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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과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결코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할입니다.
스스로가 그 기쁨을 놓아버지리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오늘의 말·샘 기도>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주님!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그 어떤 불길도 태울 수 없고,
그 어떤 슬픔도 해칠 수 없고,
비록 흔들리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어떤 방벽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감옥으로도 가둘 수 없고,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결코 빼앗겨질 수도 없는 임의 사랑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창조적 근심>
오늘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근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제게는 근심은 해도 되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말라는 말씀으로, 그러니까 근심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은 나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좋을 것이 없지만, 근심은 오늘 주님 말씀처럼 기쁨이든 자녀든 뭔가를 낳는 창조적 근심도 있지요.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근심스러운 일은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닙니다.
생산적인 근심은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감수해야겠지요.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두 상반된 부류가 있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과 근심은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어제오늘의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겠지만, 우울증과 같이 병증을 띄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요즘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엄마는 자식에 대한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그렇게 쓸데없는 근심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도 그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고, 그러니 하시지 말라는 제 말이 어쩌면 쓸데없는 말이었지요.
그러므로 근심은 그 자체로 나쁘거나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는 근심이 나쁘고, 사랑이 없어 병증일 뿐인 근심이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이를 낳는 어미의 근심과 같은 근심은 많아져야지요.
요즘 아이를 낳는 고통과 키우는 고통이 싫거나 두려워 아이 대신 강아지를 키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근심은 사람에게서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즘의 더 큰 문제는 사랑은 없고 두려움은 커져, 근심할 줄 모르고 근심은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점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래서 고통을 줄 것 같으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성가실 것 같으면 그런 일은 아예 거부하고 근심거리들은 애초에 싹둑 잘라버리지만, 그 바람에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그에게는 아무런 기쁨도 없습니다.
아이 낳을 근심은 아이 낳을 고통을 감수한 창조적 사랑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아이를 얻는 기쁨을 알고 감히 도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영적인 출산의 근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거룩한 일에 감히 도전하는 우리에게는 창조적인 근심을 어쩔 수 없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완전한 기쁨의 원천>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슬픔은 얼마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고달픈 생활입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봄에 씨 뿌린 사람만이 가을에 거둘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한 신문에,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 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적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현실적인 안락함만을 추구하면 내적인 기쁨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랑의 향기를 내는 신앙인의 소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예레 15,16)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사람이 누구에게도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
코리 텐 붐은 1892년 4월 15일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존경받는 시계공이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텐 붐 가족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가 깊고 이웃 사랑의 원칙을 믿는 텐 붐 부부는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집에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에 숨겨진 방을 지었고, 그곳은 그들이 수년 동안 보호했던 많은 유대인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텐 붐 일가는 네덜란드 정보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나치는 그들의 집을 급습하고 온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는 결국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가혹했고 언니는 1944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기 위해 대중 연설자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1947년 코리 텐 붐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했던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코리 텐 붐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코리 텐 붐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힘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간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러한 용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을 할 때 어떤 부자가 비싼 시계를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시계를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정말 고쳐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시계를 새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코리는 “아빠, 시계를 팔았어야지.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잖아!”라고 아빠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라.”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박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인데 세상은 누구도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립니다.
이미 뱀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가 흔들리면 감정도 흔들립니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이는 결국 세상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뱀을 선택한 즉시 관계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나를 버렸기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 영향을 주는 분이 되실 것이고, 세상은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사람이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지만 기뻐하셨지,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사벳에게 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옥사나 말라야가 본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면 개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개가 나를 보고 짖는다고 화가 나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출산’에 비유하신 것은 당신의 부활이 출산과 같다는 뜻은 아니고, 제자들이 얻게 될 ‘부활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기쁨으로 고통을 잊어버린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은, 그 전에 겪었던 슬픔과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버린다.’ 라는 말은 ‘기억하지 못한다.’ 라는 뜻은 아니고, “슬픔과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또 그 사건 때문에 겪어야 했던 슬픔과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슬픔과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기쁨과 행복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분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과 기쁨은 지상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릴 정도로 대단히 큰 행복과 기쁨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상에서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만일에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얻은 행복과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모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슬픔에만 빠져 있는 모습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는 “너희는 큰 기쁨을 얻어서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고”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기쁨은 영원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나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는 ‘참 기쁨’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빼앗기는 일은 없어도 스스로 잃는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 또 한눈을 팔고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예수님 덕분에 얻은 ‘크고 영원한 기쁨’을 자기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고,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목격하고, 또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께 더 물을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들을 ‘파스카의 신비’를 설명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묶어서 ‘파스카의 신비’ 라고 표현합니다.
‘파스카’는 ‘지나가다.’, 또는 ‘건너가다.’ 라는 뜻인데, 성경에서 첫 번째 파스카는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 때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러 지나가시다가,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보시면, 그 문은 거르고 지나가시고 파괴자가 너희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탈출 12,23)
두 번째 파스카는 ‘갈대 바다’를 지나간 일입니다.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탈출 14,16).”
세 번째 파스카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마태 17,23)
‘파스카의 신비’는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또는 “죽는 줄 알았는데 죽음 너머에서 생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신비’입니다.
‘신비’ 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여정은 ‘파스카의 신비’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를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무조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법칙’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영광과 생명을 얻으려면 무조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한다.”가 아니라,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영광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1,7)
‘파스카의 신비’는 ‘고통의 신비’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살리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해방과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 “기쁨도 은총의 선물이자 훈련이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온누리에 강복하시어,
슬픔과 불안과 병고중에 있는 분들에게
위로와 평화,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새벽 산책시 십자로 중앙에서 사방에 십자성호를 긋고 강복할 때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이어 예수성심상앞에서 고백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어제는 오전 1:30에 기상하여 오후 8:30 잠자리에 들 때까지 참으로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였습니다.
5월은 성모성월이자 파스카의 부활시기,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으로 가득했던 "기쁨성월"처럼 기쁨 가득한 하루였습니다.
제43주년 5.18민주화 운동 기념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지낸 하루였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던 해 성탄절에 저는 영세를 받았고, 다음해 교편생활하며 성탄절에 견진을 받고, 다음해인 1982년 2월 늦깎기로 왜관수도원에 입회했으니, 올해 수도생활 만 41년이 되는 해요, 오늘 아침 산책 때도 어김없이 김민기가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의 말마디를 바꿔 열창했습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길 어언 41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비장미보다는 기쁨이 샘솟게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기쁨의 전사로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는 저에게는 성가같은 대중가요입니다.
어제의 기쁨은 피정지도였습니다.
신천동 성당 가톨릭 성서모임 봉사자들 27명의 하루 단체피정 지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참 행복한 축복받은 분들입니다.
기쁨도 선택입니다.
여러분들은 참 기막힌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모성월 5월에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고자 오늘 피정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가장 아름다운 분들임에 분명합니다.”
이어 “희망의 여정-희망의 순례자로 삽시다” 강론을 시작하며 5월에 어울리는, 제가 역시 아침 산책시 즐겨부르는 ‘바다’와 ‘어린이날’ 노래를 함께 부르니 신록의 기쁨으로 활짝 피어난 꽃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나이에 무관하게 꽃인지 얼굴인지 구분이 안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피정의날 우리들 세상”
새삼 기쁨도 은총의 선물이자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몇 분의 면담고백 성사 때도 힐링의 선물, 기쁨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고백성사의 은총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보속으로 ‘말씀처방전’과 더불어 “웃어요!” 스탬프를 찍어드린 후, 성가 244장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도록 한 후, “웃으며 행복하게 하루 사는 것이 보속입니다” 드리는 공통적 당부입니다.
그리고 집무실옆 아름다운 꽃길에서 사진도 찍어 드립니다.
꽃을 보면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은 그대로 파스카의 사랑, 파스카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살 줄 몰라 슬픔이요 살 줄 알면 기쁨임을, 기쁨 또한 은총이자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일부 말마디를 바꿔 나눕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내 집무실옆 샛노란 애기똥풀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해지는 꽃같은 마음이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 2000.5월
무려 23년 전 여기 이 자리에서의 작품이니 참 신기합니다.
성모성월, 계속되는 파스카의 시기,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을 상징하는 온갖 꽃들로 가득한 5월의 세상입니다.
깨끗이 정돈된 밭에 잡초들 우거진 것을 보며 “악마는 진공을 좋아한다”라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풀과의 전쟁이라는 밭농사, 마음밭의 이치도 똑같습니다.
기쁨으로 돌보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밭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잡초는 죽지 않는다(weeds never die)” 교황님은 말씀하셨지만,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의 잡초가 번성하지 않도록 기쁨의 꽃들로 마음밭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얼마전 기사 내용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에 붙는 ‘세계 최고’내지 ‘세계 최저’,‘세계 최악’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로 부유한 나라 중에서 비정규직 근로자(전체 임금 근로자의 약 37%)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고, 노인빈곤율(37.6%)이 제일 높은 나라도 한국이고, 합계 출산율(0.78)은 세계 최저이고, 자살률(10만명당 23.6명)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중 최악이다.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89%로 아시아에서 단연 최고(이스라엘83%, 일본70%)이자 세계적으로 폴란드(90%) 다음이다.”
강론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런 불리한 상황을 결코 잊어선 안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산고의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아기 탄생의 기쁨이듯 파스카의 기쁨도 그러합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바로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고통중에도 샘솟는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협조자 성령의 도움이 결정적입니다.
참으로 부활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과 더불어 사라지는 온갖 번민이나 의심들이니 참 순수와 자유로 빛나는 영혼들이 됩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바로 바오로의 연속된 고난의 삶중에도 샘솟는 열정, 꽃같은 기쁨의 원천은 바로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느날 밤 환시중에 들려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영적전투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뒤에는 어김없이 따라오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파스카의 주님이 바로 샘솟는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을 살게 합니다.
더불어 이웃에 이런 파스카의 기쁨과 평화를 선물하며 살게 합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쁨의 은총 선물이자 기쁨의 훈련입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
(하바 3,1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변치 않을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떠나신다는 스승의 말씀에 근심이 가득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재회를 언급하십니다.
"다시 봄."
제자들은 반드시 잃었던 스승을 다시 만날 것이고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다시 봄"이 당시 제자들에겐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예수님 재림의 때를 가리킬 것입니다.
이 "다시 봄"의 효과와 위력이 얼마나 큰지, 이후에는 어떤 고통과 환난이 닥쳐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기쁨을 굳게 간직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요한 16,23)
이 말씀은 우리를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침식사에 부르셨을 때,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라고 하지요.
제자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주님을 감지합니다.
그들의 기억과 사랑이 확신하니까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상태는 서로에 대한 앎이 충만한 상태, 곧 사랑의 상태입니다.
관심이 없어서 물음조차 침묵해버린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지요.
"언제", "왜", "어떻게"를 물어대던 두려움과 조바심 가득한 제자들이 처참하게 잃었던 주님을 "다시 봄"으로써 하나의 앎, 하나의 사랑 안에 잠겨듭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가 계속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코린 18,9-10)
주님께서 환시 속에서 바오로를 친히 격려하십니다.
서간 어디에도 바오로가 느낀 감정적 반응이 언급되지 않지만, 낯선 곳에서 적대자들에 둘러싸여 주님을 전하는 그가 이 말씀으로 얼마나 힘을 받고 기뻤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환시만 해도 어마어마한 신비적 은총인데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역시 크나큰 위로의 내용이니 말입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도 18,10)
이 말씀은 어쩌면 오늘의 격려 중 백미일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극심한 거부와 배척을 당하더라도 바오로가 끝까지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피하지 않고 기꺼이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 같지요.
바오로는 실제적이고 또 잠재적인 주님의 백성 틈에서 살아가며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가 아닌 사랑과 신뢰의 눈길로 모두를 대했을 겁니다.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사도 18,18)
바오로는 한 바탕의 소요를 겪으며 동족 손으로 재판정까지 끌려갔지만, 성경 저자는 이에 대한 반응에 관해서도 환시 체험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합니다.
그저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는 다른 선교지를 향해서 떠나는 담담하고 초연한 모습이 보일 뿐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증명합니다.
바오로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죄와 용서, 섭리와 만남과 환시의 체험들이 그를 가벼이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무게중심을 잡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각자 주님을 체험한 원체험의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그분 사랑에 전율하고, 그 자비에 눈물 흘리며,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에 대고 '주님 안에서 사랑한다'고, '주님과 함께 함께 행복하자'고 외치고 싶었던 환희의 체험 말입니다.
세파에 밀려다니느라 그 기쁨을 혹 잊고 있었다면 다시 찾아내어 머물러 봅시다.
없는 듯, 잃은 듯 보여도 분명 있습니다.
그 기쁨은 잊을 수도 없거니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골방을 샅샅이 뒤져 그 기쁨을 찾아내고 사랑을 회복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진감래(苦盡甘來)’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는 가난과 굶주림이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길에는 넝마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냥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들이 많았습니다.
누나와 형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일하였습니다.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판자촌은 아파트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인을 보면 주눅 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당당하게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쫓아서 미국으로 이민 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 의료체계가 잘 마련되어 있고, 한국 사회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 뉴욕에서 4년째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한국이 지난 50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정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입니다.
우리가 정한 물리적인 시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프고, 늙고, 죽어갑니다.
이 물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도 60년을 살아오면서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슬픔과 기쁨, 고독과 희망의 시간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에서는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습니다.
고독과 절망의 시간에서는 바늘 하나를 넣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좁습니다.
불평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감사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손을 이끌게 됩니다.
의미의 시간은 주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영국의 한 연구팀이 70세 전후의 259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자기반성과 치매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였는데, 그 결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확한 인과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반성의 시간을 하루에 10분 이상 갖게 되면 분명히 인지력과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치매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연구 발표에서도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영양제보다도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10분이라는 시간.
아주 긴 시간일까요?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뇌 건강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 10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아까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건강이 최고라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이 하는 기도, 묵상은 꼭 필요한 영양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영양제를 먹으면서 건강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고 필요한 시간인데도 항상 뒤로 미뤄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일이 급해서, 피곤해서,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등의 말로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맨 뒤로 미룹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모습입니다.
올해부터 저는 혈압약을 먹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은 뒤, 이제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면서 아침 식사 후에 한 알씩 꼭 복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경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복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혈압 조절이 안 될 수 있어서 규칙적인 복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신경 써서 규칙적인 복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묵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뒤로 미루다가는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난 전날 겪을 제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큰 사건을 기다리는 고통이라고 하시지요.
마치 진통의 고통을 겪은 뒤에 사랑하는 아기를 낳는 것처럼, 그 고통 뒤에 고통을 잊을 만큼의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지금 주님을 만나고 지금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이유를 붙여서 후회의 시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의 시간을 위해 지금 당장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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