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보니파시오 성인은 673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엑시터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성인은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교로 축성되어 마인츠 교회를 다스리며, 동료들과 함께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다. 성인은 프리슬란트(오늘날 네덜란드) 지방에서 전교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본기도
주님,
거룩한 순교자 보니파시오의 전구를 들으시어
그가 입으로 가르치고 피로 지킨 신앙을 저희도 굳게 보존하며
행동으로 충실히 증언하게 하소서.
제1독서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입니다.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누구에게 성경을 배워야 할 지 결정하는 법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게 될까요?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을 잊고 또 그러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점차 물을 끓이면 뛰어나오지 못하고 그냥 익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보면서도 보지 못할까요?
모든 멸망에는 이기적 욕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있습니다. 로마도 지나친 쾌락주의에 빠져 멸망에 이르렀고,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굶은 사람들을 조롱하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도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유일한 스승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멸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훨씬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신앙은 그저 액세서리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는 해야 해서 억지로 모세오경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살았는데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 중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소개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죽은 개의 주인이라고 하는 게 무슨 능력을 나타내는 소개가 될까요? “100억짜리 말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면 놀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신 것이고 그래서 부활은 존재합니다. 다만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안 그럴까요? 욕망은 비교할 때 더 커집니다. 인스타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만 못 가지고 못 먹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굳이 더 맛있는 것을 먹는 프로그램을 보고 더 잘나가는 셀럽들을 찾아봅니다. 이렇게 로마나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보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은 더 극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돈이 부족합니다. 나도 생활 수준이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비경제가 둔화하고 그렇게 살기 어려워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상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뜨거워지는 물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스승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눈이 머는 이유는 욕망 때문인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욕망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는 이라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성령을 힘입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메주고리예는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한 번 가봤는데 성모님의 증인 여섯 명이 전부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무슨 죄냐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싶어집니다. 욕망이 완전히 불타버린다는 뜻입니다. 루르드나 파티마는 성모님을 본 분들이 다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모두 결혼하였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사제였는데 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내나 자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해석하십니다. 그러니 욕망에 조금이라도 사로잡혔다면 그만큼 성경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에 자유로운 예수님과 같은 이들을 스승으로 삼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이들이 많아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프랭클린 루스벨트).
사진설명: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