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live/VhH99kDBUTU?feature=share
여우의 터가 된 시온 5:15~18
15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16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17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18 시온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5:19~22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
[오늘의 말씀 요약]
유다에 기쁨이 그치고 그들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진 것은 그들의 범죄 때문입니다. 여우가 그 안에서 놀 만큼 시온산이 황폐해졌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버리신 주님의 진노가 크다고 탄원하며, 자신들이 주님께 돌아가겠으니 자신들의 날들을 새롭게 하셔서 옛적 같게 하시길 간구합니다.
-------------
여우의 터가 된 시온 5:15~18
패망으로 주권을 상실한 백성의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가혹한 통치가 일상에서 기쁨과 춤을 앗아 갔다고 한탄합니다. 절기 때 예배자가 드리던 기쁨의 찬양과 춤 또한 멈추었습니다. 왕의 영화와 권능을 상징하는 ‘면류관’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주권을 상실한 비참한 상황을 가리킵니다(16절). 그 결과 유다 백성은 슬픔에 잠겨 눈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순례자들로 붐비던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여우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패망으로 인해 유다의 모든 영광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비극이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심판과 패망은 죄의 결과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실패해 어려움을 당할 때 나는 남을 탓하나요, 나의 죄를 회개하나요?
---------------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5:19~22
예루살렘의 참상을 진술하던 예레미야는 이제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루살렘은 불타 버렸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고, 성전은 잔해만 남았지만 주님의 보좌는 대대에 이른다고 고백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마시고 기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자비하심만이 참담한 현실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21절)라는 탄원은 우리를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 힘과 기회를 얻는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무능하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 더 깊은 묵상
암담한 현실에서 예레미야가 전한 믿음과 소망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나 자신의 전적 부패를 인정할 때, 내 기도는 어떻게 바뀔까요?
==========
주님, 제가 문제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변화산새벽기도회’를 진행할 때마다 예배와 회개,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나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들, 원근 각처에서 변화받기 위해 예배당을 빼곡히 채운 성도들, 이들 안에서 하나님은 쉴 새 없이 일하신다. 그래서 변화산을 지나며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그 기적이란 삶이 변화되는 사건들이다. 바로 ‘내가 문제였다’고 깨달은 이들의 고백이다.
“저는 이제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미워하던 사람을 이제는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피워 오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변화되는 것이 기적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 나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나를 바꾸는 것이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이 바뀌겠는가? 그런데 복음을 발견하면 문제의 근원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은혜로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에 엎드리게 된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복음 안에서 자존감을 회복했기에 더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죄인인 자신의 현주소를 철저히 인정하며 문제의 근원을 오직 ‘나’에게서 찾고, 모든 섭리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이 복음의 사람이다.
치열한 도전 / 김병삼_ 두란노
=============
한절묵상:예레미야애가 5장 21절
돌이킴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 이전에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먼저고 돌이킴이 그다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 은혜 위에서 가능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살게 하는 힘이요, 죄를 이기는 능력이며, 모든 영혼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방편입니다. 인생의 버팀목은 오직 하나님 은혜입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 마음을 움직여 긍휼의 샘이 솟게 한다. - 토미 테니
오늘의 기도
하나님, 황폐한 저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워 주소서. 황폐함의 원인이 저의 죄임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믿고, 담대히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성도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36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
하나님의 분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파괴, 백성들의 비참함, 예레미야의 한탄 등을 이야기 하다 보니 벌써 예레미야애가의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5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책입니다. 하지만 유대 백성들의 처참한 삶의 광경들이 그 어떤 책보다 월등합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인육을 먹는 이야기가 약 4회 이상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이 책에서만 2회 이상 나오는데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 그 현장에 선지자 예례미야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기록합니다. 딱 한 번만 실수하자는 취지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말자는 뜻에서 그렇게 리얼하게 그렸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 원인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이 불탔다는 것으로, 그의 애가는 속 타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토록 징계하시는 그 분의 마음을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가운데 서서 눈물로 간구할 뿐입니다. 그는 조국의 회복을 보지 못한 채 이방 땅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70년 후 유대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간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으로 다니엘,에스라,느혜미야,우리에게 까지 복음을 전하고있습니다.
이제 이복을 우리가 증명하며 증거할 차례입니다. (한마음속)
이 나라, 이 시대, 우리가 예레미야입니다.
------------
죄로 인한 고난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20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낄 때 우리는 참 많이 힘들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끼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고난은 더욱더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로 인한 잔혹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가 없는 것 같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의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바르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생겼으니 욥은 그래도 하나님을 바라면서 고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며 기도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으셔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으니 다른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시련으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는 염치도 없고 길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죽도록 밉습니다. 그 때 고난은 죄 값으로 당하는 고난이니 소리내어 아파하기도 겸염쩍은 그런 고난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그러니 죄로 인한 고난을 받을 때는 참으로 가련한 신세의 고난입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안아주는 이도 없는 그런 고난입니다. 스스로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적인 고난입니다.
절망적일 때 찾아 오시는 주님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21절)
죄 가운데 있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절망적일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희망이 없기에 절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사 우리를 엣적 같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희망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절망적일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절망적일 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일 수도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염치불구하고 하나님께 나가야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돌이키시고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도 하나님께 나가야 하지만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한 잔혹한 고난을 받는 그 때 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중하여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모든 것이 절망적인 그 때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이 잔혹하다하여 주님이 우리를 떠나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잔혹한 고난을 함께 당하시고 계십니다. 곧 그 때 주님은 우리를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절망을 느낍니까? 그렇다면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절망적일 때 찾아 오시는 주님의 따스한 사랑을 만나야합니다.
내가 죽도록 미워질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갈 길이 없을 때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길이 막히면 하늘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가 가장 복된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옥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이 8차선 16차선으로 잘 뚫렸다고 좋아하면서 갑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죄악된 길이라면 차라리 막히는 것이 복입니다. 죄로 인하여 잔혹한 고난 속에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이 땅에만 죄로 인한 잔혹한 고난과 괴로움속에 한 해에만 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은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이 절망가운데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 인생역전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 노치형 목사
예레미야는 우리의 마음이 여호와를 떠나므로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죄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탄식을 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고 우리를 오래 버리셨냐고 애통해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범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날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의 고백과 탄식가운데에는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켜 주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다고 서원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같이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범죄의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기쁨의 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슬픔과 애통의 고백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마무리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하는 문이 잠기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열려있는 문을 통해 소망의 빛을 바라봅니다.
다윗도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띠를 띠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슬픔이 기쁨의 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한 소망은 미래의 성취가 아니라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슬픔이 다가온다고 할지라고 하나님만 바라며 믿음을 선포하며 기쁨과 소망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쁨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피곤한 마음과 어두운 눈뿐임을 고백합니다.
슬픔의 처절한 몸짓이 기쁨의 춤이 되게 하시고
떨어져 부서져 버린 면류관을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잊어버리셨던 우리를 다시 기억하시도록 하나님께로 돌아가오니
우리의 날들을 옛적처럼 다시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시인은 범죄 때문에 기쁨이 사라진 성읍과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아뢰며, 다시 옛적으로 돌이키시기를 간청합니다.
기쁨을 잃음 15절~18
탄식의 기도 19~22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1~14절 ‘평화의 도성’이란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이 무법천지의 병든 도시가 되고 맙니다. 포악한 대적들이 여인들의 성을 착취하고 청년들과 어린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합니다. 지도자들과 장로들은 굴욕적인 대접을 받고, 성문 앞 노인들이 사라지고, 거리를 메웠던 청년들의 노랫소리도 그쳤습니다.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강도의 굴혈’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모든 세대가 정당한 대접을 받고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하는 평화의 도성이 되도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합시다.
15~18절 죄는 축복의 열매를 소멸합니다. 죄 때문에 기쁨이 사라지고, 몸의 활기가 사라져 눈마저 어둡고, 존경받던 지위도 땅에 떨어지고, 번성하던 성읍은 들짐승의 거처로 변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축복의 삶을 위협하는 반복적인 죄는 무엇입니까?
16절 시인은 시온 백성의 범죄 때문에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에서 진정한 탄식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시인의 탄식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의 죄를 후회하며 슬퍼하는 ‘자기를 향한 탄식’이며, 자녀의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가 탄식하며 기도해야 할 개인과 공동체의 죄는 무엇입니까?
19~22절 시인은 다시 옛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옛적의 평화, 옛적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먼저 평화와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한때 하나님이 아닌 이방 나라들을 찾아가 구애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시온을 약탈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의탁하며 옛 집으로 돌아왔던 탕자처럼, 이제 시인은 이스라엘의 돌아감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도 뒤틀린 현재를 살펴보며, 다시 돌아가야 할 옛적 신앙, 삶, 관계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머리로는 알면서 먼저 그의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조금도 조금도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나에게 집중하는 일상의삶속에서 하루속히 탈출해야 합니다.
----------
예레미야는 환난을 당할 때에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다고 느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애5:22)
주께서 영원히 잊어버리셨다고 느낀 것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애5:20)
다윗도 자신이 주께 잊혀졌다고 느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시13:1)
욥도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신다고 느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13:24)
그러나 그것은 느낌일 뿐 사실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유1:5)
그래서 성경에 기록하신 것도 느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1:1)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실상을 보이소서"(삼상14:41)
그렇다면 실상이 뭘까요?
실상은 우리로 고생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하나님의 본심은 환난은 잠시뿐이요
오직 우리의 날들을 옛적 본래대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
그러므로 옛적 본래의 사실의 하나님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6:9~10)
그러므로 옛적 본래의 길로 가기 원합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6:16)
그리하면 본래의 하나님이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고 복된 나라를 상속받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7:22)
-----
어둠이 깊을수록 빛을 간절히 찾고 악이 가득한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꽃 피게 됩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의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며 그분의 주권 아래 통치되고 있음을 알고 인정하게 됩니다(19절).
그분의 긍휼하심이 우리를 건져내고 그분의 손길이 닿는 곳에 회복과 치유가 시작됩니다. 수많은 죄악의 껍질을 벗기시고 씻기지 않는 떼를 지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모든 것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이로 말미엄아 이기고 이것만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교만한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 시편 103:10-11
----------
1.죄의 결과
예레미야는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고 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렸던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지고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들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경제적인 빈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빠졌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징계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기쁨이 사라져 버렸고 그들의 춤은 슬픔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린 이스라엘에는 아무런 가능성도 보이지 안았습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가 무섭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두렵습니다.
묵상하기
나는 죄를 짓는 것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있는가?
2.주님의 보좌는 영원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처한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러한 상황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주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하십니다. 결국 이것은 이 처참한 상황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강한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속박하고 있지만 그 나라들도 머지 않아서 사라지겠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진정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기에 그분께 다시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묵상하기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
예루살렘뿐 아니라 백성의 심신도 황폐해진 상황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긍휼과 회복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분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수치를 당하고 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그분의 주권적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진정한 회개가 가능하며, 회복과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지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전에 좋았던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더 좋은 모습으로 새롭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나서 선지자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하나요? - 적용 질문: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은혜를 부어 주시도록 누구를 위해 중보해야 할까요?
-------------
에제 오늘 예레미아의 중보기도를 보면서
눈물의 선지자 인줄로 만 알았던 예레미아가
얼마나 중보기도의 사람이였는지를 깨달을 것 같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한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라는 말씀을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들었던 예레미아
지금은 비록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초토화가 되고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이지만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들을 보여 주셔서 결국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을 통한
인류의 온전한 회복까지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약속 해 주시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부르짖는 예레미아.
우리역시 이런 비전을 보고 아버지의 그 사랑과 그 마음을 깨닫고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 되기를 원한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자 되기를 원한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세상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천하 만물의 섭리와 말씀을 통해 날마다 외치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따라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의 그늘에서 소망의 빛을 발견하고,
슬픔의 눈물 가운데 새 힘을 얻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복된 인생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며
열방 가운데 증인으로 자리를 지키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외침에 넘치도록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죄악과 재해로 인하여 고
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소중한 말씀을 가슴판에 새기며
그 믿음에 합당한 삶으로 본이 되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굳게 세워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