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周;莊子) 외편 지북유에서는
지가 무위에게 도를 물음으로써 나타낸 것처럼
지를 버리고 무위(道)의 진의를 체득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는 천지에 앞서 있어 만물을 만물로 만들지만
그 자체는 물이 아니니, 이른바 근본의 뿌리다.
그러므로 유(有)라 하여도 유가 아니요,
무(無)라 하여도 또한 무가 아니다.
그러므로 함허당(涵虛堂)은 [여기 일물(一物)이 있으니,
이름과 상(相)을 뛰어 났어도 고금을 꿰뚫고 있으며,
한 티끌 안에 있어도 육합을 두루 싸며,
안으로는 모든 묘한 것을 머금었고, 밖으로는 군기(群機)에 응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나아가 설사 일물이라 해도 곧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다만 무위로써 그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도는 하나이다.
무위로써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를 귀히 여기는 까닭이다.
지자(知者)의 소견은 여기 이르면 반드시 변(辯;판별할 변)이 있다.
그러나 지가 있는 것은 지가 없는 것만 못하고,
말이 있는 것은 말이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말이 말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이 갈 곳을 멸했다] 한 것인가?
사람이 나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것으로서,
기운이 모이면 살밍 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음이 되는 것이니,
죽음과 남이 동류라면 내 또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멸하는 것이다.
구름은 원래 실체가 없거니, 생사와 거래도 또한 그와 같다]고 불가에서 말하는 것이다.
내 생은 원래 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죽음은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생이 길든 짧든 다 진(塵:티끌진)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미루어 본다면 이 우주 사이의 영허(盈虛:찰여,빌허)와 소장(消長),
본말(本末)과 취산(取散)은 그 실질이 없는 것으로서,
만물을 만물로 만드는 것은 만물과 간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무리고 하는 자는 이것을 명명(冥冥:어두울명)이라 하고,
도를 유라고 하면 그것은 비천이다.
유와 무를 초월한 것이 곧 도이다.
그러면 도는 어디에 있는가?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 개구리와 개미 한테도 있다.
기장이나 피에도 있다.기왓장이나 벽돌에도 있다.
똥이나 오줌 속에도 있다]고 하였다.
-선시와 함께 엮은 장자, 고려원-
첫댓글 어렵다 남마담-죽음 앞에 이르면 모든 사람은 벌거벗은 빈손의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을 미움과 탄식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일 뿐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해 좀더 넓은 마음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잘사나 두고보자' 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고 보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보면 볼수록 아픔만 커질 뿐입니다.
두고보면 잘사는 것만 보입니다.
지금까지 그를 통해 얻은 아픔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 그를 그만 보고 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사람도 조금 있으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불쌍한 존재이니까요.잘난체 우쭐거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