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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다툼이 벌어진 유다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 것이다.
내 살은 참되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요한 6,54-55)
어제 우리는 “먹다”(τρωγω)라는 동사는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뜻으로 말씀을 온 몸으로 음미하며 살아가라는 의미, 곧 ‘실행’을 암시함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
(요한 6,56)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이 크신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55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다.”
오늘도 우리는 이 미사 중에,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고단한 일생일지라도 행복한>
오늘은 일찍 일어났는데도 수녀님들 피정 동반으로 긴장한 뒤끝이라 그런지 바로 복음 묵상이 되지 않고 나눔을 하고 싶지 않았고 한참 빈둥댔습니다.
쉬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선지 무슨 나눌 거리가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를 보니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과연 복되다 할 수 있는 건지 생각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이 되라면 나는 그것을 과연 은총으로 생각할지 그것이 의문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부터 자기의 인생은 없는, 아주 고달픈 인생이 바오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이때 이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오로”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오로”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실제로 주님의 종으로 아주 고단한 일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바오로를 당신의 그릇 곧 도구라고 하시고 그의 인생이 고단한 인생이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자기 이름은 날리지 않고 주님의 이름이나 알리는 자.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이 전부인 인생.
이런 인생인데도 바오로를 행복하게 한 것은 예수님을 소유함의 행복이 그렇게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후에 필리피서에서 이렇게까지 얘기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 쓰레기로 여깁니다.”
저도 이 지고한 가치 때문에 피곤한 줄 모르고 주님의 이름을 알리는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양가 있는 음식>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정성이 담긴 음식을 사랑으로 먹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으니 우리는 감사히 잘 받아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과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유사성을 가장 잘 회복하는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하나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보다 영양가 있는 영원한 생명이신 성체를 모시기를 갈망합니다.
더 자주 미사참례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면 구원이 없는지 설명하시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논쟁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우리도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조금 지나치고 억지 아니신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무조건 지옥이라고 하신다면 그 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가톨릭에서는 많은 경우 영양제나 치료제처럼 성체를 설명합니다.
상처나 병이 생겼을 때 성체 성혈을 영하면 힘이 생기고 상처가 치유된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예수님의 성체 성혈에 대한 커다란 모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음식이 단순히 건강만 유지하게 만드는 데 사용될까요?
하느님 자녀가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인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관련되어서 말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통해 배우고 이해함을 통해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성체 성혈은 단순한 성경 말씀과 구별됩니다.
부모가 살과 피를 주지 않고 가르침만으로 자신처럼 아이를 성장 시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루마니아의 차우슈에스쿠 정권(Nicolae Ceaușescu)은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를 다스린 공산주의 정권이었습니다.
차우슈에스쿠 정권은 높은 출산율을 통해 인구 증가를 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부분 가정이 무거운 세금을 물지 않으려면 다자녀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문제로 인해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동이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해 차우슈에스쿠 정권이 설립한 아동 보호 시설은 상당히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기초 시설과 인프라가 부족하였고, 사람들이 아동에게 필요한 보살핌과 사랑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시설 내에서 아동들은 영양 부족, 체계적인 교육과 의료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자란 아동들은 발육 부진, 정서적 및 인지 문제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고아원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고아원은 1941년 독일군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굶주림과 대규모 사망으로 인해 수많은 고아가 생겼습니다.
루마니아 시설과 마찬가지로 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발육 부진과 인지, 학습 문제의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엄마와 같은 포옹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생존하려는 방법으로 이 아이들은 몸을 앞뒤로 흔드는 일을 합니다.
동공이 풀려있고 머리를 처박는 등의 자해를 하기도 합니다.
음식은 먹었지만 사랑은 먹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마치 엄마 젖을 먹는 아이가 자신도 엄마와 같은 존재임을 믿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탄생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말씀이 나에게 의미가 있게 됩니다.
같은 말이라도 엄마의 말이 힘을 발휘합니다.
엄마는 나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은 엄마의 살과 피입니다.
아기가 젖을 먹을 때 엄마의 살과 피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곧 엄마의 죽음인 것입니다.
엄마는 그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고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다시 생명을 되찾습니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성경에서 이 신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알아보려면 예상해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체 안에서 하느님을 볼 줄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은 옥사나 말라야는 자신이 개라고 믿기에 인간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를 인간으로 만들려면 한 인간의 살과 피가 필요합니다.
그를 부모라 믿고 그 부모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절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이 교리 교육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기에 냉담자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왜 성체 성혈과 연결이 되는지를 깨닫고 그분의 살과 피가 아니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은 성체 신심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이 신학이 확립되지 않으면 코로나와 같은 것이 오거나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 또 쉽게 성체를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엄마의 젖 없이 아기가 아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 없이 누구도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죽음 체험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도행전은 혈기왕성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거칠 것 없이 탄탄대로를 걷던 한 유다 청년, 사울의 추락 과정과 주님 안에 거듭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정통 유다인이자, 바리사이 가운데 바리사이였으며, 유다교 수호에 목숨을 건 돌격대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제대로 율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오직 율법만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으며, 율법의 실천과 연구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런 사울이었기에 율법을 사사건건 비판하고, 자신이 목숨처럼 여기던 각종 세칙들을 모조리 어기고 깨트려버리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몰래 집회를 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인육제를 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통 유다교 수호의 첨병임을 자랑하고 있던 사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흉악한 행위를 서슴없이 일삼는 그리스도교의 척결에 앞장서기로 결심합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 섬멸이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특별 서한을 발부해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는 일종의 체포권, 체포영장을 신청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장 앞장섰던 적대자 중의 적대자 사울을 수제자 베드로 못지않은 중요한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체포하기 위해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드디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엄청난 밝기의 빛과 함께 사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갑니다.
갑작스런 하느님의 음성, 그로 인한 실명으로 인해 사울이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었던지 그는 사흘 내내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간 앞길이 창창했던 사울, 병원 한번 안 가볼 정도로 건강했던 사울, 오직 장밋빛 미래만을 꿈꿔왔던 사울, 지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내리막을 걸어보지 못했던 사울이었기에 당시 받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자존심도 완전히 바닥나 버렸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너무나 건강했던 사울이었기에 남의 손에 이끌려 걸어간다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체험은 사울 인생 전체의 분기점이 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사흘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사울의 내면에서는 대대적인 작업 한 가지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죽음 체험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가 신속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이끌려가던 사울은 그 치욕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재구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방향 설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해 완전히 추락한 사울이었지만, 제대로 미끄러진 사울이었지만, 그는 사흘이란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처참하게 부서졌던 예수님의 사흘을 사울 역시 온몸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가끔씩 사울에게 행하셨던 방식으로 접근해오십니다.
때로 기고만장한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내려치시고 심연의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십니다.
우리의 완고함, 우리의 똥고집을 완전히 꺾어놓으십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 안에 가끔씩 겪게 되는 추락, 실패, 바닥체험, 미끄러짐...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로 인해 새 인생을 출발하라는 하느님 측의 메시지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47절에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셨고, 51절에서는 “누구든지 이 빵을(나를)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54절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뜻으로는’ 같은 말씀인데, 표현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믿는다.”와 “먹는다.”와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모두 ‘뜻이 같은 말’입니다.
그냥 ‘믿는다.’ 라고 표현했어도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먹는다.’ 라고 표현하셨을까?
또 ‘먹는다.’ 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라는 ‘듣기 거북한’(60절)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종의 충격 요법을 사용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믿음’의 완성 단계를 나타내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머리로만 믿는 것은 초급 단계입니다.
가슴으로(마음으로) 믿는 것은 중급 단계입니다.
온 삶으로 믿는 것은 상급 단계이고,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은 최상급 단계이고, 믿음이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 ‘먹는다’로 표현되었습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는 엄마를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엄마를 먹는 것은 아니고 탯줄로 연결되어서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이지만, 사실상 엄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와 태아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처럼 당신과 신앙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또는 당신의 살과 피를 모두 신앙인들에게 내주십니다.
“나를 먹어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따라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로 해석됩니다.
뒤의 17장에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한 17,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그 일이 ‘완성’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체는 진짜로 예수님의 살이고, 성혈은 진짜로 예수님의 피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코린 10,16)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1코린 11,27-29)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성체성사가 그저 작은 빵 하나를 먹는 예식으로만 보이겠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살과 피가 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생명력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바로 그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성체모독죄’ 라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씀은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요한 15,4)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성체로 변화시켜서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내 안에 머무르시는 일이고, 내가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 일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안에 머무르시겠다는, 또 우리와 하나가 되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나타내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의지’는 곧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먹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심의 은총, 회심의 여정, 일치의 여정 - 회심과 성체성사>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시편 117,1)
사울의 극적인 회심 장면은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사울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기다려온 주님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사울이 회심에 이른 결정적 장면 중 주님과 사울과의 대화입니다.
때가 되자 주님은 결정적 순간 번쩍이는 빛과 더불어 다마스쿠스 도상의 사울에 나타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박해받는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이십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당신 제자들과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니아스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주님의 생각은 이처럼 깊고 그 시야도 한없이 넓고 깊음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사울이 하나니아스를 만나 안수를 받고 자초지종 사연을 듣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이어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회심의 은총, 회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끊임없는 회심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심의 습관화”를 이뤄주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회심의 시스템”과도 같은 일과표에 따라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 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새삼 회심 역시 의식적 선택의 은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회심과 함께 가는 개안의 여정이요 날로 눈이 열려 밝아지는 영적 시야입니다.
사울과 같은 극적인 회심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적인 회심도 있고 이런 회심이 대부분입니다.
회심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회심의 여정에 성체성사의 영향은 결정적입니다.
회심과 더불어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우리는 더욱 주님의 성체성사를 갈망하고 찾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이 더욱 끊임없는 회심의 여정을 살게 합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회심의 은총입니다.
눈이 열려야, 깨달음의 은총이 있을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깊이를 깨닫습니다.
무지한 유다인들에 대한 주님의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의 전인적인 일치가 날로 깊어가면서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충만한 삶, 영원한 삶이요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참 삶의 여정에 회심과 성체성사의 은총의 역할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이런 상호내주(相互內住) 일치의 은총이 전인적 변화와 더불어 주님을 닮은 참나의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로서 자유롭고 행복한, 아름다운 삶을,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믿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끊임없는 회심과 더불어 날로 믿음을 북돋아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의 힘으로, 주님의 힘으로,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아름답고 영원한 복음 선포의 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우리 위한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시편 117,2ㄱ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아니나 다를까!
당신 살을 먹으라는 예수님 폭탄 선언에 유다인들 사이에는 다툼까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예수님께서는 계속 살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니 설상가상으로 피 이야기까지 보태시지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건드려 주셔서 영의 귀가 활짝 열려야 알아들을 수 있는 차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인간적,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차원으로 넘어가 버린 게지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예수님의 살과 피, 즉 그분 생명을 받아먹는 사람 안에는 이미 그분께서 계시고 또 그도 그분 안에 있습니다.
머무름.
서로가 서로에게 머무르는 것은 일치입니다.
하나됨입니다.
그분이 내 영육으로 스며드시고 나도 그분 안에 스며들었으니 이제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말미암아"
(요한 6,57)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듯, 예수님을 먹는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말미암는다는 말은 원천이고 원동력을 뜻하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아버지 때문에/덕분에 사시듯이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덕분에 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이유, 삶의 이유가 됩니다.
벗님이 자식 때문에/덕분에 살고, 부부가 서로 때문에/덕분에 살듯이, 참으로 사랑 안에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이유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성체로, 말씀으로 현존하시고,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기둥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성체 신심은 있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 또는 "나는 말씀 연구는 재미있지만 이웃 사랑이나 봉사는 바빠서 못 해" 이런 말을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나눔과 봉사를 통해 직접 성체적 삶을 사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고 머무르고 실천하는 일은 별개가 아닙니다.
둘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삶이고 서로에게 머물러 일치하는 하나된 삶이지요.
말씀에 깊이 깊이 머무를 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알아들으려 말씀의 숲길을 샅샅이 헤치며 그분 자취를 찾고 말씀과 씨름하듯 끙끙거리며 애를 쓸 때,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릴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흡사 주님의 몸을 세세히 뜯어 먹고, 잘근 잘근 씹고, 되새김질 하고, 또 입에 지그시 머금어 맛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는 실제로 '아,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샅샅이 구석구석 뜯어 먹고 핥고 되새기며 먹고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마치 말씀이 실제로 살과 피가 되셔서 제 앞 식탁에 놓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땐 주님의 육화,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살이 되신 신비를 알아듣는 듯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살과 피는 그분의 원 존재인 '말씀'이십니다.
살과 피를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이 그분 존재, 생명을 받아 모신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그분을 말씀으로 영하고 또 살과 피로도 영하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존재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선 우리, 그분 안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 성체적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서는 열혈 유다교 신봉자 사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모하게 된 극적 사건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사도 9,3)
빛은 밝기를 지닌 빛이었을 뿐 그를 땅에 엎어트릴 만한 폭력적, 물리적 세기의 접촉은 아니었을 텐데, 번쩍이며 둘레를 비춘 빛만으로 그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빛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야기하고, 시편 저자 역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09,105)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이 빛의 타격, 말씀과의 접촉을 통해 자기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큰 빛 앞에서 작다란 빛도 못되는 인간적 시력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9)고 합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친히 파견하신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지요.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도 9,18-19)
인간적 시력을 잃었던 사흘 동안 그는 곡기도 끊습니다.
그동안 가진 신념이 무너지는 혼란과 두려움, 신비 체험에서 오는 충격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 볼 때 그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경계 지점에 있고, 죽음과 같은 진공적 휴지기를 통해 옛 인간의 흔적을 비워내는 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 그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고 하지요.
죽음의 시간을 거친 후 물과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어 영한 첫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사도행전 저자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며칠을 제자들과 보낸 후 곧바로 주님 선포의 길로 들어선 힘은, 그 음식의 영양학적 성분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사울은 빛으로 오신 말씀과 음식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변모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가 되어 불같이 타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말씀, 빛, 살과 피, 우리 곁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분류하고 구분하고 나누던 제각각의 존재들이 하나로 통합됨을 느낍니다.
요한 사도가 갈릴래아 바닷가에서 외쳤듯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아멘.
오늘 말씀과 빛, 살과 피로 또다시 벗님에게 오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함명춘 시인의 “종(鐘) 이야기”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마음에 울림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루에 걸린 종이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종소리였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그가 행했던 일을 따랐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종소리가 매일 들리지만 귀가 닫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교만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열등감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합니다.
부활시기에 우리는 독서에서 ‘사도행전’을 듣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하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령이 불혀의 모습으로 사도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자가 된 사람도 수천 명이 넘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도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서로 나누었습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매 주일 공동체는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미사’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는 영이 열려서 사랑의 종소리를 전하였습니다.
성서에 예언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사랑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명예와 능력을 보이고 싶어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불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울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굳게 닫혀 있던 사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이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랑이 종소리’가 됩니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된 시몬과 바오로가 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큰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내는 사랑의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사랑의 종소리가 되어서 지친 이에게 위로를 주었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었고, 원망과 분노는 이해와 평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살과 피를 우리가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살과 피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 세상에 퍼지는 ‘사랑의 종소리’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뉴스를 보면 많은 사건 사고를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에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프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무게가 분명히 더 무겁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대한 것이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음 아픈 거, 정상이야.
마음이 아프다는 건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최선을 다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는 아픔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무게가 가벼워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기에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마음 아파했습니까?
부활을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슬퍼해야 할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내 마음의 아픔이 작았던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우리 마음의 아픔 정도를 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느냐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무관심을 통해 아픔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싫다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음을 지적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의 삶에서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파서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어떻게든 용서하며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마음의 아픔을 만들지 말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얼마나 큰 마음의 아픔을 간직하셨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식인종들의 말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 사람’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몸을 내던지신 사랑의 모범을 보고,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마음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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