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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했던가! 아이들이 떠나고 노인 둘만 남은 집은 적막이 붙박이 장처럼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밖엔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저녁도 빨리 찾아온다. 창가에 코를 박고 하릴없이 어정버정하며 소리없이 내리는 비를 보았다. 갑자기 밖의 공기가 마시고 싶다. 덧문을 활짝 열었다. 봄비에 젖은 흙내를 맡았다. 쪼르륵 쪼르륵 떨어지는 빗방울에 말끔히 목욕을 마친 풀의 향기다. 신선한 비와 민트 이파리의 이중주가 갑갑한 가슴에 스며들었다. 누가 뒤에서 밀치기라도 한 것처럼 상반신을 밖으로 쑥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으로 비 냄새를 욕심껏 들이켰다.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한참을 그냥 맞았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 닮은 외로움이 일시에 와르륵 몰려 왔다. 이 불청객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뒷뜰 계단 한귀퉁이에 놓인 돌나무 화분도 비를 맞고 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연초록 입새를 틔우고 있는 돌나물은 쌍떡잎식물 여러해살이풀이다. 식용으로 쓰려고 심은 건 아니고 6~7월에 피는 별처럼 생긴 노랑꽃이 무더기로 피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지인에게 모종을 얻어 심은 게 몇 년사이 화분 3개에 나누어 심을정도록 번식했다. 돌틈 사이에도 뿌리를 내릴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세수를 막끝낸 아가의 말알간 얼굴 처럼 여리디 여린 돌나물과 눈을 맞췄다. 이것도 겨우내 홀로 외로움을 견뎠으려나! 어찌 홀로 견디는 이가 이뿐일까!
갑자기 주위의 친구들이 나란히 줄지어 떠오른다. 오래 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중증 장애인인 30대 아들을 돌보며 살고 있는 M 여사. 덩치큰 아들을 돌보느라 그녀는 늘 어깨 통증을 달고 살고 있다. 그녀는 돌나물 꽃보다 더 맑고 예쁘다. 늘 웃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외로움과 고독이 얼마나 깊고 단단할지 누가 알겠는가. 십여년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살고 있는 R여사.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젖어 살고 있는 그녀의 외로움은 또 다른 색깔로 반짝인다. 그리고 칠순이 훨 넘은 나이에도 소녀 감성 넘치고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T여사, 남편이 인터넷 쇼핑에 중독돼 매일 현관에 주문한 택배 박스가 쌓인다며 불평이다. 그녀에게 아들이 한 명 있는데 그도 아주 오래 전 사고로 뇌 신경을 다쳐서 신체 장애인이다. T 여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그녀는 아마도 외로움을 남편 험담으로 희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B 여사, 그녀는 명랑 발랄의 대표주자다. 에너지가 넘치고 목소리도 엄청커 가끔 대화에서 정신을 놓고 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놀라서 정신을 차릴 때도 있다. 그녀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 하는 유일한 친구가 아닐까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그녀도 외롭다이다. 그녀는 패북에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사진으로 포스팅하며 누군가와의 소통을 꿈꾸는 거 같다. 친구들의 그룹카톡에도 아침 점심 저녁에 먹은 음식을 찍은 사진을 카톡카톡 올린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들을 얘기하자면 소설 한 권은 좋이 되겠다 싶다.
나이탓인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 느끼지 못 했던 쓸쓸함이 일상이 되었다. 요즘 들어 외로움이 찾아오면 그 다음 단계는 친구들을 줄줄이 떠올리며 혼자서 외로움이란 덫에 걸려 허둥거리기 일쑤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본다. 그 외로움을 불러세워 따뜻이 손잡아 주고 싶다. 세상 모든 외로움은 빛깔이 다르고 슬픔의 질량도 다르다. 그것은 우리 속 깊은 곳을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게한다. 미처 생각지 못 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헤아려 보는 시간은 참으로 쓸쓸하다.
누군가 나에게 "어릴 때 보던 노을과 지금 보는 노을이 다르죠" 라고. 물었다. 내 대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노을은 감탄사를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지만, 지금은 아름답다 느끼면서 가슴 한편에 슬픔이 가득 차오른다고 말했다. 나이든다는 건 젊을 때 경험하지 못 했던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행복과 슬픔을 한꺼번에 다 수용할 수 있는 큰 마음도 가지게 된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왕좌왕 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고, 적은 것과 작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맙다. 작은 것에 크게 감사하는 너그러움도 생기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주는 사계절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루를 살더라도 온맘을 다하여 살고 싶어서 마음이 뜨거운 나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소중한 순간임을 깨닫고 감사가 기도가 되는 지금이 그냥 좋다.
산책하러 종종 가는 공원이 있다. 오리가 무리지어 살고 있어 오리고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중앙에 길쭉한 호수가 있어서 특급 산책로다.
어느 날 산책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서 오리들이 물위를 부유하며 한적하게 떠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지켜본 일이 있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무리지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그 중 유독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마른 잎새에 몸을 비벼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쓸쓸한 음향과 외톨이 오리가 만들어 내던 외로움은 달콤한 쓸쓸함이었다.
비 오는 날 창문과 덧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들려오는 잎새들의 토닥거림과 저녁나절에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쯤에서 저녁노을 바라볼 때의 막막한 그리움과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외로움까지도 사랑하며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것이다.
미국 워싱턴주 퓨얄럽에서
수필가,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제 3회 서북미문인협회 주최
뿌리문학신인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
<뿌리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