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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의 정결법 논쟁7:1~8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 7:9~13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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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 명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자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며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렸다는 핑계로 부모에게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등,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 말씀을 폐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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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의 정결법 논쟁7:1~8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논쟁이 ‘정결법’ 논쟁으로 옮겨 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훼손했다고 비난합니다(2, 5절).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었고, 시장을 다녀온 후에도 이방인과 접촉했을까 염려해 목욕했습니다. 또한 이방인이 제조한 생활 용기를 부정하게 여겨 물에 씻은 후 사용했습니다(4절). 바리새인들은 이런 규정을 지키며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외적 행위가 아닌 내면의 거룩함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위선자들로 규정하십니다(사 29:13).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에 집착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외적 행위로 그의 신앙과 경건을 가늠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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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 7:9~13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모를 대하는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라는 하나님 계명보다 장로들의 전통인 ‘고르반’ 서약을 앞세웠습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헌물’을 의미합니다. 제물과 예물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하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부모 부양에 필요한 물질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해 부모 부양의 의무를 교묘히 피해 갔습니다. 곧 ‘사람의 계명’을 우선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화하려 한 것입니다(11~13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저버린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딤전 5:8).
● 더 깊은 묵상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악용한 전통은 무엇인가요?
전통보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시하기 위해 세울 원칙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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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사람의 착각
당신은 오만하고 버릇없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모와 선생, 어른도 알아보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함부로 하는 어린 친구들 말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거들먹거리기 좋아하고 밉살스러운 행동을 하며 툭하면 못된 말을 일삼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친구들보다 우수하다고 자랑하길 좋아하며 겸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외치고, 자신을 칭찬해 주지 않으면 골을 낸다. 이런 아이들을 대할 때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지적도 쉽게 수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지적에 대한 그들의 첫 반응은 언제나 분노와 토라짐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들의 오만이 무엇에서 비롯했든 그 결과는 똑같다. 바로 무례함과 나쁜 행동이다. 불행히도 오만한 아이는 하나같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착각한다.
위에 묘사한 오만한 아이의 모습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의 모습과 놀라울 만치 비슷하다. 또한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도 그러하다. 나 자신이 오만한 아이처럼 되어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은 그런 나를 어떻게 보실지 늘 두려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신론자들의 마음속 / 앤서니 데스테파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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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13절
전통을 수호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본래 정신과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열정적으로 지키는 가치들이 하나님 뜻과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이를 인정하려면, 외적 형식에 포장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는 용기와 통찰이 필요합니다. "나는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말씀을 듣는가?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울림과 확신을 주는가?" 이 물음에 "예."라고 답할 때 우리는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자신이 멸망당할 존재라는 경각심 없이 항상 자기 자신을 옳게 여긴다. - 찰스 스펄전
오늘의 기도
하나님! 늘 그렇게 했다는 전통과 관습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우선시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제게 익숙한 방식을 벗어 버리고, 절대 기준인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하소서. 입술의 순종이 아니라 삶의 순종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64 정결하게 하는 샘이)
오늘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교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이 힐문하자 고르반의 예를 들면서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예수께서 비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 율법에 어긋나는 제자들의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포착되었다는 말입니다. 서남아시아지역에선 주로 손을 이용하여 식사하니, 따라서 손을 씻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손 씻는 일이 이스라엘에서는 단지 위생적인 측면보다는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서 강조되니 이른 바 ‘정결법’입니다. 이는 고대서부터 위생적으로 불결함을 종교적 부정으로 여겨 공식 율법화 시킨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반드시 지켜졌는데,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으니 그들이 눈에 틀림없이 부정한 것으로 보여 주님을 정죄하게 이른 것입니다.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 정결법의 좋은 예입니다. 여기서 물을 뿌렸다는 말은 마당에 물을 뿌렸다는 뜻이 아니고, 시장 같은 번잡한 곳에 다녀와서는 반드시 몸을 씻고 식사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물을 적시기나 물에 담근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침수 즉, 목욕을 하였다고도 합니다. 또한 시장에서 사온 그릇들도 깨끗이 씻습니다. 그런 도구들은 주로 이방인들에게서 구입하기에 반드시 부정을 제거하는 의식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고르반’은 ‘제물’ 혹은 ‘헌물’이란 뜻으로,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예물의 한 종류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포로기 이후 조금 다른 형태로 변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맹세용어로 쓰인 것입니다. 즉, 어떤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말의 첫마디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재물은 오직 성전에 바쳐지는 용도 외에는 쓸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고르반’이라고 선언되면 그 재화에 대한 소유권을 사람이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에 부모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 되지요. 결국 고르반의 맹세로 말미암아 어떤 용도의 재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을 제공해 준 셈입니다. 곧 노부모를 부양하는데 드는 재물입니다. 결국 그 제도는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는데, 이 모두 하나님의 계명을 져버린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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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너희가 물려받은 조상들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고르반 외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는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율법주의 곧 율법제일주의입니다. 구약율법을 숭상하는 사상으로, 율법준수나 선행을 의로움이나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고질병입니다.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사람의 전통이 계속 교회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 술 문제도 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사람의 전통에 비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하지만 않는다면 즉, 즐거운 식사나 혹은 건강을 위하여 정도가 지나치지 않게 마시는 포도주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금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술 자체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전통이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외국 식당에선 와인을 즐깁니다. 와인과 치즈는 환상의 조합입니다. 탁주와 두부와 김치도 잘 어울립니다. 그들이 와인을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니고 우리가 탁주를 마시는 것은 죄라고 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곡주와 화학주의 차이는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봅니다. 더불어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음주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초기 한국교회가 결정한 한국 문화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절대적 진리는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금하고 있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캘빈도 그것을 양심과 관련된 것으로 봅니다. 즉, 양심에 따라 허용된 것에 관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비본질적인 것이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나 술 자체를 금한 일은 없습니다. 갈비 집을 하는 집사님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성도님이 계속 눈치를 보며 술을 팔아야 할지 이제 공론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대와 문화와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갈등이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미풍양속의 전통도 시대가 가면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더 이상 권면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만 지켜도 충분합니다. 그것을 지키기에도 짧은 인생입니다.
1월17일 동인천 지하상가
‘ 장로들이 전해 준 전통 ’ vs. ‘ 하나님의 계명 ’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치유의 사건에서 마가는 이제 주님께서 논란의 한 가운데에서 답을 지혜로 이끌어내시고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은 오랫동안 장로들에 의해 규정되어 온 정결 의식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위반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먹기 전 손과 그릇 등을 깨끗하게 함으로 자신들이 부정한 것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율법화하여 전통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내려온 그들의 관습은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가 되기 위해 필수 조건인 양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지켜왔던 그 전통은 다른 면으로 보면 그들의 일상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지키고 붙들고 있는 끈에 불과했습니다. 자신들이 정작 행하고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마음은 외면한 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신봉하는 율법의 아버지 모세가 하나님을 통해 받은 십계명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무시한 채 자신의 재물을 아껴 마치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고르반’이라 선포함으로 그 진정으로 행해야 선과 위로부터 스스로 자신들은 예외가 되게 하는 일들을 습관적으로 반복했고 다른 이들 향해 그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규칙으로 손가락질하고 정죄의 칼날을 들어 결국 스스로 더 ‘추하고’ 또한 ‘정결’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새 계명을 이 땅 가운데 지키는 거룩한 자녀로 매 순간 성령 충만함을 구하는 또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말씀이냐 전통이냐? 믿음이냐 종교냐?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믿음이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는 생명이 있지만 전통에는 없고, 믿음에는 구원이 있지만 종교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은 전통을 위해 말씀을 버립니다 이것은 바나나 속은 버리고 바나나 껍질만 먹는,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만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껍데기는 버리고 본질은 취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지금도 손과 발을 씻는 정결례 같은 전통은 버리고 말씀은 취하는 진실한 성도를 오히려 비난합니다 어떤 부흥강사 목사가 교회에서 악기 연주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설교했고, 교통비로 쓰기에도 벅찬 작은 사례비를 받고 먼 길을 왕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던 가난한 한 청년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 목사무당의 말이 옳다면 자기도 설교하고 사례비를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 소리를 내는 사람은 돈을 받아도 되고, 악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전통은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누구를 위해 시작한 것입니까?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7:13)
이렇게 전통을 진리보다 앞세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7:6~7)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전통을 앞세우는 걸까요? 쉽고 편안한 거짓 안식처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전히 그 속에는 음란과 거짓과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주일성수라는 전통을 지킴으로, 자기는 진리와 은혜 가운데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안심하는 거짓 안식처에서 영혼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은 성전에서 먼저 시작되고, 그때 그들은 불에 삼켜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진리만 따르며 전통을 따르는 간사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기 원합니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시26:3~4)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6-8절 내면의 동기를 들여다보시는 분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추구한 ‘장로의 전통’은 모세율법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해석을 규범화한 것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만큼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어도 사람들은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로의 전통’을 ‘사람의 전통’이라고 달리 표현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신앙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온 마음과 온 뜻,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신앙 규범을 지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체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5절 종교 지도자들은 장로의 전통으로 사람들을 속박했습니다. 거처도 변변치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제의적으로 정결을 유지하는 것이 버거운 일이지만,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런 고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라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버린 까닭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좋은 신앙 유산들(새벽기도, 금식, 철야기도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개인의 경건과 이웃 사랑의 방편으로 삼는다면 좋은 것이지만, 이웃의 신앙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우리 역시 외식적인 신앙에 갇힐 수 있습니다.
9-13절 전통의 악용은 ‘고르반’을 실천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납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지정하여, 부모가 그 물건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관행입니다. 고르반이 표상하는 거룩한 정신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입에 발린 말일 뿐입니다. 혹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말씀이나 신앙 덕목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4-23절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속임수, 비방 등은 모두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은 이런 죄의 뿌리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온갖 더러운 것을 마음에 방치한 채, 겉만 씻는 것이 외식입니다. 겉만 꾸미는 종교 관행을 실천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마음부터 정결하게 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기도
위선적인 태도를 버리고 말씀을 따라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하소서.
✔ 복음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1~5절).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에 대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며 비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하게 준수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를 주실 때 일부는 문자로, 일부는 언어(말)로 주셨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를 ‘구전 율법’이라고 불렀는데, 그 안에는 모세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수많은 규칙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손을 깨끗이 씻지 않았거나 외출하고 와서 씻지 않았으면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규례만 지키면 부정하지 않고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는 헛된 믿음 생활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인 종교 생활 즉 헌금 잘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있으면 구원과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특정한 행위로 거룩하게 구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복음을 거스르는 행동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내에 한 부서에 오랫동안 봉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근속상(??)’과 같은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근속상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난 후부터는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없애면 안 되는 제도 중에 하나라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아무튼 어떤 공로주의나 형식적인 종교생활에서 벗어나 복음 하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외식적인 경건생활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6~13절).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외식하는 자들아...입으로는 나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 있다...’(6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전통과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쳤고,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7~9절)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세운 ‘장로들의 전통’을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이라고 달리 표현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는 곧 ‘위선자’를 뜻합니다.
위선자는 제 눈에는 들보를 넣고 있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낼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고 구제하는 자들입니다. 객관적인 자기모순에 빠져 하나님을 기만하는 죄를 범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예로 ‘고르반’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림을 뜻하는 것으로 ‘고르반’으로 선언된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제도를 악용해서 부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습니다(11~12절). 사람의 전통으로 마땅히 행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일이 이외에도 많았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며 나아갈 때 온전한 경건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경건생활이라는 것은 외적인 행동 아니라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악한 행동을 덮기 위해 신앙이라는 요소를 통해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악한 마음들이 내 안에 있지 않은지... 내 욕심과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신이 돌아봅니다. 내 생활과 내면은 심하게 부패해 있으면서도 경건하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겠는지요? 복음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사람, 새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이중적인 정결행위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14~23절).
예수님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16절). 다시 말하면 손을 씻고 음식을 가려 먹는 율법의 행위로는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비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즉 음란,도둑질,살인,간음,탐용,악독,속임,음탕,질투,비방,교만,우매함등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20~23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에서 어떤 생각과 결정이 이뤄지는가에 따라 내 삶의 정결 여부가 결정됩니다. 내 마음은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내 노력으로는 완전하게 깨끗해 질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그리고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며 모든 악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만 있고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참된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선한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 보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생각의 대부분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영광을 뜻을 삶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나의 의에 빠져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이 되지 않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악한생각을 버리고 신앙의 본질을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막 7:1~23절)... .
오늘의 말씀요약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판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그들을 비판하십니다.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그만이라며 그들이 전통으로 하나님 말씀을 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장로들의 전통(7:1~5)
유대인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을 지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지킴으로써 거룩한 조상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자신들의 거룩함도 보장된다고 믿었습니다. 전통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로들의 전통은 그들 기준으로 유대인을 거룩하게, 전통 밖에 있는 이방인을 부정하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중요한 전통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키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대로 된 유대인이 아니며, 그들과 같은 편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하나님 뜻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유대인이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우리 교회만의 전통 또는 특정한 의식과 프로그램 등을 잣대로 삼아 다른 교회와 성도를 함부로 판단하진 않나요?
외식하는 사람들(7:6~13)
말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을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서원 형태로 바친 것을 뜻합니다.
유대인은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헌물로 드리면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습니다.
원래 이런 고르반은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부모 부양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즉,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함으로써 부모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도 제대로 헌물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꾀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고르반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한 이들은 위선자입니다.
- 묵상 질문: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고 하셨나요?
- 적용 질문: ‘고르반’처럼 내 이익 추구나 책임 회피를 위해 악용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거룩한 삶은 사람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히 여기고 따를 때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제가 고집했던 생각과 판단 기준을 내려놓고 오직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온전히 경배하게 하소서
.
유대인들의 전통(1-4)
"결례 의식은 아주 엄중하게 실시한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 먹기 전에 지켜야 할 의식을 무시하면 가증한 죄로 간주되어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의 미덕처럼 인정되었다. 정결에 대한 규칙은 무수히 많았다. 사람이 일생 동안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정도였다. 랍비의 요구를 지키려고 힘쓰는 자들의 생애는 의식적인 부정에 대한 긴 투쟁이요, 씻음과 정결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도 않으신 쓸데없는 구별과 규칙에 정신을 빼앗기는 반면에 그들의 관심은 그분의 율법의 대원칙에서 떠나가 버렸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이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았는데, 정탐꾼들은 이 소홀함을 비난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분께 나왔다. 그들은 군중이 있는 곳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진리의 기별이 특별한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임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대리자들을 발동시켜서 중요하지 않은 어떤 문제에 대해 논란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사단은 참으로 중요한 것에서부터 관심을 돌이키게 하려고 힘쓴다. 언제든지 좋은 일이 시작되면 트집쟁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참된 실체에서 돌이키려고 형식이거나 전문적인 일에 대해 논란을 일으킬 준비를 갖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영혼의 멸망만을 초래할 논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가장 염려할 문제는 내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나의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느냐는 것이다"(소망, 396-397).
올바른 말씀 순종의 삶(5-13)
"예수께서는 자신이나 제자들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비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인간이 세운 의식을 고수하는 자들을 충동한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어떤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을 찾으러 나오기 직전에 무엇을 행하였는지에 대한 한 실증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섯째 계명을 전혀 중요치 않은 것으로 제쳐 놓았지만 장로들의 유전을 준수하는 데는 엄격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성전을 위하여 재산을 바치는 것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보다도 더욱 신성한 의무이므로 아무리 궁핍할지라도 이렇게 성별(聖別)한 것 중의 어떤 부분이라도 부모에게 드리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불효한 자녀는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여 자기의 재산에 고르반이라는 말을 선언만 하면 평생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그 재산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성전 봉사를 위해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자녀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하나님께 대한 가식적인 봉헌(奉獻)을 구실로 부모를 마음대로 불공경하고 속였다.
예수께서는 말로나 행위로써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바쳐야 할 사람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율법의 모든 명령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지상 생애를 하실 때에 그분께서는 성전의 연보궤에 모든 것을 바친 가난한 여인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제사장과 랍비들이 외관적으로 하나님께 열성을 보인 것은 자기 재산의 확대를 위한 저희의 욕망을 은폐하려는 가면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우지도 않으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인습적인 편견과 랍비의 권위에 의해 그들에게 지워진 그 멍에를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하였다. 이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본심을 폭로하심으로써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유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힘쓰셨다"
▧ 적용
1. 나의 신앙생활에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것들이 있지는 않는가?
2.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가정생활에 등한히 하고 있지는 않는가?
▧ 기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가식적인 삶을 벗어버리고, 오직 진실로 말씀의 본질에 순종하게 하소서.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 삶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며
생명을 주심으로 가야할 바와 되어야 할 존재가 어떠한지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헛된 관습과 편견과 교만을 떨쳐버리고
이끄시는 그 손길을 굳게 붙들고 전진하는
믿음의 군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주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예배하게 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측량할 수 없이
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