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강민이 그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다섯 시께였다. 그는 지독하게 지쳐 있었던 탓으로 오히려 쉽사리 잠 들지 못했다. 강민은 윤세화가 살해되는 그 끔찍한 광경 특히 잊 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살인자의 총구 앞에서 도망칠 래야 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베란다의 유리창문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그녀의 최후의 모습은 영원히 지워질 것 같지가 않았다. 더구나 우박처럼 쏟아져 내 리는 유리 파편과 함께 지상으로 낙하하던 그녀의 흰 나이트 드레스 차림의 모습은 한결 극명하게 그의 망 막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강민 그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아니 관객이었다. 살인자는 분명히 그의 관객을 의식한 몸놀림이었고 행 동이었다. 가히 예술적인 그의 솜씨를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아마 서운했으리라. 강민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내내 설쳤다. 윤세화의 길게 이어지는 비명소리도 하나의 환청으로 그의 귓전 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부서진 창가에 우뚝 선 검은 실루엣의 살인자! 살인자는 어둠 속에서 건너편 아파트의 강민을 한동 안 지긋이 쳐다보았었다. 강민은 새벽녘의 전화벨 소리에 몸을 고추세웠다. 그리고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그런데 아무 대답도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강민이 채근했으니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숨죽인 나직한 숨소리만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강민은 살인자의 전화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 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치달았다. '마침내 살인자가 나한테 바싹 다가선 것이다.' 강민도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살인자는 여전히 침묵했다.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 는 것이다. 그렇게 정적의 순간들이 흘렀다. 다만 강민 의 거친 숨소리만이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강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외치고도 싶었고 욕을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지금 처 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강 민은 소리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 "서둘지 말게!" 살인자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살인자는 이쪽의 심 리동태를 빤히 알고 있다는 어조였다. 그의 억제된 말 투에는 칼날 같은 차가움이 서려있었다. 그 목소리가 강민을 얼어붙게 했다. "다음은 자네 차례일세." 살인자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생기가 없는 그리고 리듬도 없는 메마르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다. "마지막은 물론 자네의 여자구 말씀이야." 살인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음미하듯 했다. 그런데 그 탁한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강민의 기억의 회로에 입력된 음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서둘지 말자구." 살인자가 남긴 마지막 대사였다. 그는 그의 앞에 차 려질 강민과의 최후의 성찬과도 같은 마지막 게임을 즐기려는 듯이 보였다. 그 사실이 강민을 못 견디게 했다. 강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 기만 했다. 일종의 쇼크 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뭔가에 이끌리듯 재빨리 창가 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는 커튼을 헤집고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는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고 있었다. 외등의 불빛도 희미했다. 새벽 안개가 아파트의 숲을 헤치며 자욱하니 흐르는 탓이었다. 그때 단지 주차장 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차가 있었다. 밤 안개 속 에 미등(尾燈)의 불빛이 유난히 빨갛다. 마동권의 차인 걸까?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나의 신경과민이든가...... 강민은 침대로 돌아와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그는 지금부터 그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골똘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마동권은 경찰이나 홍콩의 조직에 맡길 수밖에 없으 리라. 그나저나 늘 꺼림칙한 것은 엄대진의 불태워지지 않 은 시신이고 설지숙이 이 세상에 남긴 메모이다. 그때 문득 모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민하경의 전 남 편이자 청룡문신의 살인자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엄대진이 하경이 뿌린 독약으로 목숨을 잃었다면 모 건은 하경의 총구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모건의 얼굴 에 피어난 불신의 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달빛 어둠 속에 호수 깊이 사라지던 그의 모습도 잊혀 지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서조차 그는 하경의 비정함을 믿지 못 했으리라.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모건이 어딘가에 엄대진의 시 신도 설지숙의 메모도 숨겼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모건에겐 소용이 닿지 않겠지만 말이다. 강민은 그것 들이 끝내는 자신의 목을 조를거라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강민이 지금 당장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것들을 찾 아내 두루 없애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의 숨막히는 상황에서 헤어 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강민은 그 자신을 모건의 위치에 놓고 여러모로 생 각했다. 엄대진의 시신은 어디다 숨겼으며 설지숙의 메모는 어디에 감추었을까? 강민은 그의 수색을 일단 모건의 아파트에서 시작하 기로 했다. 그는 경찰을 가장해서 실제로 모건의 한강 변의 아파트를 수색했다. "나, 경찰이오!" 아파트 수위는 선선히 문을 따주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탓인지 집안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재떨 이에 남아 있는 담배 꽁초가 사람이 살았음을 일깨워 주었다. 모건!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집안은 하나에서 열까지 빈틈없이 깔끔하게 정돈되 어 있었다. 모건의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을 엿보는 심정이었다. 그의 와이셔츠는 한결같이 흰색이었다. 그 리고 그에게서 외롭게 살아온 사내의 체취 같은 것도 느꼈다. 특히 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 았다. 여자 머리 핀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고독한 암살자! 그의 삶의 보람은 무엇이었을까? 거실에 놓인 마란즈 상표의 오디오 세트가 강민의 눈길을 끌었다. 카세트 데크에 하나가 꽂혀 있었는데 모건이 생전에 즐겨듣던 노래인 듯싶었다. 강민은 파 워 스위치를 켜고는 플레이 보턴을 눌러 보았다. 이윽 고 흘러나온 노래는 강은철의 "삼포로 가는 길"이었 다. 강민은 이윽고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발견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굳이 발견한 것이라면 다만 거린 희수의 사진이었다. 엄희수! 하경은 희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할 수 있었 다. 아그리피나 황후가 그의 아들 네로에게 모든 것을 걸었듯이 말이다. 아그리피나도 필경은 아들을 위해 황제를 독살했던 것이다. 하경이 엄대진을 독살했듯 이...... 그런데 희수의 생부가 모건이라고 했다. 그렇다 면 하경은 어떻게 모건을 그토록 무참히 살해할 수가 있는 걸까. 강민은 아무 소득없이 모건의 아파트를 물러났다. 고독하게 살아온 한 사나이의 영상만을 가슴에 안고. 그런데 그가 녹색의 스틸 도어를 밀고 밖으로 나서 려 할 때였다. 바로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린 것이다. 그 요란스런 벨 소리에서 강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강민을 불러세웠다. 영겁의 고요와도 같은 정적을 허물고 빈 집에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 누구로부터의 전화일까? 그런데 전화를 받아야 할 주인은 죽은 지가 오래다. 그 사실은 신문에도 났다. 아니면 죽은 자로부터의 전화일까? 바로 청평호수 속의 모건한테서 말이다. 아마 마동권의 전화일 것이다. 그러나 살인자가 나를 미행하고 있는 것일 게다. 강민은 쫓기듯이 걸음을 떼었다. 그는 전화를 받을 엄두도 나지 않았고 영기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머리를 나꾸어체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모건의 아파트 계단을 뛰쳐내려갔다, 윗층을 향해 올라가는 엘리베이 터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 앨리베이터로 살인자가 올라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강민의 콩코드는 잠시 후 청평의 모건의 별장을 향 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가 오후 네 시께였다. 바로 그 시각에 종로서의 범도일 경위도 청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도 홀 로였다. 두 사람 다 조금 늦은 시각에 출발했다고 할 수 있 었다. 그들의 조바심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들이 청평유원지에 당도할 즈음해서 비가 시름겹 게 내렸다. 아직은 눈이 내려야 할 계절이었다. 바람도 제법 세 찼다. 아스팔트의 가랑잎이 비바람에 흩날렸다. 강민은 심란스럽기만 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뒤따르는 검은 짚차를 의식하고 있었다. 군용파카를 걸친 사나이가 운전하고 있었다. 누구일까? 강민은 얼마 후 그가 종로서의 범도일 경위라는 사 실을 알았다. 그는 일순 안도했다. 그러면서 다음 순간 실망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허탕치는 듯 싶었다. 그들은 이윽고 호반의 별장에 도착했다. "어떻게, 여긴......" 강민은 차에서 내리며 선수를 치듯 말했다. 그는 손 도 먼저 내밀었다. "뭣 좀 알아보려구요." 범경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네에." 강민도 의미모를 웃음을 띄었다. 비가 범경위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처럼 야전파카 차림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강민의 신 경에 거슬렸다. 강민은 뒷트렁크에서 우산을 끄집어냈 다. 그의 골프채에 매달린 빨강과 흰색이 배합된 큼직 한 우산이었다. 강민은 우산을 펼쳐들고 범경위에게로 다가갔다. 범경위의 눈길은 벙벙하니 주변 경관을 훑고 있었 다. 눈 앞에는 언제나처럼 호수가 출렁댔다. 그리고 숲 에 감싸인 빨간 벽돌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막하고 도 은밀하게. 뜨락의 풀장도 앙상하게 입을 벌리고 있 다. 그 모든 것을 겨울비가 휘저었다. 하늘은 점점 어 두워져 갔다. "좀 쉬었습니까?" 강민이 물었다. "쉬긴요......" 범경위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근데, 김형이 여긴 어떻게?" "뭘 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흠, 그래요오......" 그들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누구의 뜻이 랄 것도 없이 풀장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뜨락을 가 로지르자면 어차피 풀장을 지나쳐야 했다. 그들의 눈 길을 별 생각없이 풀장에 머물렀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엄대진의 철제관을 발 견하게 되었다. 강민이 먼저 발견했다. 그 관은 강민에 게 낯이 익었다. 그토록 찾아헤매던 관을 마침내 발견 한 것이다. 다만 경찰관과 함께 말이다. 경찰관이란 인 간을 교수대 위에 세우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 이다. 일순 오만가지 생각이 강민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 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종말이 마침내 눈앞에 다가섰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자명종 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그를 일깨웠다. 강민은 현기증을 느끼면서 휘청거렸다. "아니, 저게 뭐죠?" 관은 범경위의 눈에도 띄었다. 그는 둘째 손가락으 로 풀장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 철제관 하나가 댕그 마니 놓여 있었고 겨울비가 하염없이 적시고 있었다. "저것, 관이 아니요?" 범경위가 외치듯 말하며 강민을 돌아보았다. 그 목 소리는 환성에 가까웠다. 그 환성에 가까운 목소리에 강민은 한결 사색이 된 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범경위가 강민의 우산 밑에서 벗어났다. 그가 걸음 을 옮겼다. 아니 뛰쳐갔다. 풀장을 향해. 아니 엄대진의 관을 향 해. 강민도 무의식적으로 뒤따랐다. 그러나 그의 내부 에서 미친 듯이 솟구치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펴든 우산을 접으라고...... 그리고 그것으로 범경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라고...... 지금 어두워져 가는 이 호숫가에는 그들 두 사람밖 에 없는 것이다. 그날 밤 10시께에 강민은 하경이한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오......" 강민의 목소리는 한껏 낮았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 리라고나 할까. "저예요, 강민씨......" 하경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내 말만 귀담아 들어요." "거기 어디예요?" "청평이오." "청평이라구요? 거긴 왜요?" "제발 내 말만 귀담아 들어요." "네, 어서 말씀하세요." "경찰이 엄사장의 관을 발견했소." 강민은 얼마간 잔인한 만족감에 젖어 말했다. 그는 그가 충격을 받았던 것만큼 하경도 충격을 받아야 한 다고 생각했다. "으음, 뭐라구요?" 아니나 다를까, 하경은 격심한 충격을 나타내 보였 다. 그녀의 목구멍에서 신음이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강민씨, 지금 뭐라구 했어요?" 하경의 다급하고도 초조로운 그러면서도 간절한 애 원을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엄사장의 관을 경찰이 발견했다고 했소. 오늘 저녁 에......" "아, 강민씨!" 그건 이젠 오열이었다. 다음 순간 절규라도 울려올 것만 같았다. 강민은 하경이 보인 반응에 일종의 악마 적인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하경이 염려말아요." "염려를 말라니요? 그건 또 무슨......" 그래, 염려할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강민은 하경을 겁줄 수가 있었다. 지금 하 나의 역전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관에서 엄사장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소. 관에 선...... 내말 알아들어요?" "......" "관엔 엉뚱한 사람의 시신이 있었소. 엄사장의 시신 이 아닌 엉뚱한......"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그건 정말이다. 범경위가 철제관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곳에 반듯하 게 누워 있던 시신은 엄대진 사장이 아니었다. 그 지 탱하기 어려운 질식할 것 같던 순간을 강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범경위에 대한 살의를 굳혔었다. 그는 빗속에 우산을 접어 들어올렸었다. 심장은 파열 할 것처럼 무섭게 뛰었었다. 그런데 관 속엔 낯이 설 지 않는 그러나 엄사장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누워 있 는 것이 아닌가. 눈은 생선의 그것처럼 팽창한 채 치켜떠 있었다. 그 를 공허하게 쳐다보고 있다고나 할까. 입은 헤벌리고 있었는데 그 차디찬 도제의치(陶製義齒)와도 같은 하 얀 이빨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그게 누구예요?" 하경이 숨가쁘게 물었다. "하경이, 듣고 놀라지 말아요." 강민이 뜸을 들이는 듯했다. "글세 누구냐니까요?" 하경이 조바심을 나타냈다. "마...... 동...... 권!" 놀랍게도 강민은 마동권의 이름을 들먹였다. 살아서 이미 전설을 낳은 불사조 같은 암살자의 이름을. "뭐라구요? 마동권이라구요?" 하경은 못믿어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은 지금 마동권의 죽음의 손길 앞에서 허위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소." 강민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꾸였다. "그 무슨......" "그는 이미 죽은 몸이오. 죽은 지 두 달도 넘었을 거라는 얘기요. 경찰의 말로는......" "강민씨, 왜 이래요? 당신 취했어요? 아니면 실성했 던가......" "하경이, 나 말짱해." "근데 그 무슨......" "내가 돌아가서 얘기하리다." "으음." "내가 분명히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린 마동권의 손에서 깨끗하게 벗어났다는 사실이오. 이미 오래전에 말이오. 하경이, 그는 벌써 죽은 몸이오." 그건 사실이다. 두 달 전쯤, 청평호반에서 모건의 시신을 건져올리 던 날에, 마동권은 야전파카 차림의 게다가 경위계급 장까지 부착한 사나이한테 사살되었던 것이다. 마동권은 그의 적이 그토록 빨리 그의 앞에 나타나 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경찰간부의 모습으 로 말이다. 그건 그의 치명적인 오산이었다. 말하자면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다. 모건의 주검을 발견한 까닭으로 그의 불타는 복수심 도 그리고 위험을 냄새맡는 그의 훈련된 감각도 무디 어졌던 것이다. 그때 마동권을 어렵지 않게 살해한 야전파카 차림의 암살자는 해운대에서 올라온 한신애와 함께 청평호반 을 떠났었다. "강민씨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요?" 얼마간 숨을 돌린 듯싶은 하경이 물었다. "뭘 말이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일련의 살인은 뭘 뜻하느냐구요? M은 누구며......" "돌아가서 얘기하리다. 나한테 짚이는 사람이 있소." "어머, 그래요!" "암튼 기다려요." "알았어요, 강민씨......" 강민은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는 청평유원지의 '청 평가든'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전화를 했었다. 그는 지금까지 호반의 별장에서 범도일 경위를 비롯한 가평 서에서 달려온 형사진과 함께 있었다. 강민은 그곳에서 호흡이 멎는 듯한 순간들을 경험했 고, 다시 소생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삶과 죽음이 엇갈 리는 순간들을 체험한 것이다. 관 속에서 마동권의 시 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렇듯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고,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M의 진짜 정체는 누구일까? 그는 지금 분명히 마동권의 행세를 하고 있다. 절뚝 이기까지 하며 그를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 하경과 그녀의 공모자들을 향해 차례차례 한맺힌 일격 을 가하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강민은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하경에게 짚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강민은 엄효진이야말로 그들의 참다운 적이라고 생 각했다. 그 말고는 이제 아무도 없다. 모건도 죽었고 마동권도 죽었다. 그만이 남은 것이다. 그가 그의 형을 살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고 있는 것이다. 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렇듯 무기를 들고 일어 선 것이다. 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 렇듯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그토록 무서운 데가 있었던 걸까. 이제 적의 정체는 분명하다. 하경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지만 적의 정체가 분 명한 것은 좋았다. 효진이라면 대적할 만하다. 강민의 내부에서 서서히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잠수 후 서울 에 당도했다. 비오는 경춘가도의 밤의 야경은 끝내 그 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에 강민은 그를 흔들어 깨우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엔 모처럼 깊이 잠들었었다. 잠시나마 그의 신경이 그로 하여금 모든 걸 잊게 해준 듯했다. 그런 데 눈을 뜨자 또다시 불안의 아침이 시작되는 성싶었 다. "여보세요." 강민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처럼 숨을 죽인체 얼른 대꾸가 없다. "당신 누구요?" 강민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반응이 없다. 누구일까? 엄효진일까? "내가 당신을 알지......" 강민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안다구!" 강민은 되풀이했다. 그는 얼마간 도전적인 그러면서 도 비아냥 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적의 정체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러나 살인자는 금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우리들의 게임을 시작하자구! 우리 두 사람만 의 게임을 말야." "서둘지 말게!" 살인자가 비로소 입을 떼었다. 그는 그의 상투적인 말을 다시금 씨부렁댔다. 그런데 그의 짧은 말 속에는 만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어떤 협박의 낱말들보다도 침묵 속의 그 한 마디에 무 게가 실려 있었다. 살인자가 이번에도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어쨌거나 살인자는 그가 엄효진이라고 해도 강민과 의 대결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강민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창가로 재빨리 걸음 을 옮겼다. 그리고 커튼을 젖혔다. 밖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오늘 아침은 안개는 없었다. 그러나 빨간 미등의 불을 밝힌 차 한 대가 어둠 속을 빠져나 가는 광경은 어제 아침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강민은 생각난 듯이 거실의 인터폰에 매달렸다. 그 것은 아파트의 수위실과 직결된 인터폰이었다. "수위실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수위아저씨의 지체없는 대꾸가 있었 다. "방금 우리 단지를 빠져나간 차가 있었지요?" "네." "무슨 차예요?" "벤츠더군요." "벤츠요?" "네에." "넘버는요?" "넘버는......" "그럼 색깔은요?" "글쎄요, 밤색 같기도 하구요."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분명하다. 밤색 벤츠의 도련님! 바로 엄효진이 그가 애용하는 차를 몰고 나간 것이 다. 강민은 그의 예측이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는 느 낌을 받았다. 묘하게도 배신감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 다. 엄효진이라면 대적할 만하지를 않는가. 그런데 홍콩에서 파견된 살인청부업자 유가인은 마 동권의 시신이 발견되지 훌쩍 철수해서 돌아가 버렸 다. 그는 그의 임무가 끝났다는 표정이었고 서울에선 별 볼일이 없다는 태도였다. '좋았어. 내가 다 처리할 테다.' 강민은 그 스스로를 다잡았다. 한편 엄효진은 바 '시바의 女王'의 여주인 현수정의 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커판에서 살다 시피 했다. 그는 여전히 다섯 장의 카드로 그의 운세 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소아가 느닷없이 그를 찾아왔다. 그것도 현수정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에 말이다. 실 로 오랜 만의 재회였다. "오랜 만이에요, 효진씨......" "오랜 만이오." 효진은 그의 곁에서 일단 떠난 여자 앞에서 덤덤하 니 미소지었다. "많이 수척해졌네요." "내가 수척해 보이오?" "그래요." "내가 너무 밤을 새웠나......" "너무 마음 쓰는 거 아녜요?" "뭘?" 그러나 소아는 이내 뭐라 대꾸를 아니했다. 강민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소아가 묻는 진의를 알아서다. "내가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소아가 말했다. 그녀는 그녀의 옛 사내와 함께 시바 의 여왕의 곁을 떠나고 싶은 듯했다. 그녀는 언제나처 럼 차가운 지성적인 모습에 냉소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뭘 들겠소?" 효진은 술주문을 채근함으로써 바를 떠날 생각이 없 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것이 그가 나타내 보이 는 유일한 저항이기도 했다. "스카치 온더록스라도......" 소아는 체념한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그녀 가 지긋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을 효진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그들 앞에 놓인 술잔을 홀짝였다. 바의 여주인은 카운터 저편에서 구석진 자리의 두 남녀의 모습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어 색한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예선씨는 잘 있소?" 효진은 성악을 한다는 그녀의 친구에 대해 물었다. 효진은 늘 아깝게 놓친 듯만 싶은 정예선을 머리에 떠 올리고는 했었다. "개는 이태리로 돌아갔어요, 벌써...... 하지만 곧 돌 아올거예요." "흠, 그래애." "근데 장회장의 안부는 왜 묻지 않지요?" 소아가 이죽거렸다. "그래, 어떻게 지낸다고 하오?" "모르겠어요. 신문을 보니......" "나도 신문을 보았소. 바쁜가 보더군." "그런가 봐요." 그들의 대화는 금세 끊기고는 했다. 누구도 오늘의 그들의 주제로 성큼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형수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얘긴 들었어 요." 소아가 일순 씽긋 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녀가 그 싸움에서의 승리자이기라도 하다는 모습이었다. "소식 한번 늦군. 내가 패배했다는 그 뉴스는 이제 구문이오." 효진도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 내 심약하게 꼬리를 감추었다. "난 그 사이 미국에 가 있었어요." "흥, 그랬었나......" 효진은 얼마간 시큰둥했다. 그는 자칫 피어오르려는 냉소적인 가락을 지우려 애쓰고 있었다. "효진씨!" "말하구려." "당신, 나랑 함께 미국에 가지 않겠어요." 소아의 느닷없는 제의였다. "당신과 함께 미국엘?" 효진은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네에." "그것 참......" "나한텐 돈도 있어요." "돈이 있다구?" "내가 이번에 아빠의 사업을 물려받게 되었어요. 호 텔업이에요.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예요." "흠, 그래애?" "난 그 일엔 흥미가 억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 빠가 혈압으로 쓰러지셨거든요." "혈압으로?" "난 지금 누군가를 선택해야 해요. 그리고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바로 당신이에요." "흐음." "우리 결혼해요." "결혼?" "당신 원한다면 당신의 야망을 불태울 수도 있어 요." "한 가지만 묻겠소." "말씀하세요." "무엇 때문에 내 곁을 떠나려 했었소?" "꼭 듣고 싶으세요?" "듣고 싶군." "당신과의 외출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왜 돌아왔소?" "당신이 빈털털이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 요. 누군가가 당신을 위안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요." "너무 염려말아요. 나를 위안해 줄 사람은 많소." "그건 그런가 봐요." "자, 어서 술이나 들어요." 효진은 소아의 예상하지 못한 출현에도 그리고 그녀 의 뜻밖의 제의에도 어지간히 충격을 받고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 실감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장미빛 꿈이라도 꾸는 심정이었다. 아직도 나의 운세는 시들지 않은 걸까. "당신을 사랑해요." 소아가 효진의 두 손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전에도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그 많은 밀어를 속 삭였었다. 그 황홀했던 기억들이 부옇게 피어났다. "블라우는 내가 벗겠어요. 하지만 즈로스는 당신 몫 이에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무너지고 사라졌 다. "당신 곁을 떠나서야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요." "흐음." "우리 내일이라도 서울을 떠나요." 거짓 밀어에 거짓 언약으로 들려야 할 그 대사들이 다시 되풀이 되어도 효진의 마음은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그들 사이에 고르지 못한 숨결이 지배하는 공 백의 시간이 흘렀다. "난 빈털털이가 아니오. 형님의 재산은 내 것이오. 적어도 그 절반은...... 나는 도루 찾을 수가 있소." 효진이 이윽고 말했다. "어머, 그래요. 그렇담 더욱 좋구요." 소아가 가식없이 기쁨을 나타내 부였다. "그러니 나를 동정할 필요는 없소." "난 누굴 동정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난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여자예요." "흐음." "자, 어서 여길 떠나요." 결국 그들은 그곳을 떠났다. 일반 시바의 여왕의 곁 을 떠난 것이다. 현수정도 말없이 그들을 떠나보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 하는 기대를 그녀는 이번 엔 하지 않았다. 효진은 마침내 조소아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 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다짐했 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소. 그걸 처리하 고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냥 가요." 소아는 알지 못할 조바심을 얼굴에 나타내 보였다. 뭔가 불길함을 예감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 "이건 자존심에 관한 문제요." "제발......" "너무 염려말아요. 별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효진은 민하경과 김강민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 다. 그들 두 사람이, 특히 하경이 엄씨 일문을 아니 효 진 그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구!' 하경이 홀로 호사를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혼자서만 단물 빨게 할 수는 없지. 아암, 없구 말 구.' 효진은 하경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가냘 픈 목을 닭목 비틀 듯이 하면 될 것이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지 그 여자를 없애야 해.' 그나저나 강민이 그 친구가 거추장스럽고 걸리적거 린다. 그러니 그 녀석을 당면의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 리고 조소아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일을 끝내 야 한다. 그런데 모든 상황이 안성마춤으로 전개되고 있다. 경찰은 지금 신기루 같은 살인마 M을 쫓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환상의 살인마 M! 그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M을 쫓게 하자! 효진은 강민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싹 근 접해서 미행했다. 강민이 감지한대도 무관했다. 효진은 그의 뒷호주머니에 권총도 질끈 쑤셔넣고 있 었다. 구경은 380ACP, 중형 오토메틱의 최고 걸작으 로 알려진 월서 PPK/S였다. 제임스 본드도 애용했었 다면 그 멋도 그 성능도 알아줄 만하다. 군대에서 익 힌 효진의 사격술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다. 준비는 완벽하다. 태세도 완벽하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결행하느냐가 문제이다. 역시 밤에 행동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개 낀 밤도 좋을 것이다. 어느 플랫포옴 아니면 항구에서 안개의 흐름을 지켜보며 말이다. 비오는 날 밤도 좋을 것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어느 처마 밑에서 나 아스팔트 길에서 말이다. 영화의 라스트 신과도 같은 그 정경은 상상만 해도 효진의 흥분을 돋우었다. 한편 강민은 그를 미행하는 정체를 분명하게 확인하 고 있었다. 엄효진! 바로 엄효진이 강민의 적의 정체였다. 그러니 강민의 예측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던 것 이다. 엄효진이 마침내 총을 뽑은 것이다. 그의 형의 억울 한 죽음을 보복하기 위해서, 아니 그의 형의 재산을 도로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마동권을 가장했었다. 사람들은 감 쪽같이 속았다. 그나저나 마동권은 누가 살해한 걸까? 얼마나 솜씨가 비상하면 마동권을 살해할 수가 있는 걸까? 절대로 엄효진의 솜씨일 수는 없다. 그런데 그가 마동권의 죽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를 가장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좋다. 눈앞의 적의 정체는 분명하다. 효진과는 나이도 비슷하고 체구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 능력이나 수완도 비슷하다. 그러니 한번 대적해 볼 만하다. 강민도 권총을 챙겼다. 그것은 총신이 짧은 38구경 스페셜이었다. 치프 스페셜로도 불리는 스미스 앤드 웨슨 M36! 강민이 엄대진 사장의 보디 가드로 채용되 었을 당시에 엄사장이 그에게 건네어 준 총이었다. "이건 소형 리볼바의 대명사라고도 하네. 총신도 짧 고 실린더도 작게 만들어져 있네. 휴대하기도 좋고 다 루기도 좋지." 엄대진은 그 당시 은근히 뽐내는 어조로 말했었다. 그는 그가 지닌 베레타 M20도 강민에게 자랑했었다. 그 베레타로 하경은 모건을 사살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엄효진을 어디로 유인할 것인가? 엄효진은 그를 미행하며 결행의 시기와 장소를 탐색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강민은 효진을 모건의 청평호반의 별장이나 용인의 하경의 별장에 유도하려 했다. 그는 경춘가도에서도 경부고속도로에서도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효진은 교외에 잘 따라나서려 하지 않았다. 너무 호젓해서일까. 아니면 관객이 없어서일까. 3월 초의 어느 주말의 밤에 강민은 영동지역에 새로 세워진 초고층 백화점 월드 쇼핑센터의 지하주차장으 로 효진을 유인했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내렸다. 변덕 스런 날씨로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른 봄의 날씨였다. 그런 탓인지 지하주차장은 별로 붐비지 않 았다. 더구나 지하 4층의 주차장을 썰렁하기만 했다. 강민은 나선형의 지하주차장에로의 길을 내려가며 효진의 차가 따라 들어서는 것을 알았다. 백미러를 통 해 확인한 것은 아니었으나 느낌으로 알았다. 공기의 흐름이랄까, 진동이랄까, 그런 것을 통해 느낄 수가 있 었던 것이다. "좋았어!" 강민은 결행의 시기가 임박한 것을 알았다. 계기판 의 디지털 시계는 밤10시를 가리켰다. 그는 그의 소 형권총을 글로브 박스에서 끄집어내 옆좌석에 올려놓 았다. 그는 구석진 곳에 차를 세워 놓고는 차에서 내 렸다. 넓은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지하주차장은 어둡지도 않았으나 밝지도 않았다. 검은 색조의 수퍼 살롱에 그 랜저 따위의 대형차가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지하주 차장은 관이 진열된 영안실만큼이나 습기차고 음산했 다. 주차장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유별 나게 기둥이 많았다. 강민은 지하 4층으로 들어서는 효진의 차를 분명히 보았다. 밤색의 메르세데스 벤츠! 효진이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시키는 것도 보았다. 효진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가 차 옆에 우뚝 선 채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서 오라구!' 그러나 효진은 얼른 움직이지 않았다. 일순 그들 사이에 짓눌린 듯한 무거운 정적의 시간 이 흘렀다. 그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지하공간 의 흐름을 허무는 듯싶었다. 강민이 먼저 걸음을 떼었다. 그의 구둣소리가 유난 히 어두운 콘크리트 지하공간에 메아리쳤다. 강민이 다가서자 효진도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들의 간격 은 좁혀졌다. 그들 두 사람의 숨소리도 구둣소리도 높 아갔다. 그들의 모습은 기둥의 숲에 가려지기도 했고 나타나 기도 했다. 마침내 두 사나이의 지하주차장에서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여러 발의 총성이 지하공 간에 울려퍼졌다. 필경은 인간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겨본 일이라고는 없는 그들로서는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겁을 집 어먹을 수밖에 없는 그들은 상대방을 향해 그들 탄창 이나 실린더 속의 실탄을 무작정 쏘았다고 할 수 있었 다. 눈을 감고 쏘지 않은 것만도 여간 큰 노력이 아니 었으리라. 어떤 점에서는 그들은 그들의 공포가 내모 는대로 행동에 옮겼다고 할 수 있었다. 결코 외국의 갱 영화나 스파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멋진 광 경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민은 쇠고랑을 차고 강남경찰서로 연행되었고 효 진은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정확하게는 병원 영안실로. 탄알이 그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 다. 강민의 어설픈 솜씨치고는 놀라운 결과였다. 아무튼 강민은 승리했고 효진은 패배했다고 할 수 있었다. 늘 높이 비상하길 꿈꾸던 효진도 끝내는 이카 로스처럼 좌절했다고 볼 수 있었다. "결국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 방위라는 말이지요?" 종로서의 범도일 경위가 강민의 운명앞에 모습을 나 타낸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대충 한 시간쯤 지나서였 다. 그는 강남서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듯싶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민은 범경위가 나타나자 묘하게도 안도하는 마음 과 함께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구면이긴 했 으나 일관해서 이 사건을 추적하는 사람이다. "난 이것이 정당방위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흠, 그래요오." 강민과, 아니 살인자와 마주하는 강력반장으로서의 범경위가 별로 신이 나 있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그 의 말투가 신랄하지 않았다. "난, 다만 어쩔 수가 없었다는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으음." "그 친군 나를 감시했어요. 꾸준히 미행도 했구요. 죽인다고 협박도 했습니다. 실제로 세 사람씩이나 살 해했구요. 잘 아시다시피요." "......" "오늘은 총격까지 했습니다." "......" "이러니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담 그건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군요." "나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법 대로요. 난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좋아요." 범경위가 강민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사 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던 시 끌시끌한 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스쳤다. "근데 김강민씨......" 이윽고 범경위가 입을 떼었다. "우린 당신을 처벌할 수가 없어요." "네에?" 강민이 눈을 크게 떴다. "더는 수갑을 채울 수도 없고, 법정에 세우지도 못 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신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볼 수 있어서가 아니예 요." "그럼?" "당신의 범죄는 뭐랄까, 일종의 불능범(不能犯)이라 고 할 수 있어요." "불능범?" "강민씨, 이걸 알아야 해요." "뭣을요?" "엄효진씨는 당신이 쏜 총엔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요." "그 무슨......"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