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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욥기의 말씀 38,1.8-1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불볕더위가 밀려오는 듯하더니, 장마가 다그쳐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삶의 신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네 삶 안에 있기 마련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을 통하여 어디로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줍니다.
사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말하듯이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비참한 상태로 몰아갈 때가 있고,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억울해지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새 친구와 욥과 엘리후의 변론을 통해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여전히 욥은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비참에 떨어져 절규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답을 들려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욥 38,8-11ㄱ)
이 대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시고 당신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가지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은 하느님께서 길을 내주신 곳까지입니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욥 38,11ㄴ)
이 말씀에서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며 받아들임으로써 그 참된 해답을 얻게 됨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것’,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곧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성공과 승리에서만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질병, 고통과 상처, 무능과 실패를 통해서도 신앙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바닥을 치는 데까지 나아가서야, 그 순간 오히려 그 한계와 나약함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겸손한 신앙’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이 ‘겸손한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과 시련이었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 고통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다 위에는 '거센 돌풍이 일었고',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함께 계시지만 침묵하고 계시고, 현존하고 계시지만, 잠들어 계십니다.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은 함께 계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은 잠재우고, 제자들은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
(시 88,9-10)
동시에 제자들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는 반면, ‘믿음’을 깨웁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이 어둠을 넘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요청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그분의 사랑의 요청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2코린 5,14).
“다그치다”(συνεχει)라는 말은 ‘빨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다’, ‘강하게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행동하게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강력한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코린 5,1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움의 이동>
오늘 연중 제12주일의 얘기와 가르침은 우리 인생과 공동체가 한번은 겪게 될 어려움과 그 대처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의 배는 주님을 태우고 호수를 건넙니다.
그런데 돌풍과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는데, 없었으면 좋겠지만 이런 일이 우리 인 생에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한두 번은 무척 당황하고 두려움에 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번 경험했다면 침착할 수 있어야겠지요?
어떻게?
첫째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담대해지고 침착해지는 겁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정신차리고, 자신에게는 담대해지자, 침착해지자고 주문을 걸면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까짓것' 하며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큰일 났네'라고 합니다.
차분히 생각하면 큰일이 아닌데 큰일이 났다고 한순간 그에겐 큰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어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이 경험들에서 지혜를 얻어야 하고,
그래서 지혜로워진 사람은 작은 일도 큰 일로 만들어놓고 쩔쩔매는 어리석은 사람과 달리,
담대하게 큰 일도 작은 일로 만들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해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적인 방식이라면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이 또한 정신을 차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풍랑이 일면 가능한 빨리 시선을 한배를 타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풍랑에서 시선을 떼어 주님께 두는 건데, 그 반대일 경우 곧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풍랑에 시선을 둘 경우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1분도 안 지나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는 마태오 복음 얘기는 오늘 마르코 복음과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주님은 한배를 타지 않으시고 나중에 제자들 곁으로 오시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듯 주님을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떨다가 주님인 줄 알고 나서는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물 위를 걸어 주님께 갑니다.
그런데 어쩌다 눈길이 풍랑으로 가자 다시 두려움이 생기고 물에 빠집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 바로 두려움에 빠지고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서에 다른 예가 있는데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예입니다.
골리앗은 거인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던 힘센 장수입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그 골리앗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러 나갑니다.
잘 아시다시피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나가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골리앗은 다른 장수와 마찬가지로 거인이지만 같이 나가주시는 하느님께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골리앗과 싸우는 데 칼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은 원수가 아니라 주님이고, 주님께서 나와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악습을 몰아내는 덕'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두려움 또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어떤 원수가 침입해도 다 이겨낼 수 있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수가 두려울 때 우리가 주님께 달려 간다면 그 두려움은 주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이라고.
오늘 제자들은 그래서 풍랑을 두려워하다가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는데, 복음은 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 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저는 이것을 일컬어 '두려움의 이동'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풍랑에 대한 두려움에서 주님께 대한 두려움으로의 이동, 작은 두려움에서 큰 두려움으로의 이동, 별것 아닌 두려움에서 참 두려움으로의 이동이라고.
우리의 두려움도 이렇게 이동해야겠습 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어려운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으시고, 고통스러운 상처와 가시를 경험하게 할 수도 있으시지만,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옆에 우리 안에 계실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모시고 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순수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선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모시려고 할 때 문제가 됩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자들이 지녀야 할 믿음입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믿음을 시험받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접하게 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도와주시기는커녕 고물에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똑같은 상황에서 태연하게 주무십니다.
고물은 ‘선미’로 배가 침몰할 때 가장 먼저 가라앉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주무시고,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며 투덜대고 불평하며 안절부절못합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재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접하게 될 때 우리 믿음을 확인받게 됩니다.
돌풍은 우리 마음속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몰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성숙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잠자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잠을 자는 것입니다.
아직 스승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좋지 않은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지만 배 안에서와 같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풍랑 너머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고 이어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나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요?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혼란케 합니다.
생각지 않은 우환, 어려움, 시련과 역경, 고통이 엄습할 때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어떤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옆에 계십니다.
제자들의 간청에 주님께서 잠에서 깨어 그들을 구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믿고 간청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삶의 파도에서 피난처를 찾기 위해 당신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타게 주님을 부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심으로써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시끄러운 곳에 있지 않고 잠잠하고 조용한 가운데 현존하셨습니다(1열왕 19,11-13).
물이 깊을수록 소리가 없듯이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잠잠하고 조용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소란을 피우고 혼란스럽습니다.
거센 돌풍 안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이야말로 진짜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조용하면 불안해하는 세상입니다.
음악을 크게 틀어야 하고, 사람을 만나도 큰 소리로 떠들고 시끄러운 곳을 찾아요.
공부를 하는 사람도 시끄러운 카페를 찾습니다.
시끄러우니까 목청을 더 높이고 그야말로 소음공해입니다.
그래도 그곳이 좋다고 합니다.
성당에 안에서도 잠잠하고 조용한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기 힘들어 잡담하고 왔다 갔다 부산 떨어요.
조용히 오래 머무는 것을 너무 힘들어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하고 잠잠함에 머무는 것입니다.
침묵하며 우리의 마음을 주님으로 충만히 채우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거나 성체조배를 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는 대상에게 내 마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넘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침묵 속에서 나의 모두를 드리고 있는가,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 나의 모두를 맞추려면 조용히 침묵 가운데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거센 파도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혹 어려움이 생기면 문제들에만 집착하지 말고 주님을 깨워 괴로움을 털어놓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불안과 두려움에 부산을 떨고 시끄럽다면 거센 돌풍을 잠재우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평불만 하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다면 믿음을 성장시켜 달라고 더 간절히 기도합시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주님,
제 주변의 시끄러움을 잠재워 주시고 불신에서 오는 슬픔과 좌절의 거센 돌풍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의 믿음은 약하고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러니 저를 풍랑의 세력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을 깨우는 일에 지치지 않게 은총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말씀이고 명령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평생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너무 쉽게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거센 폭풍이 닥치자 겁을 먹습니다.
그제야 겸손해져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시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가자고 했지, 너희가 가려고 한 것이니?”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내 일인데 왜 너희 일처럼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수 저쪽으로 가자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이러한 일을 계속 겪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상황은 제자들과 같았습니다.
나의 일이 되지 않았을 때는 사제가 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전에는 어떤 사제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되려다 보니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거였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의 주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를 통해서는 내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제가 되어 느끼는 것은 내가 사제가 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주님의 뜻을 따를 때는 주님께서 “내 일인데 네가 왜 걱정하니? 그렇게도 믿음이 없니?”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일어납니다.
한 번에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유학하러 갈 때도 그랬고 교구청이나 본당에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시키는 일은 그 이전에는 쉽게 보이지만, 막상 하려면 어렵습니다.
이런 과정이 자주 반복될수록 이젠 갈등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만큼 조금씩 겸손해지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점점 예수님의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거든 이 원리를 역이용하면 됩니다.
먼저 나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길을 선택해서 갑니다.
그러며 주님께서 맡겨주셨으니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서주십니다.
이때 내 안에 그저 주무시는 주님이 아닌 능력자로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로라 윌킨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 여자부에서 미국에 36년 만에 금메달을 안겨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올림픽 출전 3개월 전에 오른쪽 발뼈 부상으로 7주간 병원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코치는 올림픽 출전 불가를 선언했지만, 그녀는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였습니다.
중국이 16년 동안 강세가 이어지는 여자 다이빙 종목이었습니다.
총 5차전에서 2차까지 5위였습니다.
선두와 60점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3차전에 최고 점수를 얻어 순식간에 선두와 격차를 줄인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카메라는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이빙대에서 서서 도약 직전까지 계속 무언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녀가 중얼거린 것은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였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대역전의 비결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녀는 울먹이며 “저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사.시.』 7권 228장에서 예수님은 “착한 소원은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런 소원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그 소원들이 실현되기를 원하신다는 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려 하십니다.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참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 지배하시는 분”, 즉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말은 제자들이 그때까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제자가 되긴 했는데,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그랬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체험할 때마다 계속 놀라게 되고, 점점 더 예수님을 잘 알게 되고, 더 깊이 믿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 뒤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직도 나를 모르고 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
마르코복음만 놓고 보면, 이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았고(마르 1,25-26),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마르 1,34).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병자들 가운데에는, 그 당시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병 환자’도 있었고(마르 1,41-42), 중풍 병자도 있었고(마르 2,11-12), 장애자도 있었습니다(마르 3,5).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복종하게 만드는 일은, 그들에게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기적, 또는 차원이 다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큰 두려움’에(‘큰 경외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처음부터 ‘거센 돌풍’과 ‘파도’가 생기지 않게 하실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실 수 있었겠지만, 일상적인 자연 현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박해가(고난과 시련이) 일어나지 않게 하실 수는 없는가?”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계속 그런 질문을 했거나, 그런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박해자들도 그 자신들은 모르고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구원사업의 대상자들이고,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이고, 정말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직접 개입하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5-7)
이 말은, 누구나 무조건 반드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더욱 강하게 ‘단련’되고, 더욱 순수하게 ‘정화’된다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설명입니다.
고난과 시련 자체를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단련되고 정화되어서,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히 주님의 뜻입니다.
3)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눈앞에 닥친 고난과 시련이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없애 달라고(막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없애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가 더 좋은 기도입니다.
어떻든 인생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갈 때, 거센 돌풍과 파도를 만나서 정말로 힘들게 갈 수도 있고, 호수가 아주 잔잔해서 편안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노 젓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호수가 아주 잔잔하고 경치도 좋아서 노 젓는 것을 멈추고 경치 구경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목적지를 앞에 두고 중간에 멈추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이고,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중간에 멈추는 것은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 “변화, 사랑, 중심”>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사,
바다의 물결이 잠잠해지니,
잔잔해져 좋아라 날뛰는 그들을
희망의 포구로 이끄셨도다.”
(시편 107,29-30)
오늘 화답송 시편이 복음과 일치합니다.
몇 가지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중국에 여행을 다녀온 봄비 자매가 정성 가득 담긴 선물을 들고 인사차 다녀갔고 밤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새삼 건강이나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순수한 열정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분입니다.
“불암산 바위같이 떡 버티고 계시는 아버지 신부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서 봄비는 영광이옵니다.
주님 안에 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강론 쓰셔야 해요.”
믿음의 여정에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 도반같은 분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제 정주와 믿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새삼 스럽게 떠오른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거기 그 자리
늘 푸르른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
<2006.6. >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합니다.
산을 좋아하나 거의 산에 가지 않는 저에 대해 어느 분의 “산에 자주 가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글도 생각납니다.
“산이
산을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이예요.”
그대로 제 소망을 밝힌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인 평생 믿음의 전사, 평생 믿음의 학인이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평생 믿음의 학인인 우리들에게 참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사람들은 노력에 한계를 두고서는 재능에서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다산>
평생 믿음의 학인으로서 다산의 불퇴전의 의지를 엿보게 합니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칩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물러나 있다.”
<논어>
평생 학인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다산과 막상막하의 도반인 공자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믿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꼭 십년 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 참 많이 삶의 여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의 여정을 하루로 압축하여 일일일생, 일년으로 압축하여 일년사계,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점검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1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믿음이 여정 중 세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한계입니다.
한계가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이지만 참 많은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믿음의 여정에도 한계를 깨달아 아는 한계의 훈련은 필수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영역을 넘지 않는 것이며 서로 거리를 존중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함이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무한한 탐욕에 경계를 정해 한계의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참된 자유도 제 분수를 분명히 인식하는 한계의 훈련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시 하신 우선적인 일도 카오스 혼돈에 세계에 코스모스, 질서를 잡고 한계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이르기까지 일주간의 천지창조 프로그램이 각 영역마다 질서를 잡고 한계를 정하는 일이었고, 그리하여 조화로운 아름다운 세계가 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저자도 이런 하느님의 지혜에 정통한 분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폭풍 속에서 욥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할 때의 말이다.”
한계의 영성, 한계의 지혜, 한계의 사랑, 한계의 생명, 한계의 훈련입니다.
무절제한 탐욕에 한계를 정하여 한계 내에 충실함이 지구를 살리는 일이요 평화로운 상생 조화의 길입니다.
이래서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의 정주 서원 역시 바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살아내기 위한 한계의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한계 내의 삶에도 늘 새로울 수 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덕분입니다.
참으로 깊이의 내적여정에 참 좋은 사랑의 도반이 그리스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 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살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믿음이 여정이 늘 새로울 수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를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저에게는 그리스도 당신이 생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일들은 모두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품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여정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 깨달음에서 모든 성인이 일치합니다.
수십년 전 세수하다 대야 바닥에 투명히 드러난, “Life is Beautifual!(인생은 아름다워라!)이란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타계한, 언젠가 꽃을 들고 온 자매에게 준 다음 선물시(膳物詩)는 생각할 때 마다 늘 유쾌해집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요 인생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셋째, 중심입니다.
오늘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주제의 복음을 묵상하던 중 반갑게 떠오른 말마디가 중심입니다.
내 삶의 살아 있는 중심이, 내 공동체 살아 있는 중심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임을 깨닫게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호수 한복판 거센 돌풍에 시련중인 제자들의 배는 바로 인생항해여정중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주목할 바, 혼자 믿음의 여정이 아니라 주님과 그리고 제자들과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센 돌풍 한가운데 예수님은 태평무사한 모습으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니 말 그대로 믿음의 대가이자 달인이십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역시 믿음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부르짖음과 예수님의 답변에 고요해지는 주변 환경이 참 통쾌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예수님께서 깨어 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바람은 멎고 고요해집니다.
밖의 풍랑은 물론 마음 호수의 풍랑도 멎고 고요해졌을 것입니다.
주변이 혼란스럽고 마음의 풍랑이 심할 때 조용히 멈추어 주님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고 받는 말씀도 평생 화두가 됩니다.
“왜 겁을 먹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대로 주님과 우리와의 문답 같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주님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배움의 여정이 됩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믿음의 체험이 믿음의 여정중에 결정적 도움의 체험이 됐을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도 한층 깊어졌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늘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살아 계신,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
(시편 107,3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것>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5월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 첫 영성체, 청소년 음악회, 구역미사, 성령강림 찬양의 밤, 사제 서품식,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견진성사, 주일학교 여름 캠프, 포트워스 성당 주일미사’가 있었습니다.
포트워스 성당 신부님이 비자 연장을 위해 1달 동안 한국으로 가셨고, 포트워스 성당 미사를 도와 드려야 했습니다.
행사가 겹친 날도 있었습니다.
첫 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같은 날 있었고, 꾸르실료와 견진성사도 같은 날 있었습니다.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여러 행사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서품식입니다.
한국의 사제서품식이 질서정연하다면 미국의 사제서품식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서품식 중에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새 사제들과 친교의 포옹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포옹하였고, 새 사제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강림 찬양의 밤입니다.
짧은 시간에 음악 봉사자들이 연주와 노래를 준비하였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는데, 본당에는 재능을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라우다떼’ 찬양 팀이 음악피정도 준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풍랑을 잠재우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심한 풍랑에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러다가 배가 뒤집어 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워서 편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저는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98년 26년 전의 일입니다.
동생 수녀님이 백령도 성당에 있었고, 백령도 성당의 신부님이 동창이었습니다.
저는 동생 수녀님도 보고 동창 신부님도 보기 위해 연안부두에서 백령도 가는 배를 탔습니다.
‘임당수’라고 중간 쯤 갔을 때입니다.
선장의 안내 방송이 있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졌는데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냥 백령도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사람들은 배 멀미를 시작했습니다.
건장한 해병들도 멀미하였고, 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한 멀미를 했습니다.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하고 있을 때입니다.
백령도 주민들은 대부분 별 이상 없이 멀쩡하였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백령도 주민들은 바닥에 누웠습니다.
저도 따라서 바닥에 누워보니 신기하게도 속이 편해졌습니다.
‘불난 곳에 부채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욕심, 시기, 질투, 미움, 욕망의 풍랑이 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누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풍랑이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024년 5월은 지나갔습니다.
일정표의 31칸이 거의 채워졌습니다.
31칸을 그리스도와 함께 했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그 날들이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31칸을 나의 욕심과 나의 뜻으로 채웠다면 옛것으로 지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것은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 또한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시간은 언제나 옛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30칸이 비워있는 6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3가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표징을 읽고,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함께 한다는 말처럼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제, 공부하는 사제, 건강한 사제는 30칸의 날에 늘 새것을 채울 것입니다.
2024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갑니다.
지난날들에 옛것을 채웠다면 남은 날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것을 채우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보게 됩니다>
엘리노어 루스벨트 전 영부인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속 좁은 사람들은 사람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큰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많은 이가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도 소위 ‘뒷담화’를 통해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뒷담화는 아이디어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고, 일에 대한 말도 아닌 속 좁은 사람의 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속 좁은 사람이 많은가를 깨닫습니다.
저 역시도 친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종종 속 좁은 사람이 됩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제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또 사랑받는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속 좁은 사람의 길을 향하곤 합니다.
이제는 아이디어를 주제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말할 때도 인정, 칭찬, 사랑을 담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지길 원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속 좁은 모습이 아닌, 위대한 모습을 갖춘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주님의 마음을 다시금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은 우리의 속 좁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 가다가 풍랑으로 죽을 지경이 이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맘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 체험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가지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에, 그리고 자기들의 죽음에만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며 꾸짖으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사건만 또 사람만을 바라보면서 평범하고 속 좁은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충실하게 실천하게 됩니다.
망설임이 있을 수도 없고, 또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일을 하는 기쁨 안에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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