은총이고,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특권이나 특혜가 아니라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된 은총입니다.
특히 ‘회개’를 면제 받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더욱더 진실하게 회개해서 이 은총 상태를 잘 유지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되고 멋진 믿음 - 선입견,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시편 42,2-3ㄱ)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가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참된 믿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이와 더불어 참되고 멋진 믿음,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절대 혼자의 믿음이 아닙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섬같은 고립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에 자리잡은 활짝 열린 믿음이요 하느님 향한 순례 도상(途上)중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도반들을 만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일기를 쓰듯 하루를 여는 강론입니다.
여러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아무 걱정 마시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치료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저의 평생 절친(切親)이신 주님께 특별히 제가 당부해놨습니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주님께 당부해놨다는 말씀에 빵 터지는 웃음꽃이었습니다.
신나게 웃었습니다. 당부해주셨다는 말씀에 힘이 납니다.”
이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이 흡사 수십년동안 제 절친이란 생각에 아픈 자매님께 힘이 되고자 드린 덕담입니다.
2.
강론집이 지체되었다는 소식에 어느 순수한 믿음의 자매님이 답을 주었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가 그 자매님 나으실 때까지 제본해 드릴까요?”
“너무 감사합니다. 자매님답습니다. 당분간 보류하고 쉴까 합니다.
하게 되면 그 자매님이 하게 될 때까지 자매님께 부탁하겠습니다.
청하는 마음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봄꽃 감사 선물로 드립니다.”
“와 꽃이 폈군요!!! 신비롭습니다.”
“매화꽃 수수하고 맑기가 자매님 영혼같아요,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의 영혼!”
3.
“매화꽃이 아름답고 우아하네요. 우아한 자태가 울 신부님의 거룩함을 닮았습니다!”
“자매님도 파스카의 봄꽃을 닮았지요! 겸손한 사랑!”
4.
“예고치 못했던 병마와 싸우려니 지칩니다. 체력이 고갈상태라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다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들었다 바로 참회와 회개했습니다.
신부님 아프지 마세요. 신부님 편찮으시면 저희 모두 무너집니다. 제사랑드립니다.”
정말 감동적인 믿음입니다.
‘신부님 아프면 저희 모두 무너진다’라는 말이 마음깊이 새겨졌습니다.
참으로 혼자의 고립된 섬같은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있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5.
어제 베네딕도 규칙을 공부하면서 “다함께(All together)”란 대목의 해설에 적극 공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에로 각자 개별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1등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려 노력하는 경주자가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말처럼 어느 사람이 다른 이의 월계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달린다.
수도자는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없이 더 이상 혼자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선 안된다.”
6.
조선시대 중기 대학자 화담 서경덕에 대한 소개도 잊지 못합니다.
정말 믿음의 삶에 “신독(愼獨)”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했습니다.
‘서경덕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강조한 것이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의리의 출발은 혼자 있을 때 행동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데, 이를 신독(愼獨)이라 했다.
여색을 탐하는 것은 바로 신독을 못한다는 것이고, 신독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옳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참 멋진 믿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음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은 고향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실망을 반영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질투와 편견, 선입견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은 선입견과 편견에서 많이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는 이런 편견과 선입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삼년 육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엘리야를 시돈 지방 믿음 좋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합니다.
또 하느님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경계와 벽이 철폐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감동하시는 것은, 인종도 국적도 성별도 아닌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엘리사와 나아만의 만남이 멋집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인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나병 덕분에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지닐 수 있었고, 마침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혜성처럼 등장한 이스라엘의 포로 소녀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실지 모릅니다.
깨어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 작은 손길입니다.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응답한 여주인은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찾도록 합니다.
나아만의 등장에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임금은 두려워 옷을 찢엊지만,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의 대응이 참으로 신속하고 기민합니다.
엘리사에게는 편견도 선입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참 순수하고 참된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입니다.
엘리사의 처신이 얼마나 의연하고 당당한지요.
심부름꾼을 시켜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거라 말씀하십니다.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요르단강물의 효험이 아니라 믿음의 효험, 하느님 힘의 효험이기 때문입니다.
열화같이 성을 내던 나아만은 부하들의 충고에 즉시 회개하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히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나오니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의 겸손한 믿음에 하느님은 치유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도 믿음도 멋지고 회개한 나아만의 믿음도 멋집니다.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멋진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나아만의 하느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그는 나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유까지, 전인적 치유의 축복을 받았음을 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도 아닌 내 믿음 부족뿐이요, 유일하게 청할 것은 믿음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참된 믿음입니다.
나아만과 복음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사를 만나 회개와 더불어 치유받은 겸손한 믿음의 나아만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무지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는커녕 화가 잔뜩난 이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은 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뜨려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유히, 홀연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믿음의 승리, 믿음의 자유입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이, 편견과 선입견, 두려움이 사라진 눈밝은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복된 사순시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시편 43,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어로 ‘이해’는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으면 이해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근대의 문을 열었던 유럽의 르네상스는 문학, 예술, 과학, 의학에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1000년 동안 이어오던 중세의 ‘규범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렸습니다.
이슬람 문명이 번역한 고대의 학문과 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혔습니다.
반면에 ‘오해’는 ‘mis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내가 왕년에 다 해 봐서 안다.’라는 말을 자주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학문이라고 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이 유일한 통치기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주교를 박해하였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하였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도 합니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처음 들어도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노인대학 미사가 화요일에 있었습니다.
제대회에서는 소성당에 미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착각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대회 자매님께 먼저 묻지도 않고 미사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자매님은 소성당에 모든 준비를 해 놓았는데 제가 짜증을 냈으니 무척 난감하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착각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자매님께 사과하였습니다.
자매님도 저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제대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도 조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조조의 성급함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보낸 나아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나아만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초지종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 강 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었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초지종을 듣기 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계명과 율법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초월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굳이 땅 위의 길이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계명, 율법, 규정이 필요 없으신가요?
아니면 사랑의 계명, 봉사의 율법이 아직은 필요하신가요?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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