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가족
노 승 희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햇살이 무릇 열매들을 보듬어 영글게 하는 여름 내내 뻐국새 농장에서 수확을 기대할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나 이기에 과연 내가 심은 고구마도 알이 들어 여물었을까. 반신반의 했다.
하늘이 유난히도 깊고 소슬바람이 상큼하게 불던 시월 어느날, 자연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 면서도 정작 흙에 대해서 더 할수 없는 무지로만 평생을 살아온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해보며 어쨌거나 들뜬 마음으로 농장에 갔다. 모른다는것은 앎이 없으므로 지식의 창고가 비었다는것일진대, 무지라고 하는것이 때로는 반드시 부정의 의미만이 있는것도 아닐성 부르다는 변명아닌 변명을 해 본다. 호박씨 한 알 묻어본적이 없는 나는 흙이 아니면 할수 없는힘, 그 계량할수 없는 힘을 모르기에 오늘의 수확이 어느누구 보다도 큰 의미가 있고 몰랐던 그만큼 더욱 신기하기만 느껴지기에 말이다. 조금은 늦었다는 오뉴월 쨍쨍한 볕 아래 뻐꾹새 울음 소리를 들으며 밭이랑을 만들던 날, 속으로 투덜거리던 일을 되돌아보면 오늘이 있기까지 수고한 손길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었다.
가을의 고구마 밭은 누군가가 일부러 다져놓기라도 한것처럼, 아니 열어보일수 없다는듯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막상 호미를 들고보니 나는 염치도 없이 거의 탐욕에 가까운 기대에 살짝 흥분까지 되었다. 짙은 자색의 표피가 보인다. 곧 얼굴을 내밀 고구마에 대한 설렘으로 눈 부릅뜨고 몰입한것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작은 일에도 설레이고 가슴 떨리던 청춘의 날들은 얼마나 아득한가. 그날이 그날 같은 무덤덤한 일상에서 마음 설레인다는것은 알수 없는 미지의 행복과 맞닿아 있는 꽃봉오리 같은 감정이다.
드디어! ..씨알 굵은 몸체가 들어난다. 와아! 탄성이 터졌다.
하나의 줄기로 시작해서 아주큰놈부터 영 작은놈 까지 줄줄이 연달아 매달린채로 머리를 맞대고 다 함께 서 있다. 하늘을 향해 오롯이 뭉친 가족의 형상이다. 하나 둘 셋 넷 ..예닐곱 식구는 족히 되겠다. 스포츠 경기중의 작전타임 같기도 하다. 게임을 멈추고 주어진 시간에 서로 보듬으며 한 마음으로 뜻을 모으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맏형과 큰언니 조카와 손자도 보인다. 옆엣놈이 힘주어 들어오면 맞받아치지 않고 슬그머니 양보한듯 몸을 움추린놈도 보인다. 서로가 협력하여 이루어놓은 완전한 가족이다.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손으로 빚었을까. 왜 눕지않고 서 있는것일까. 저 단단한 흙을 연약한 뿌리로 어찌 밀고 들어갔을까. 왜 흩어지지 않고 뭉쳐있을까. 하는 의문들을 덮어둔채 같이 한 선생님들의 환호속에 떨어질세라 붙어있는 고구마 가족을 조심조심 품에 안았다.
은혜롭게도 한 아름이다.
'고라니란놈이 죄다 뜯어먹고 갔어요' 하시던 교수님 말씀에 그 고라니가 너무나 귀엽다고 웃으며 응수한 자신이 부끄럽고,
'고구마가 다 말라 죽어가요' 하던 회장님의 애 타던 말씀에도 달려가지 못했던것이 죄송하기 그지없다.
땀도 흘리지 않고 공으로 얻는듯한 미안한 마음도 기대이상의 수확의 기쁨에 달떠서 슬그머니 덮히고 말았으나 죄스러움은 언제고 앙금처럼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날 밤, 정거장엔 스물여섯 젊음으로 빛나는 아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벤치에 엄마와 나란이 앉은 녀석은 뻐국새 우는 농장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가족'... 이보다 더 따뜻하고 정다운 이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농장의 문우님들도 어느새 애틋한 정을 나누는 한 마음 밭 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을날의 쓸슬함도 날아간듯 가슴이 훈훈해지고 기대어도 좋은 어깨가 있는 사람처럼 은근히 든든한 마음이 든다.
얻은것이 어찌 고구마 뿐이겠는가.
품에 안고 가는 고구마는 당연히 즐거운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정신적인 수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어진다. 콩크리트 세상에서 쌓인 구석진 마음의 찌꺼기들을 자연의 순수함으로 씻고가는 투명하게 맑은 사람이고프다. 어느새 짜증과 불만과 허영과 오만에 물든 나를 벗어놓고 유년의 티 없던 시절로 돌아간듯 하다. 이보다 더큰 수확이 어디 있으랴. 모두가 아이처럼 천진한 마음으로 기뻐 하던 모습들과 가을 하늘 멀리 피어오르던 웃음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고구마 가족중 제일 잘난것을 골라 남편에게 줄것이다. 제일 예쁘게 자란놈은 딸이랑 나누어 먹고 제일 우람한것은 아들에게, 제일로 앙증맞은것은 손녀에게 주리라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참으로 즐거웠던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율리 뻐꾹새 우는 농장에서의 일이었다.
첫댓글 가로등 아래 벤치에 엄마와 나란이 앉은 녀석은 뻐국새 우는 농장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가족'... 이보다 더 따뜻하고 정다운 이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농장의 문우님들도 어느새 애틋한 정을 나누는 한 마음 밭 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을날의 쓸슬함도 날아간듯 가슴이 훈훈해지고 기대어도 좋은 어깨가 있는 사람처럼 은근히 든든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