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8월 24일 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1독서 : 묵시 21,9ㄴ-14
복 음 : 요한 1,45-51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 8월 20일(금) 저녁에 아버님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하게 병원에 가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힘들게 눈을 뜨시고 저와 눈을 마주쳐주셨고,
성호를 긋고 싶으신지 손을 움직이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좋아보이는 모습에 좀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지만,
다음날 저녁 8시 47분에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작년 어머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시고, 16개월 만에
아버님께서도 하늘나라에 가시니 서운함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 상에 조문해주셔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셨고,
많은 기도를 해주셨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더 열심히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를 아실 것입니다.
사상을 탄압한 사건으로 실용 서적 외의 모든 책을 태우고,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었지요.
왜 진시황제는 책을 태우고 공부하는 유생을 죽였을까요?
사람들이 독자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찌 히틀러 역시 책을 태웠고, 우리나라 군사독재 시절에도 금서가 있어서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인류 역사 안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더 나은 세상과 삶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꿈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지배자는
그래서 책을 태우고 읽지 못하게 했으며,
꿈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제거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을까요?
또 사람들 모두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를 통해서 함께 성장할 기회를 찾았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던 지도자들은 역사 안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필립보를 향해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마음이 열렸고, 그 열린 마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과 권능은 우리 삶 안에서도 쉽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필립보의 말, “와서 보시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보러 갔기 때문에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볼 때
비로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힘으로 누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로 사랑으로 감싸 안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함께 할 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내 일상에서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 된다.
신앙과 삶은
거짓이 없는
진실함에서 출발한다.
주님께서는
거짓이 없는
바르톨로메오를
정확하게 알아보신다.
진실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실한 삶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하느님 안에서
거짓이 없는 사람의 삶이다.
거짓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거짓으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수는 없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진실이 무너지면
다른 가치들도
자연스레 무너진다.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은
참된 열매를 맺는다.
믿음은
거짓을 용기 있게
내려놓는 것이다.
진실을 만나는
기쁨이다.
진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진짜 우리 자신을
만나게 하는
복음의 시작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은 ‘검색의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읽기 전에 검색하고, 생각하기 전에 검색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검색합니다.
검색이 쉽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모여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관련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을 하곤 합니다.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이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이야기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검색합니다.
전 세계 코로나 현황도 실시간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백신 접종 현황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여행가서 머물 장소도 검색을 통해서 알아 볼 수 있고, 예약도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검색의 시대에는 아직 초보자의 수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검색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98년부터 ‘굿뉴스’를 통하여 다양한 신앙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대면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즘,
굿뉴스는 신앙에 목마른 분들에게, 영성의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소중한 샘물이 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정보, 자료실, 갤러리, 게시판 등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분당 요한 성당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본당의 다양한 모습과 본당에 설치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평화방송은 팬데믹 시대에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미사를
방송과 유트브를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성체를 모시지는 못하지만
방송미사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지면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인사이동에도 검색은 함께 합니다.
신자 분들은 검색을 통해서 아직 오지 않은 신부님에 대해서 이미 알기 시작합니다.
검색의 시대가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습니다.
정치인, 연예인, 유명인들은 본의 아니게 정보가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잊어버린 일들도 검색의 장소에는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 했던 실수와 허물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상이 공개되기도 합니다.
수입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비방과 원색적인 내용을 검색의 공간에 올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정보, 왜곡된 정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만 검색하려 합니다.
자기가 검색하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 검색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검색이라는 동굴에 갇혀서 밝은 세상을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검색을 통해서 옥석(玉石)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검색’을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를 견디어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과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바로 그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나의 행위와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회개하고, 뉘우치는 이들의 허물은 묻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우리를 받아 주시며,
하느님의 도성에 그 이름을 기록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이 넘치는 어느 만남을 보여 주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필립보의 권유로 당신을 만나러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피조물을 보고 기뻐하시는 창조주의 탄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전형을 보십니다.
"거짓이 없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느님 백성이 되어기기 위해 지켜야 할 지침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머니 배 속에서 지음 받을 때부터
존재의 뼛속까지 하느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께는 숨겨진 것도 감추인 것도 하나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무엇보다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당신의 뜻을 찾는 충실한 자녀이기를 바라십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일상의 중요한 순간을 떼어 하느님 앞에 머무르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삶의 많은 부분을 일로 보내는 이도 있고 돈 버는 데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요.
떠들썩한 유흥과 어울릴 사람을 찾는 이도 있고요.
그 중에는 성실하게 진리를 찾고 말씀에 머무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서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맑은 신부다움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에 나타나엘이 화답합니다. 그 역시 기쁨에 차서 외칩니다.
평생을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를 만난 기쁨입니다.
그 역시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구원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시리라는 예언에 묶여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나자렛 출신이라는 점이 못내 미심쩍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확신에 차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메시아를 고대하며 영적 스승을 찾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행동은 새로운 충격과 각성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시작도 못 했지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실 하늘 나라의 실체는
그들의 기대나 바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보여 주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묵시 21,10-11)
천사가 묵시록 저자에게 보여 주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성도 예루살렘은 이제 지역이나 공간적 개념을 넘어
하느님께서 친히 머무르시는 영원한 거처, 바로 교회인 우리 자신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의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공들여 묘사합니다.
매우 값진 보석같은 광채는 그 고귀함과 거룩함을,
수정처럼 맑은 빛은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함을 드러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예견했듯,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모습입니다.(에페 5,27 참조)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열두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초석입니다.
초석은 기둥과 땅을 연결하는 주춧돌로, 기둥에서 전해지는 무게를
땅에 고루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지요.
신부인 교회의 신앙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에게서 배우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도들 위에 단단히 세워졌습니다.
사도들 위로 긴밀히 쌓아올려진 교회는 그래서 아름답고 진실되며 굳건합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마주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알아보시며 무어라 감탄하고 탄성을 올리실지요?
그분은 우리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 기억하실까요?
또 그때 우리는 이 지상 삶에서 그토록 그리던 주님께 무어라 사랑과 믿음을 고백할까요?
어쩌면 그분께 숨겨진 것 하나 없는 처지에 부끄럽고 송구하고 죄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주님은 그조차 넉넉히 받아 안아 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떠올리는 오늘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그렇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사람 꼭 옆에 두세요.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던 바르톨로메오는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인물이었습니다.
필립보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는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며 그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하자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거짓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가 거짓말의 상징임으로
자신은 모든 것에서 진실하여야 함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 묵상을 예수님께서 마음까지 들여다보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르톨로메오도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곁에서 배워 결국엔 피부가 다 벗겨지는 고문을 이기고
사도로서 위대한 성인이 되셨습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곁에 두지 않았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엔 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내 곁에 두어야겠습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겠습니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며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인정해주는 사람이란 누구겠습니까?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한 독일인 부부가 서른 곳의 병원에 다니고도 절망에 빠져 벤 카슨이란 흑인 의사를 찾아옵니다.
그 부부는 요한과 슈테판이란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 수술을 성공시킨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기를 낳고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아기들도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견디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두 명의 아기가 다 살기를 원했습니다.
벤 카슨은 수술 중 과다출혈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합니다.
아기들 몸 안엔 수술 시간을 버틸 충분한 혈액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벤은 시도해보기로 합니다. 물론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흑인 아이가 멀리 독일에서 의뢰가 들어올 만큼
신경외과의 세계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을까요?
아버지 없이 자란 벤은 공부도 아주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자녀들을 잘 키우고 싶었지만
남의 집 청소를 하고 남의 애를 봐주면서 자녀를 잘 돌볼 충분한 시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는 벤에게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넌 똑똑한 아이야. 다만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이야. 넌 최고야.”
엄마가 하루에도 수백 번 이렇게 말해주는 데에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신도 그런 마음이었을 때
아무도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고 하지 않고 대학교수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책을 읽을 것을 권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가 믿어주는 것 때문에
어머니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벤은 전교 1등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인종차별이 심할 때여서 상을 받는데도
선생님들은 아버지도 없고 흑인인 벤도 하는데
백인인 너희들은 왜 못하냐며 오히려 벤 앞에서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인턴 때도 흑인이기에 그의 의견은 무시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의사들이 모두 콘퍼런스에 갔을 때
폐엽 절제술을 해야만 하는 응급수술 환자가 들어옵니다.
어쩔 수 없이 자격도 없는 그는 수술을 진행하고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의 의사 생활은 거기서 끝났겠지만
숙련된 전문의들도 후유증을 남기기 쉬운 어려운 수술을
인턴이 해낸 것에 모든 의사가 놀랍니다.
그리고 아내의 유산으로 그는 아이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합니다.
그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33세에 존스 홉킨스 최연소 신경외과장이 됩니다.
그렇게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 수술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피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도 어머니가 도움을 줍니다.
“샴쌍둥이 수술 때문에 걱정하니? 넌 할 수 있어.”
그때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수도꼭지처럼 심장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피가 돌지 않아도 뇌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시간 동안
심장을 멈추고 머리를 분리하고 피가 새는 혈관들을 막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벤이 매일 기도를 한다는 한 마디에 부모도 그 수술에 동의합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22시간이 걸린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성공시킵니다.
수술을 마치고 나와 걱정하는 부모에게
“어느 애부터 보시겠어요?”라고 말할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 이후로도 벤 카슨은 엄청난 업적들을 이뤄내며 나이가 들어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쟁자가 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영화 제목은
‘타고난 재능: 벤 카슨 스토리’(2009)이지만 과연 타고난 재능이었을까요?
그에게 자신을 믿어주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그만큼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나를 알아준다는 말은 나의 무한한 가능성,
곧 신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옆에 두십시오.
벤 카슨은 10달러 지폐에 들어갈 위인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꼽았습니다.
“넌 할 수 있다.”란 말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하며 그를 믿어주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정받는 만큼 성장합니다.
바르톨로메오에게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곁에는 헛된 꿈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애초부터 그런 꿈은 꾸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사람을 곁에 두십시오.
나를 아는 사람을 옆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다가 누군가 “그런 생각은 교만한 거야.”라고 말해버리면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주려면
나도 분명 그런 사람을 곁에 두었더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무화과나무 밑에서 생각이나 하던 한 사람을 알아주셔서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의 기도 꺾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건 교만한 생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장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내가 옆에 두는 사람이 곧 나의 믿음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