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이운우
건물 전체가 붉은 벽돌이다. 쾌쾌한 붉은 색이 섬뜩한 기운을 내뿜으며 높은 감시탑만이 우뚝하니 위협하는 듯 서있다. 내부로 들어서니 칙칙 한 시멘트벽에다 칸칸이 막아놓은 누추하고 좁은 벌집 같은 방이 양쪽으로 즐비하다.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다. 녹슨 쇠창살이 어둡고 음습하다.
화장실도 별도로 없는 좁은 공간에는 퀴퀴한 냄새에 빈대, 벼룩이 득시글거리는듯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만이 가득한 지옥 같은 생활이었을 애국선조들의 삶이 애잔하다.
서대문 형무소 추모의 탑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군사독재시절 민주화를 위하여 순국하신 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다.
말로만 들었던 우리민족 고난의 현장에 오니 평소와 마음이 달라진다.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는다. 선열들의 옥중생활을 상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뭉클하게 올라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어 나오는 진심으로 명복을 빌며, 그분들의 고통과 죽음 앞에 나는 죄인이 되어 머리를 조아린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서 온갖 멸시와 학대 속에서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맞이하였으나, 현실은 우리가 피를 토하며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일제청산을 못한 결과 일본군의 앞잡이들이 다시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원하고 분통이 터졌을까. 원통하고 억울함에 지금까지도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계실 것 같다. 가족들 또한 편안한 삶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형무소 담장 밖에서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이 노숙자처럼 모여 살던 곳에도 눈물과 한숨만 가득하여, 지금까지도 억울한 원혼들이 머물고 있는 것처럼 흔적으로 남아있다.
조금 전 전시관에서 보았던 한용운의 옥중시를 되새겨 보며, 그때의 풍경을 그려본다. 「감옥둘레 사방으로 산 뿐 인데 해일처럼 눈은 오고/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가 되는 꿈을 꾸네/ 철장의 쇠사슬 풀릴 기미 보이지 않는데 심야에 어디서 쇳소리는 자꾸 들려오는지.... 」- 만해 한용운 눈 오는 밤.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던 장대. 무시무시한 쇠망치. 쇠꼬챙이가 촘촘히 박힌 좁은 상자 같은 공간에 누울 수도, 기댈 수 도 없는 고문기구. 탁자위에 양손을 포박하고 뾰족한 대나무로 통증이 가장 심한 손톱 밑을 찔러 고문했다는 고문실. 손톱 발톱을 하나씩 뽑아 자백을 강요했다는 곳. 앉을 수 도 없고 조명도 없는 좁은 공간에 서있어야만 하는 고문실.
모든 공간에는 공포만이 가득하다. 공포심을 가중시키는 비명소리, 살점이 찢겨나가는 소리, 비릿한 피 비린내, 쇠창살 두드리는 소리, 음침한 공기,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을 것 같은 곳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 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앞날이 캄캄하다.
생명을 얼마나 더 연장할 수 있을까. 오늘은 어떤 고통이 있으려나. 수없이 많은 번뇌와 공포감이 휘몰아친다. 고통과 치욕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라리 하루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하지만,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눈조차 감을 수 없었을 독립지사들.
그렇게 선조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독재시대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목숨을 바쳐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오늘이 아닌가.
선조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나는 과연 우리나라를 위하여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독립운동도, 민주화 운동도 한 기억이 없다. 독립운동이야 그 당시 태어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하여도, 민주화 운동은 참여 할 수 있는 세대였는데도 말이다. 먼 나라 사람들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끼며 살아왔다.
부끄럽다. 빗을 진 것처럼 마음이 묵직하다.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다. 굳이 핑계를 만들자면 3선 개헌의 군사정부시절엔 중학생 신분으로 시국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고. 정권을 잡기위하여 자국민을 총칼로 학살하던 시대에는 군 생활 중으로 휴가 갔던 동료들에게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혼란기에는 제대하여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었다. 복학 후에는 서슬 퍼런 총칼의 억압으로 시위 자체가 없어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핑계거리가 될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우리사회를 위하여 헌신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냥 소시민으로 미미한 구성원으로 살아왔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조들 보기에 민망하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쩌다 sns에 댓글을 다는 정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잊지 말아야 한다. 선조들이 일제에 어떤 수모를 당하며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나라가 없는 설움을 알아야 한다. 미래만 중요 한 것이 아니다. 과거 없는 미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 없는 용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몇 십 년이 걸리든 몇 백 년이 걸리든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느끼도록 하여야 한다. 어떤 이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겪은 일에 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격분하느냐”고 하는 말에는 할 말을 잃고 그냥 귀가 멍할 뿐이었다. 자신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린 선조들의 애국심에 고개를 숙이며 명복을 빌었다.
※ 서대문형무소: 1908년 일제가 건립하여 1987년 폐쇄까지 80년 동안 감옥 으로 사용.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 운영하고 있음.(2024.02)
첫댓글 잊지 말아야 한다. 선조들이 일제에 어떤 수모를 당하며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나라가 없는 설움을 알아야 한다. 미래만 중요 한 것이 아니다. 과거 없는 미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 없는 용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몇 십 년이 걸리든 몇 백 년이 걸리든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느끼도록 하여야 한다. 어떤 이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겪은 일에 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격분하느냐”고 하는 말에는 할 말을 잃고 그냥 귀가 멍할 뿐이었다. 자신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린 선조들의 애국심에 고개를 숙이며 명복을 빌었다.