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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16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입니다. 믿는 이에게 박해는 당연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박해를 싫어합니다. 반대만 해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반대를 넘어 박해를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세상 안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위치에 있는지를 간략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저술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박해 속에 있었는데,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해를 받고 박해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황제에 대한 경배를 거절했다는 것 때문에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불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식인종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김태훈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세상에서 뽑다>(요한 15,18-21) 그러나"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또한 큰 책임감을 느끼는 말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목적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 특별히 어떤 사명감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뜻과 나를 뽑으신 분의 뜻이 일치되기 전까지에는 계속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나의 뜻이 나를 뽑은 그분의 뜻에 일치될 때만이 우리들은 그분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은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지만 누룩은 드러나지 않게 있으면서 부풀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자는 남 앞에서 드러내는 역할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부풀리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수도자뿐만 아니라 축성봉헌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뽑은 이유이고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도 안되고 세상 사람처럼 세상의 것으로 또는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살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바람과 사랑에 빛나는 실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세의 사물들을 비추어 주고 관리함으로써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자라서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찬미가 되도록 하는 그것이다.] (교의헌장 31항)
5월 16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 요한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만신창이뿐인 우리 삶으로도> 한 신학자는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렇게 간결하게 정의 했습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세상의 박해 사이를 걸어가는 순례객들.” 신앙공동체라고 해서 그 안에 늘 완벽한 평화, 충만한 기쁨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형제적 일치와 나눔, 섬김과 봉사가 계속되지만은 않습니다. 늘 황홀한 꽃길만 계속되지 않습니다. 때로 심각한 분열의 위기 앞에 서기도 합니다. 백척간두 낭떠러지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도 합니다. 때로 세상의 박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토록 거칠고도 위험한 순례의 바다를 건너가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제대로 된 사랑’입니다. 장 폴이란 위대한 철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나머지 생애동안 냉혹한 세계를 견뎌낼 수 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만 제대로 형성되어 있다면, 그 상황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쉼 없는 흔들림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배의 영원한 선장이시고, 우리를 구원의 땅까지 잘 인도해주시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몫이란 근심, 걱정, 고뇌, 유혹, 마음의 메마름과 흔들림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끼아라 루빅) 높고도 거친 물결에 맞서 싸워가며 길고도 고통스런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한 가지 마음은 낙천주의입니다. 한 대학 수영부 감독이 시즌을 마감하며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쉽게도 올 한 해 동안 우리 팀은 단 한 차례도 입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물에 빠져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비록 오늘 우리의 현실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다 할지라도, 순간순간 고통과 실패로 점철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항해에 함께 계시며, 언젠가 반드시 안전하게 우리를 또 다른 항구에 내려주실 것을 굳게 믿는 낙천주의가 필요합니다. 도공이 버려진 진흙으로도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듯이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 인생을 통해서도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유리화 작가가 깨진 유리조각으로도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제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만신창이뿐인 우리 삶으로도 그럴듯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45번 / 맑은 하늘 5월은
부활 5주간 토요일 - 미움을 넘어서
며칠 전에 미사포를 써야하는 이유에 대해 글을 썼더니 반대하는 글도 실리고 또 그 말이 옳기는 하지만 제 자신을 위해서 그런 글은 자제를 하면 어떻겠냐는 따듯한 충고도 받았습니다. 저에 대한 감정만 나쁘게 만든다는 이유입니다. 그런 충고는 고맙지만 저는 제가 확신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은 강론 때 부부간에도 아기를 출산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부부관계를 아이를 출산하려는 의도로만 해야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도 이것을 잘 압니다. 많은 분들이 반발할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제가 배운 진리이니 저는 이 말을 하는데 주저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적으로 부부관계의 목적은 부부간의 사랑의 ‘일치’와 ‘자녀출산’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첫 죄를 지으면서 육체 안엔 성욕이 들어왔습니다. 그 전엔 온전한 사랑이었지만 이젠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따라서 방금 세례 받아 아무런 죄가 없는 부부가 부부관계를 해도 그 안에서 성적 욕망을 채우는 죄가 조금이라도 들어가기 때문에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죄를 물려받아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 부부 관계 안에 어쩔 수 없이 죄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죄는 자녀에게 끊임없이 물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이를 다윗은 시편에서 ‘어머니가 뱃속에 나를 죄 중에 배었나이다.’라고 읊은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관계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되고 또 자신을 죄 짓게 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줄어듭니다. 마치 죄를 짓고 성욕을 느껴 자신들의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가 서로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루며 갈라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관계는 죄가 서로에게 들어오게 함으로써 부부의 금슬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욕은 이타적인 사랑을 이기적은 사랑으로 변질시키고 둘의 사랑을 감소시킵니다. 문제는 제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만약 제가 결혼했으면 이 말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말해야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고 이런 말을 함으로써 많은 반발이 있을 것을 알지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받아들이기 싫지요? 다행히 교회에서는 부부관계를 죄로 규정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갔을 때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하려고 무진장 노력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안 좋아지면 내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늘 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예수님도 미움을 받아 돌아가셨는데 그 분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던 제가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청하라고 하자, ‘고통과 멸시’를 청하였습니다. 고통과 멸시가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것이고 그것으로 예수님과 조금 더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간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주어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가 아무리 잘못해도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잘해주면 좋아했다가 못해주면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미워하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몹쓸 욕까지 해가며 그들의 미움을 증가시키셨습니다. 어차피 미워할 이들은 미워하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입에서 나오는 쌍날칼과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아픔을 주기도합니다. 예언자가 박해를 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박해와 미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예언직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냥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아야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거든 우리보다 먼저 우리 스승님을 박해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히려 즐거워합시다. 그래야 더 그 분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9년 5월 16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and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Jn.15.19)
제1독서 사도행전 16,1-10
복음 요한 15,18-21
어느 마을에서 제일 재산이 많은 부자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재산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무척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역시 지혜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지혜롭고 훌륭한 스승에게 ‘지혜’를 배워오라고 보냈습니다. 아들은 훌륭한 스승님을 통해서 점점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기 전, 안타깝게도 부자인 아버지가 주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슬퍼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가 모두 끝나자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집사가 아버지의 유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유서의 내용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지요. 왜냐하면 그 내용은 이러했거든요. “나의 모든 재산을 내 종에게 빠짐없이 물려주어라.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내가 남긴 유산 가운데 단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 부자의 유언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경악했지요. 단 한 사람은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부자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을 바라보면서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종의 위치에서 갑자기 그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스승에게 배우고 돌아온 아들은 별 어려움 없이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유언장을 따르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선택한 단 하나의 유산 때문인데요. 그 단 하나의 선택으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을 선택했으니, 아버지의 재산 역시도 모두 아들의 것이 된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우리 신앙에 맞춰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혜롭고 훌륭한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받은 지혜를 활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기에, 나에게 주어질 유산에 대한 불평과 불만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바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특별히 뽑았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간직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올바른 판단과 함께 하느님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에드워드 아트킨슨) 인간은 만남을 통해 살아간다(‘삶의 행복을 주는 114가지 지혜’ 중에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를 보다 선의적으로 확대시켜감으로써 평이한 삶이나마 그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유도해 나가야 합니다.. 성공은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성공의 가치를 확대시키는 것은 성공을 나누어 주는 주위의 인정이 밑받침이 되어야만 비로서 가능합니다.. 삶의 보람과 가치를 판가름하는데 있어 성공이란 그것이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성공을 통해 자신 스스로 진실한 삶의 승리를 나타내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와 나의 성실한 만남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진정한 만남이요.. 이 만남 위에서 인생의 행복이 건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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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따라서 부부관계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게 되고 또 자신을 죄 짓게 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줄어듭니다. 마치 죄를 짓고 성욕을 느껴 자신들의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가 서로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루며 갈라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관계는 죄가 서로에게 들어오게 함으로써 부부의 금슬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욕은 이타적인 사랑을 이기적은 사랑으로 변질시키고 둘의 사랑을 감소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