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집착증(?)이 있다. 글을 읽다가, 대화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정확한” 뜻을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 어림짐작으로 그럴 것이다 하고 넘어가면 불편한 마음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때론 이미 아는 단어도 이리저리 뜯어보아 그 뜻을 재해석하거나 확장하고 싶어진다. 지금 딱 ‘쓸모’가 그렇다. 요새 가장 꽂히는 단어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하는 행위. 사전 찾아보기
“쓸모: 쓸 만한 가치”
쉬운 말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철학자들은 쓸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쓸모: 도구적인 것들의 지시관계를 성립시키는 요소 (이게 뭔 소리?)”
예를 들어 망치는 못 박힐 때 가장 적합하게 사용된다. 만약 망치가 다른 용도로 쓰인다면 흉기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 적합하게 한다’는 존재성격을 쓸모라고 하는데, 쓸모는 ‘어떤 것이 어디에’라는 관계 구조를 갖는다. 농부 김광화는 ‘사람 이야기, 곡식이야기’라는 에세이에서 “이 세상에 쓸모 없는 게 있을까. 자신이 쓸모 없다고 느껴진다면 제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쓸모란 어떤 것이 제자리에 있어 적합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쓸모’에 꽂히게 됐는가?
몇 주 전 오년 넘게 같이 일했던 동료가 회사를 그만뒀다. 더 좋은 조건의 회사로 이직을 한 것이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허함이 컸다. 특히 내가 더 그랬다. 자꾸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들었다. 이 나이 먹도록 옮기지도 않고 뭐했나 싶었다. ‘좀 더 상황 판단이 빨랐더라면, 좀 더 영민했더라면 진즉 점프 업 했을텐데..’ 실제로 지난 2년 간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계속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내겐 열리지 않았다. 새로운 직원으로 들어가기엔 경력이, 나이가 너무 무거워진 탓이다. 대부분은 서류에서 떨어졌는데 그래도 개중 몇 곳은 면접까지 가기도 했다. 허나 아쉽게도 그 어느 곳과도 연이 닿지 않았다.
나는 계속 죽쑤고 있건만 수월(?)하게 이직에 성공한 동료를 보고 있자니 질투가 났다. 한참 어린 후배라고만 생각했는데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이직에 성공한 것을 보고 솔직히 배가 아팠다. 이런 나의 질투심과 속쓰림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후배의 앞길을 격려해주는 못할 망정 질투했던 내 모습이 싫었다. 부끄러웠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 앉은 뒤, 그런 내 모습까지 나 자신이라고 인정하자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왜 이다지도 이직에 목매달았던 걸까? 회사를 옮기면 뭐가 좋은건데? 커리어 확장, 자기 계발, 능력 실현, 연봉 인상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마음 속 또 하나의 목소리도 있었다. 진짜 유치한 이유이다. 이직에 성공해 나의 능력을, 쓸모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직원들을 못 살게 구는 대표 앞에 사직서를 탁 던지면서 ‘봐라! 나는 아직 꽤나 쓸모 있다. 아쉬워 해봐라 소용없다. 난 간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 쓸모… 이 쓸모 있다는 것에 나는 집착하고 있었다.
무엇이 과연 쓸모 있는 걸까?
졸업 이후 20년 넘게 몇 군데 직장을 거치며 쉼없이 달려왔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할 때도 거의 쉬는 기간 없이 바로 업무에 임했다. 유일하게 쉰 (그러나 실은 전쟁만큼 치열한) 기간은 육아휴직 1년이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성취와 인정에 목말라 위만 보며 살았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은 회사와 동일시 되었다. 그랬던 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승진에선 누락하고 치고 오는 후배들에게 점점 밀리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직에 목매달기 시작한 게. 중간관리자의 두려움과 절박함이란 지겨운 클리셰… 판에 박힌 스토리이지만 그 뻔한 내용이 내 삶에도 펼쳐지고 있었다. 조금씩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는 모습이 속상했다. 존재가치가, 쓸모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서 말한 “나 아직 쓸모 있다”며 자랑질할 계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왜 나는 안 풀릴까를 고민하며 속상해하던 내게 큰 위로가 된 문장이 있다. 한동일 교수의 강의를 담은 ‘라틴어 수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실 인생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중 많은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마도 계속 그럴 겁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것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한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한 문장을 읽는데 눈물이 났다.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승진이든 이직이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좌절하지는 말자. 좌절하다 못해 나를 자학하지 말자. 자학은 이제 그만! 이렇게 다독이고 나니 오히려 지금껏 회사에만 종속돼 있던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스스로’ 설계하는 자발적인 인생이 시작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동안 ‘쓸모’란 단어에 깊게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첫댓글 인생이 내 뜻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면 인생의 많은 고민이 덜어지는 듯 해요. 제 경우엔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이 계기가 됐지만요.
그리고 내 쓸모는 내가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